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디지털 중세기를 탈출하기 ─ 디지털 비평
인터넷 바깥의 인터넷
“인터넷은 사라질 것이다.” 2015년 초 다보스 경제포럼에서 구글의 에릭슈밋 회장이 한 말이다. 미래의 인터넷은 공기나 중력처럼 우리 생활에서 흔하고 당연한 요소로 스며들어 매개자로서의 존재감이 사라질 거라는 전망이다. 그의 말대로 인터넷 접속점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그 추세도 무섭게 가속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 첫 번째 인터넷 프로토콜인 IPv4의 경우는 약 43억 개의 주소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에 주소를 모두 소진하고 할당이 중지됐다. 그 정도 규모로는 사물인터넷의 미래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세대 인터넷 주소 체계인 IPv6는 아이피 주소를 340조 개나 부여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유입되고 있는 데이터 양도 전대미문의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인류 문명의 시작부터 2003년까지 생산된 데이터의 총량은 5엑사바이트exabyte, 1엑사바이트는 10바이트의 18제곱에 해당한다.라고 한다. 오늘날 5엑사바이트쯤은 전 세계네트워크로 쏟아져 들어오는 데이터의 이틀 치 생산량밖에 되지 않는다. 2020년에 이르면 디지털 데이터의 생성 규모는 40제타바이트zettabyte에 도달할 것이다. 전 세계 해변 모래알 수7해 50경 개의 57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트bit로 축조된 데이터베이스 환경에 세계 전체가 겹겹이 쌓이고 있다.
비트는 코딩 방식에 따라 상품이자 서비스가 되며, 무엇보다 돈으로 변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시대 경제 체제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가장 많은 비트를 수취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주인이 우리 시대 정치·경제·문화의 패권을 움켜쥘 수 있다. 더 많은 접속점, 더욱더 많은 데이터 생산량을 좇는 오늘날의 인터넷은 시장 경제의 가장 탐욕스러운 속성에 물들어 있다. 정녕 인터넷은 이런 형태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 시대는 왜 이런 괴물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일까?
에릭 슈밋은 이른바 구글노믹스Googlenomics의 장밋빛 미래를 ‘사라지는 인터넷’에서 찾았지만, 그의 전망은 인터넷의 지난 역사를 단순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인터넷은 수많은 이종異種의 인터넷과 더불어 발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은 초기 인터넷의 역사에 이미 존재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인터넷이 파괴된 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사용자들의 직접적인 상호작용 능력에 기초한 기술이었다. 오늘날의 인터넷이 대기업 통신사에 획일적으로 집중된 서버 클라이언트server client구조로 이뤄진 것과는 많이 달랐다. 게다가 지금의 정보자본주의와 인터넷은 금융 시스템과 하나가 돼 있다. 필연적으로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는 정보 공유지를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불과 30여 년 사이에 벌어진 변화다. ‘서버 클라이언트 자본주의 국가’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다른 이름임을 냉철히 인식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익스플로러, 크롬, 오페라, 파이어폭스, 사파리는 각기 다른 웹 브라우저이지만 거대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업을 통하지 않으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다. 다양한 종류의 웹 브라우저가 있는 것처럼 인터넷도 복수가 되어야 하지만, 서버 클라이언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기술이 시도되기 쉽지 않다. 통신사는 수익 구조를 침해받기 때문에 좌시하지 않을 테고, 국가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허점이 생기는 것을 내버려 둘 리 없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해방적 역량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억압받아왔는가를 알 수 있는 충격적인 사례가 있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 추진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인터넷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이 그것이다.
