다리
(...)
마침내! 나는 여기에서, 작은 가방을 메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 30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몇 미터밖에 안 되는 이 나무다리를.
이 칙칙한 나무다리가 어떻게 한 민족 전체에게서 꿈을 빼앗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기 집에서 커피 한잔 마시겠다는 바람을 모든 세대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째서 이 다리 하나 때문에 그 모든 인내와 죽음을 감내해야 했을까? 이 다리는 어떻게 우리 모두를 망명지와 천막촌과 정당political parties[정치조직들]1)과 겁에 질린 속삭임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네게 고마워하지는 않겠다, 이 짧고 변변찮은 다리야. 우리에게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 네가, 바다나 대양도 아니라니. 보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드는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맹수들로 가득한 산맥도 아니라니. 하지만 네게 감사한다, 다리야. 다른 행성에 있지 않은 것을, 낡은 메르세데스를 타고 30분 만에 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준 것을. 주홍빛 용암을 내뿜는 화산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미천한 목수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고맙다. 귀 뒤에 담배를 꽂고 입으로는 손톱을 깨물던 목수들이 너를 만들었지. 작은 다리야, 네게 고맙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내가 지금 네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내 앞에 있음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냐? 너는 순진무구한 시인의 눈앞에 떠있는 별, 아니 그보다는, 몸이 마비된 자 앞에 놓여 있는 계단. 대체 이 망설임은 무얼까?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으며, 너는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발밑에서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
페이루즈2)는 이 다리를 ‘귀환의 다리’라 부른다. 요르단 사람들은 ‘킹 후세인 다리King Hussein Bridge'라 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알 카라마 건널목al-Karama Crossing'이라고 부른다. 버스 기사나 택시 기사, 보통 사람들은 ‘알렌비 다리Allenby Bridge'라고 부른다. 내 어머니와 외할머니, 아버지, 움 탈랄3) 숙모는 그냥 간단하게 ‘다리’라고만 부른다.
서른 번의 여름을 보낸 뒤 이제 나는 다리를 건넌다. 1966년 여름, 그리고 1996년 여름.
여기, 이 금지된 널판들 위를 걸으며, 나는 내 모든 인생을 놓고 나 자신과 이야기하고 있다. 소리도 없이, 쉴 새 없이 내 인생을 재잘거린다. 이미지들, 너저분한 삶의 장면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기억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면서 파열해 버린다. 이미지들이 떠올라서는 완전한 모양으로 가다듬을 틈도 주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형태를 만든다. 혼돈의 형태.
오래전 어린 시절. 친구들과 적들의 얼굴. 나는 다른 대륙에서 건너와 그들의 언어를 말하며 그들의 경계선에 다가가는 사람. 안경을 쓰고 어깨에 작은 가방을 멘 사람. 이것들은 다리를 덮은 널판. 이건 그 위를 걷는 내 발걸음. 나는 지금 시詩의 땅을 향해 걷고 있다. 방문자? 난민? 시민? 손님? 나도 모른다.
정치적인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감정적인 순간? 아니면 사회적인? 실용적인? 초현실적인? 이 순간을 맞고 있는 것은 몸인가? 아니면 마음인가? 나무가 삐걱거린다. 인생에서 지나쳐 간 순간들이 안개 사이로 나타나서는 숨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가방을 던져 버리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다리 밑에는 물이 거의 없다. 물 없는 강. 마치 강물이 두 역사 간의, 두 신념 간의, 두 비극 간의 경계선에 존재하고 있음을 미안해하는 것 같다. 바위들로 가득한 눈앞의 풍경. 백악白堊, 군대, 사막. 치통처럼 쓰라리다.
요르단 깃발이 여기 있다. 빨강과 흰색, 녹색. 아랍 혁명을 상징하는 색이다. 몇 미터 더 가자 이스라엘 깃발이 있다. 나일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닮은 푸른 선 사이에 놓인 다윗의 별.4) 한 줄기 바람이 두 깃발을 흔든다. “흰 것은 우리의 행동, 검은 것은 우리의 전투, 푸른 것은 우리의 땅…….”5) 마음속에 시 구절이 떠오른다. 하지만 눈앞의 풍경은 계산서처럼 살풍경하다.
발밑에서 널판들이 삐걱거린다.