아옌데 정권은 칠레를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회주의 경제로 전환하고자 했다. 그러려면 칠레의 현 경제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중앙 집중적인 관료주의를 피할 수 있는 분권적이며 민주적인 네트워크로 구축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1971년에 실제 가동됐던 사이버신 시스템이었다. 노동자들의 협동경영으로 운영되는 각 공장과 산업 단위가 이 네트워크에 속속 연결됐다. 현장의 노동자와 지역 관리자가 정보를 입력하고 의사 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소련의 사이버네틱 시스템보다도 진일보할 방식이었다. 사이버신은 1973년까지 국가 경제 시스템의 75퍼센트에 접속할 수 있었다. 노동자 주도의 민주주의 운동과 새로운 컴퓨터 통신 기술의 역사적인 융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칠레 기득권층은 남미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73년 9월 11일, CIA의 조직적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날 대통령궁에 가해진 폭격으로 아옌데는 사망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인터넷이 파괴된 날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인터넷은 이런 역사 위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
오늘날의 인터넷은 가두리 양식장 신세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발달했으나 진보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인터넷은 한마디로 가두리 양식장 신세다. 감시와 검열 기술로 포위된 서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2014년의 카카오톡 사태는 이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애당초 다른 인터넷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카카오톡을 떠나 텔레그램으로 옮겨가는 현상은 집단적인 해프닝에 불과했다. 메신저 사용자들이 사생활 보고 기능이 강화된 텔레그램으로 옮겨간다고 해도 기본적인 인터넷 접속은 서버 클라이언트 구조를 거칠 수밖에 없다. 기업과 국가의 패킷 감청에서 구조적으로 벗어나기 힘든 환경이다.
지난 10년간 이 나라에서 인터넷 패킷 감청 설비의 숫자는 무려 아홉 배나 증가했다. 이 설비가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카카오톡의 보안성 문제 이상으로 심각한 사안이다. 최근에 이런 일마저 있었다. 국내 병원의 진료 기록 전산화 업무를 대행하는 한 민간회사가 미국 제약회사에 25억 건의 의료정보를 팔아먹었다. 서버를 둘러싼 우리 시대의 윤리는 이토록 저열하기 짝이 없다. 이런 환경을 그냥 내버려 두고 사는 것은 단언컨대 굴종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 비참함을 놀랍도록 금세 잊어버린다. 가공할 무지와 무심함의 만연이야말로 우리 시대 인터넷의 참을 수 없는 경이로움이다.
지금의 인터넷이 당연한 상식처럼 여겨져선 안 된다. 에릭 슈밋의 말은 이렇게 비틀어야 한다. 인터넷은 이대로 사라져선 안 된다. 더 나은 인터넷에 대한 사회적 상상에 불을 지펴야 한다.
오늘날의 인터넷 네트워크는 폐쇄적이고 중앙집중화되어 있다. 소비자가 자신이 직접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인프라를 소유하지 않고 기업 네트워크에 의존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할수록, 인터넷의 미래는 소수 대기업의 독점적 운영에 좌지우지될 것이다.
해방의 불꽃을 만드는 기술을 되찾으려면
다른 인터넷을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업화에 침범당하지 않는 정보 공유지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사회를 바꾸는 유일한 길은 다르게 생산하고 공유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 시대의 디지털 기술, 인터넷 기술에 억제된 부분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해방의 불꽃을 만드는 기술을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 뒤에 감추고 있다. 그것을 시민들의 공공재로 빼앗아 와야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5년 3월 15일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비트코인bitcoin 진영의 새로운 인터넷 ‘이더리움Ethereum’은 2010년대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힐 만한 혁명적인 시도다. 이더리움은 서버를 경유하지 않는 인터넷이자 탈중앙화된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놀랍도록 젊고 참신하다.
이 그룹의 대표 격인 비탈리크 부테린Vitalik Buterin은 스무 살의 청년이다. 그 나이면 인터넷이 없던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데 가장 영민할 수 있는 나이다. 대안적인 화폐시스템과 인터넷을 연동시킨다는 이더리움의 개념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예고한다. 중앙은행들의 국권화폐가 흐르는 길이 서버 클라이언트 인터넷이라면, 이더리움은 탈중심화된 암호화폐cryptocurrency가 흐르는 탈중심화된 인터넷을 지향한다. 오픈소스로 기술을 공개해놨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종의 이더리움 개발에 뛰어들 수 있다. 이것은 비트코인 기술의 기본적인 원칙이기도 하다. 더 많은 사람이 접속할수록 더욱더 다양하고 안정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철학의 공유다.
이제 막 시작된 이더리움의 성공 여부를 미리 장담할 순 없다. 이더리움이 서버 클라이언트 인터넷의 지배 질서를 전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더리움은 우리를 둘러싼 인터넷 환경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할 수 있는 사회적 실험이다. 실패 뒤의 또 다른 실패, 실험이 끝난 뒤의 또 다른 실험으로 이어질 도전이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그 창조적 연쇄를 멈추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보자본주의의 진행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꿀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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