유월의 오늘 공기는 유월의 어제 공기처럼 끓어오른다. “오, 나무로 만든 다리여…….” 갑자기 페이루즈가 떠오른다. 이 노래는, 그녀의 노랫말답지 않게 너무나 직선적이다. 그런 가사가 어떻게 지식인들과 농부들과 학생들과 군인들과 촌부村婦들과 혁명가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었을까? 민중에게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남의 입을 통해 들을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자기들 안에 있는 것을, 자기들 밖의 목소리를 통해 듣기를 좋아하는 걸까? 침묵하는 민중은 그렇게 해서 자신들을 대신해 이야기할, 상상 속 금지된 의회의 대변인들을 뽑는다. 사람들이 직설적인 시를 원하는 때는 불의의 시대, 공동체가 침묵하는 시대다. 행동하거나 말할 수 없는 시대. 속삭이며 넌지시 말하는 시들은 자유로운 사람들이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시민들, 목소리를 내는 일을 남에게 맡길 필요가 없는 사람들 말이다. 문학비평가들은 아랍식 머리쓰개 위에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반쯤 감은 눈으로 서구의 이론을 따라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이 진부한 모자의 비유가 지금 내게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야물커6) 를 쓴 이스라엘 병사가 서있다. 이것은 문학적 비유가 아닌 진짜 모자다. 그는 강 서쪽 편에 외롭게 서있는 검문소 문에 기대어 있다. 저기서부터 이스라엘 관할 지역이 시작된다. 그가 어떤 느낌으로 서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생각도 나타나 있지 않다. 나는 닫힌 문을 쳐다보듯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제 나의 발은 강의 서안에 와있다. 나무다리는 내 뒤에 있다. 나는 흙 위에, 땅 위에, 잠시 멈춰 선다. 나는 다 죽어 갈 무렵 뭍을 발견하고 “땅, 땅! 땅이다!”를 외쳤던 콜럼버스도 아니고,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도 아니다. 이기고 돌아왔다며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는 승전병도 아니다. 나는 땅에 입을 맞추지 않는다. 울지도 않는다. 슬프지도 않다.
하지만 이 쇠약한 황무지에 서있자니 그의 얼굴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저기 멀리, 내 손으로 그를 뉘이고 묻었던 무덤에서 그가 웃으며 나타난다. 어두운 묘지에서 나는 그를 마지막으로 끌어안았고, 추모하러 온 이들이 나를 잡아당겼다. “무니프 압둘 라제크 알 바르구티, 1941~93.” 묘비 아래 그를 홀로 남겨 두고 나는 떠났다.
나는 몇 걸음 걷는다.
군인의 얼굴을 쳐다본다. 일순간 그는 고용된 일꾼, 불만과 지루함에 시달리는 피고용인처럼 보인다. 아니다. 그는 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다(혹시 나는 내 나라가 처한 상황을 그에게 투사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것도 아니다. 나 같은 팔레스타인 사람 수천 명이 가방을 들고 여름을 맞아 이곳을 방문하거나 혹은 돈을 벌기 위해 암만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에게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처지가 다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어째서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나는 처지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기가 상황이 나쁘더라도 남과 다르다는 게 좋은 걸까?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기중심주의인 것일까? 30년 만에야 이곳을 다시 지나가게 된 것이니, 내 경우는 ‘다르다’고 말하는 게 합리화될 수 있지 않을까? ‘점령’하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리를 오갈 수 있다. 망명자들 중에서도 방문 허가증이나 가족 재결합 허가증을 가진 이들은 통행이 허용된다. 30년 동안 나는 두 종류의 허가증 가운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저 군인이 그걸 알까? 그런데 나는 왜 그가 그걸 알아주길 바라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나던 때에는 내 안경알이 이렇게 두껍지 않았고 머리칼은 완전히 검은 색이었다. 기억의 무게는 가벼웠고, 기억력도 좋았다. 그때 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 이곳을 마지막으로 건너던 때의 나와 비슷한 나이의 아들을 둔 아버지다. 그때는 멀리 떨어진 나라에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내 나라를 떠나고 있었지만, 지금 나는 그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뒤에 두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곳을 떠날 때에는 내가 라말라에 머물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번 방문에서 나는 내 아들이 라말라를 볼 권리를 얻을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아들에게 난민 증명서와 추방 증명서를 받아 줄 수 있을 것인가? 아들은 어디로 옮겨가 본 적도 없고 난민 신청을 해본 적도 없다. 자신의 조국 바깥에서 태어나 자랐을 뿐이다.
지금 나는 망명지를 떠나 돌아간다. 그들의 나라? 나의 조국?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점령지?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그 지역’이라고 부르는 곳? 유대와 사마리아? 자치정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름에서부터 이토록 혼란스러운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오래전 내가 이곳을 떠날 때에는 나도 분명했고 모든 것이 분명했다. 지금 나는 확신이 없고 흐릿하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흐릿하다.
야물커를 쓴 군인은 모호하지 않다. 적어도 그의 총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의 총은 나의 개인적인 역사다. 그것은 내 추방의 역사인 것이다. 그의 총이 시의 땅에서, 땅의 시에서 우리를 떼어놓았다. 그의 손은 땅을 붙들고 있지만, 우리는 신기루를 쥐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떤 면에서는 모호하다. 그의 부모는 작센하우젠7) 에서 왔을까, 다카우8) 에서 왔을까? 아니면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갓 도착한 새 정착민이려나? 아니면 중부 유럽? 북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혹시 체제에 불만을 품고 러시아에서 이리로 온 망명자인가? 아니면 여기에서 태어나,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의심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일까? 자기네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아니면 우리의 끊임없는 봉기를 자기네 국가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우리네 사람들을 죽여 본 적이 있을까? 그저 피할 수 없어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 저 사람의 인간성을 시험해 본 사람 없소? 저 개인의 인도주의 말이오. 나는 그의 직업이 갖고 있는 비인도성을 샅샅이 알고 있다. 그는 점령군 병사이고, 그의 처지는 어떻게 보든 나와는 다르다. 특히 이 순간에는. 나의 인간됨을 그가 알아볼 수 있으려나? 그의 빛나는 총 그림자 아래를 매일 지나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간됨을?
우리는 같은 곳 위에 서있지만 그의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지 않다. 그는 국제적 정통성을 인정받으며 공중에서 자유로이 펄럭이는 두 개의 이스라엘 국기 사이에 서있다.
“차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가 아랍어로 말한다.
“차가 나를 데리러 어디로 오지요?”
“국경 경비소요. 모든 절차는 거기서 이루어집니다.”
나는 기다린다.
그의 작은 방,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깨끗하고 덜 말쑥한 방 안에는 관광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내 눈은 마사다 요새9) 사진에 가서 멈춘다. 저들의 신화에 따르면, 저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숨질 때까지 마사다 요새에서 저항했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의 길목에 저 포스터를 걸어 둔 것은 이 땅에 영원히 머물겠다는,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일까? 그냥 포스터일 뿐일까, 면밀히 계산해 걸어 둔 것일까?
나는 방 안을 둘러본다. 낡은 의자 두 개. 네모난 탁자. 왼쪽 귀퉁이가 깨진 거울. 히브리어 신문들. 작은 부엌, 차나 커피를 끓일 수 있는 간단한 전기스토브. 표준적인 국경 수비대원의 방이다. 우리에 맞서, 우리의 나라를 방어하는 수비대원.
그가 나를 조사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내게 무어라 말한다면, 혹은 무언가 묻는다면 그의 말에 응해야 하나? 아니면 못 들은 체하고 있어야 할까? 나는 이 의자에 앉아 내내 침묵하고 있지만,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속에서 내가 그의 음성을 구분해 낼 수 있을까? 지금 내 앞에 있는 문을 통해 차례로 들어오는 사람들, 내 옆에 서있는 방 안 사람들에게, 이 다리는 두 세계를 잇는 다리다. 그들이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세계, 그리고 내가 곧 보게 될 세계.
이 사람들은 영원한 침묵 속에 떨고 있는데, 그 속에서 내가 저 군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걸까? 지금 여기서? 이 다리를 열기 위해 사람들이 머나먼 땅에서 죽어 가고 미처 이곳에 이르기도 전에 순교해야 했음에도?
죽은 자들은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노년에 시력을 잃었던 내 외할머니는 시인이었다. 그녀는 마을에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으면 운韻에 맞춰 기쁜 노래, 슬픈 노래를 불렀다. 새벽마다 할머니가 속삭이듯 기도하던 음성을 기억한다. 어떤 시집이나 산문집에서도 본 적 없는 기도문, 오직 외할머니의 것이었던 말들. 그녀가 잠자리에 들면 나는 침대로 가 곁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마법의 주문 같은 기도문을 들려 달라고 조른다. 음악처럼 기도문을 들으면서 나는 따뜻한 잠 속에 빠져든다. 수업 시간에도, 지겨운 교과서의 책장을 넘길 때에도, 내 어린 시절 최초의 적敵이었던 구구단을 외울 때에도 그 음악은 늘 나와 함께했다.
암만의 바야디르 와디 알 사이르의 무덤에 남겨진 내 아버지. 가느다란 눈매에 조용하고 성품이 고요했던 분, 세상의 폭력에 멍들면서도 세상에 만족했던 분이었다.
죽음으로 파괴된 나의 형 무니프. 저들은 그의 아름다운 마음과 뜻을 파괴했다. 그들은 라말라를 다시 보리라던, 단 며칠만이라도 다시 보고파 하던 그의 꿈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하지미야10) 전체를 뒤흔든 폭탄으로도 침묵시킬 수 없었던 가산 카나파니.11)
사무실에 앉아 인슐린 주사를 팔뚝에 꽂은 채로 나와 라드와를 반갑게 맞던 가산. 그의 어깨 너머 벽은 포스터들로 덮여 있었고, 밖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지. 그런데 내가 녹색 옷을 입은 저 병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산의 방에 걸려 있던 포스터는, 이 대기실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는 너무 달랐다. 체 게바라의 베레모에 달려 있던 별. 레닌의 이마에 새겨진 물음표. 도둑맞은 이름을 되찾기 위한 펜과 붓을 수놓은 그림. 고삐 풀린 말이 액자 안에서 뛰어오르고 있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의 사진과 구호, 팔레스타인을 이끌어 갈 인물들의 글과 사진들.
지금 가산은 고향인 아크레12) 에 더 가까워졌을까, 더 멀어졌을까?
나는 아직 10대에 불과한 이스라엘 병사가 머무는 이 방의 포스터와, 베이루트에 있던 가산의 사무실에 붙어 있던 포스터들을 비교해 본다. 서로 다른 세계. 가산의 세계는 네루다13) 의 시와 카브랄14) 의 연설, 레닌의 뻗어 올린 손, 파농15) 의 비전. 소설가라면 이런 빛깔로 자신의 꿈을 채색하고 싶어 했을 군청색과 살굿빛과 오렌지빛. 하지만 무지개는 사그라지고 재앙과 상실의 어두운 전조가 하늘을 가득 채웠지. 그리고 여기는? 나는 벽과, 벽에 붙은 그림들을 바라본다. 저것은 내 나라의 풍경이다. 하지만 이 금지된 국경에 저 풍경들이 얹혀진 이유와 맥락을 생각하면, 포스터들이 나를 공격해 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지 알 알리16) 가 내게 주었던 커다란 그림이 떠오른다.
나지 알 알리는 라드와와 나를 베이루트 해변에 있는 ‘마이애미’라는 레스토랑으로 초대했다.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그는 자동차에서 커다란 그림을 꺼내 왔다. “자네의 시와 함께 『앗사피르』17) 에 실렸던 거야. 자네 가족에게 주려고 원래 그림보다 더 크게 다시 그렸다네.”
라드와와 나는 그의 차를 타고 시돈18) 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한 뒤 보 리바주 호텔의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한 어린아이의 얼굴이 그림의 복판을 채우고 있다. 양 갈래로 땋은 소녀의 머리는 수평으로 뻗쳐 있다. 한 갈래는 오른쪽, 한 갈래는 왼쪽으로. 갈래머리는 끝부분으로 가면서 철조망으로 변한다. 그림의 테두리에까지 뻗은 머리카락 뒤로는 어두운 하늘.
나지 알 알리의 죽음은 오래된 죽음,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죽음이다. 그의 눈에 어리던 미소, 그의 마른 몸. 런던 교외에 있는 그의 무덤가에 섰을 때 무너진 내 가슴속에서 들려오던 울음소리. 흙더미를 쳐다보던 나는 “안 돼!”라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내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 팔을 어깨에 두른 채 내 앞에 서서 자기 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던 아홉 살배기 우사마조차 그 말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이제 나는 그 말이 나오기 이전의 고요로는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
‘안 돼’라는 그 말은 끝나기를 거부했다.
그 말은 자라났다.
그 말은 일어섰다.
나는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오래도록, 끝나지 않는 울음을.
다시는 그 말을 집어넣을 수 없다. 그때 함께 있던 우사마와 주디와 라얄과 칼리드와 위다드 형수와 내 위로 내리던 이슬비처럼 그 말은 공기 중에 매달려 있다. 마치 심판의 날까지 하늘에 머물러 있겠다는 듯. 머나먼 하늘, 희지도 푸르지도 않던, 우리의 하늘이 아니었던 그 하늘…….
위다드 형수의 오빠가 내 어깨를 꽉 붙잡더니 내게 말했다. “제발, 무리드. 진정해라, 내 아우야. 진정해. 굳건히 서있어야지.”
흐느껴 울다가 반쯤 정신을 잃을 뻔했던 나는 퍼뜩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어느새 내 입에서는 나약한 말이 새어 나왔다. “굳게 서있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라고요!”
우리는 묘지를 떠나 윔블던에 있는 나지 알 알리의 집으로 갔다.
그의 가족들은 나더러 그의 방에 머물라고 했다. 나는 미처 끝내지 못한 그의 그림들, 스케치들 틈에서 잠을 잤다. 나는 그가 직접 만든 나무 의자와 책상, 작업대를 보았다. 책상에서 이어진 작업대는 창문과 맞닿는 높이에 있어, 마당과 하늘이 내다보였다. 창에는 커튼이 없어, 바깥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지켜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위다드가 커튼을 만들어 주었지만 나지는 “트인 공간이 좋다.”면서, 창을 가리면 숨이 막히는 것 같다며 뜯어냈다고 한다. 그가 너른 공간을 좋아했다는 위다드의 말을 듣자니, 컴컴한 그의 무덤 풍경이 내 귓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방에서 자며 그의 가족들과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그의 작은 책상에 놓인 백지와 펜으로 나는 그에 대한 글을 썼다. 그의 삶과 그림과 죽음에 대해. “늑대가 그를 먹어 치웠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의 제목이기도 했다. 나중에 이라크 예술가 디아 알 아자위와 몇몇 친구들이 런던의 화랑에서 그를 추모하는 전시회를 열었을 때 나는 개막식에서 그 시를 낭독했다.
화랑 입구에는 세 명의 젊은 남자들이 일렬로 서서, 나지를 추모하고 그의 그림들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순교자 나지 알 알리의 아들 칼리드.
순교자 가산 카나파니의 아들 파이즈.
순교자 와디 하다드19) 의 아들 하니.
모두들 한창 젊음을 꽃피울 나이. 입구에서 이들을 포옹하는데 입술이 타들어 갔다. 이 듬직한 어깨들, 명민하고 지적인 눈매들, 누가 이들을 장례식장으로 내몰았던가? 허가받지 않은 살인자들 때문에 파괴당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어찌 그 유년의 폐허 속에서 이토록 든든한 청년으로 자라났을까?
칼리드가 내게 두 친구를 소개해 주었고, 나는 두 청년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의 음성을, 음색을 듣고 싶었다.
그날 밤 그들의 모습은 내게는 현실이라기보다는 마치 소설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 전통에서는, 이렇게 입구에 서서 문상객이나 축하객을 맞아 인사를 하는 것은 가족이나 정치조직 내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몫이다. 그날 그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이 세 젊은이들로 인해 ‘유명한 사람들’이라는 말의 정의가 바뀌었다고, 그들을 보기 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신선하고 놀라운 의미로 바뀌었다고.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감에 떨리는 마음을 안고, 나는 팔레스타인 역사를 통틀어 가장 용감했던 예술가의 무덤을 뒤로한 채 부다페스트로 돌아갔다.
그들의 얼굴은 13세기의 어두운 성당들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안드레이 루블료프20)의 그림들처럼 내 맘을 맴돈다. 여기 이 국경 수비대원의 방은 어둡지도 않고, 주위가 텅 비어 있지도 않다. 이렇게 더운 날은 처음인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지금 열이 나기 시작한 건가? 아부 살마21) 가 방으로 들어온다. 무인22) 과 카말23) 이 방으로 들어온다.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시들은 점점 자라나, 그들이 들고 있던 종이보다도 커진다. 무니프와 나지가 되돌아온다. 일순간 긴장감이 방 안을 채운다. 얼굴들, 환상, 목소리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목소리에 화답한다. 그대들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그리고 다시 완전히 혼자가 된다. 이 특별한 날을 혼자서 맞은 나를 용서하게, 친구들!
* 주
1) 지은이는 정치조직들도 모두 정당이라고 표현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사실상 모두 정치조직이었으며, 의회가 있는 지금은 파타나 하마스 등이 정치조직이자 정당이다.
2) 페이루즈Fayrouz, 1932~: 본명은 나우하드 와디 하다드Nouhad Wadi Haddad 레바논 출신의 여가수로, 아랍권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3) 움Umm은 어머니를 뜻하는 아랍어이지만 ‘마담’처럼 여성들에 대한 경칭으로도 쓰인다.
4) 이스라엘 국기 한가운데 그려져 있는, 삼각형 두 개를 엇갈려 놓은 별 모양.
5) 중세 아랍 시인 사피 알 딘 알 힐리Safi Al-Din Al-Hilli, 1277~1349의 시에 등장하는 구절.
6) 야물커yarmulke: 유대교 남성들이 기도할 때나 경전을 읽을 때 쓰는 머리쓰개.
7)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독일 베를린 북쪽에 있던 나치의 정치범 수용소. 1936~ 45년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갇혀 고초를 겪거나 목숨을 잃었다.
8) 다카우Dachau: 독일 뮌헨 근처에 있던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
9) 마사다Massada 요새: 이스라엘 남동부에 있는 고대 유적. 기원후 70년 유대 왕국이 로마군에게 함락될 당시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요새다. 20세기 들어 건국된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의 용기를 상징하는 곳으로 이 요새를 부각시키고 관광지로 만들었다.
10) 하지미야Hazimiya: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있는 거리 이름.
11)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 1936~72: 팔레스타인의 저항 시인. PLO의 대변인을 지냈으나 나중에는 노선 차이로 갈라서, 또 다른 저항 기구인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창설을 주도했다. PFLP의 기관지 『알 하다프』Al Hadaf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당신들에게 남은 것』Ma Tabaqqa Lakum(1966), 『움 사아드』Umm sa’d(1969) 등의 저항문학 작품을 남겼다. 국내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윤희관 옮김, 열림원, 2002)가 번역·출간돼 있다. 1972년 베이루트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차량 폭발 공격으로 암살됐다.
12) 아크레Acre: 기원전 1500년 페니키아 시대부터 교역 도시로 발달했던 지중해 연안의 항구. 현재의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해 있다.
13)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73: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14) 아밀카르 카브랄Amilcar Lopes Cabral, 1924~73: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의 좌파 혁명운동가.
15)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61: 프랑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 반식민주의 투사.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으로 참전했으나, 알제리의 정신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반反 식민 투쟁에 눈뜨게 된다. 흑인에 대한 차별, 식민지에 대한 차별에 항거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에 뛰어들었고 알제리 혁명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알제리 독립 직전인 1961년 백혈병으로 미국에서 사망했다.
16) 나지 알 알리Naji al-‘Ali, 1938~87: 팔레스타인 출신의 저명한 만평 작가. 쿠웨이트에서 발행된 『알 시야사』al-Siyasa 신문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만평을 그렸다. 그가 그린 풍자만화의 캐릭터인 한달라Hanthala는 아랍권 전역의 사랑을 받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1987년 7월 22일 영국 런던의 사무실에서 또 다른 쿠웨이트 신문 『알 카바스』al-Qabas의 만평을 그리던 중 저격당해 5주 뒤 숨을 거뒀다.
17) 『앗사피르』As-Safir: 레바논의 대표적인 아랍어 일간지. 범(凡)아랍주의·좌파 성향의 지식인 탈랄 살만Talal Salman이 1974년 창간했다. ‘앗사피르’는 ‘대사大使'라는 뜻이다.
18) 시돈Sidon: 레바논의 유명한 고대 유적 도시이자 항구. 현재는 영어식 표기이기도 한 사이다Saida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9) 와디 하다드Wadi’ Haddad, 1917~78: 팔레스타인 해방 투사로, 67년 전쟁 이후 PFLP에서 일했다. 1978년 3월 옛 동독에서 모사드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yov, 1360~1430 추정: 중세 러시아 화가. 그리스정교회 성당들의 종교화들을 많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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