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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선 아무 차별도 없었다
페스트
─ 에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1351
대니얼 디포 《전염병 연대기》1722
알레산드로 만초니 《약혼자들》1840
알베르 카뮈 《페스트》1947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2022
흑사병을 피해 모인 사람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질병을 꼽으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14세기의 페스트를 꼽는다. 별칭인 흑사병黑死病, the Black Death은 이름 그 자체로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으스스하다. 페스트는 인류 역사에 결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 만큼 유행한 시대별로, 혹은 이 질병을 은유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을 때마다 문학 작품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이면서 가장 이른 작품이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의 《데카메론》이다.
피렌체의 문학가 조반니 보카치오는 14세기 흑사병에서 살아남아 그가 겪은 참상을 기록했다. 그런데 아마 자신의 필력이 모자라다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데카메론》의 머리말에 흑사병, 즉 페스트가 도시에 창궐한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태어나신 지 1348년이 되었을 때, 무서운 흑사병이 이탈리아 제일의 도시 피렌체를 덮쳤습니다. 이 전염병에는 인간의 어떠한 지혜나 예방법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시내에 산더미같이 쌓인 오물을 치우고, 환자를 도시 밖으로 내보내는 등 병이 퍼지는 것을 막을 온갖 방법이 동원됐지요. 신앙심 깊은 이들은 갖가지 기도를 되풀이 외워서 병을 쫓으려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해 초봄, 흑사병이 무서운 전염성을 띠며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낫는 자는 극히 드물었고, 일단 흑사병의 증상인 반점이 나타난 사람은 사흘 이내에 열이나 별다른 발작 없이 그냥 죽어갔습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단테의 《신곡神曲》에 견주어 《인곡人曲》이라고도 불리는 작품이다.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성취 중 하나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데카메론》의 배경은 ‘꽃의 도시’ 피렌체다. 젊은 여성 일곱과 젊은 남성 셋이 도시를 휩쓴 흑사병을 피해 한 성당에 모인다. “상복으로 몸을 감싼 일곱 명의 젊은 부인”이라는 묘사로 보아, 이들이 이미 남편이나 가족의 일부를 페스트로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은 열흘 동안 각자가 매일 들려주는 이야기를 모아 정리한 형식을 띠고 있다중간에 수난일인 금요일과 휴식을 위해 쉰 토요일을 뺀 나머지 기간이니 열이틀 동안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려나. 수록된 이야기는 전부 보카치오가 순수하게 창작해낸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많은 이야기가 당시에 이미 떠돌던 이야기였고, 이것을 잘 버무린 게 보카치오의 솜씨라 할 수 있다.
《데카메론》에는 상황을 설명하는 머리말을 제외하고는 페스트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열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모두 당시의 사회상을 신랄하게 드러낸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과 계층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다름 아닌 성직자다. 당시는 아직 신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인간‘만’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보카치오는 타락한 성직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 대한 비판과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또한 머리말에서 여성들이 읽고 즐거움과 충고를 얻을 것을 권유할 만큼 여성을 《데카메론》의 주 독자층으로 삼고 있다. 이야기 중에 억눌린 욕망을 발산하는 여성을 많이 포함시켜 새로운 시대의 도래 또한 알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중세의 질곡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이야기 속 인물은 신성神性의 세계에 붙잡혀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버리지도 않았고, 종교가 강조하는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앞뒤가 다른 상류층의 위선을 폭로하고, 부패와 타락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을 강조했다.
《데카메론》은 이렇게 아직 중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세계관을 보여주었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된 페스트는 유럽에서 중세를 끝장내고 근대로 접어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스트와 함께 한 중세의 끝
중세인의 삶을 지배한 교회는 무력했을 뿐 아니라 감염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는 데 오히려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 신심이 깊은 사제라고 페스트가 피해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많은 지역에서 사제의 사망률이 더 높았다. 신앙이 질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기존 교회와 사제에 대한 불신이 싹텄고, 이는 마르틴 루터 등의 종교 개혁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데카메론》에서도 그 일단을 볼 수 있듯이 페스트가 휩쓸고 간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현실 인식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처럼,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 역시 널리 퍼졌다. ‘오늘을 잡아라’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은 원래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 처음 쓰였다. 우리에게는 1989년 개봉한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로 유명해졌지만, 14세기 당시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잘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도 당장 죽을지 알 수 없어 내일조차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을 대비하며 충실히 살기보다 순간의 쾌락에 빠졌다. 자신 앞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떨치기 위해 여러 곳에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곤 했다.
반면에 수도원을 중심으로 현세의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은 허망한 것일 뿐이니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보내자는 주장도 있었다. 이전부터 행해지다 뜸해졌던 채찍질 고행자들flagellants의 자해 행진이 다시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벌거벗은 몸을 채찍으로 후려치며 행진했다.
재앙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기로 했다.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어 병이 퍼졌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유대인을 내쫓았다. 심지어 집단 학살 사태까지 벌어졌다. 1348년 스트라스부르에서는 900명 가까운 유대인을 불에 태워 죽였다. 이뿐만 아니라 소수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심해졌다. 외로운 여인을 지목해 마녀로 몰고 화형에 처하는 일도 빈번했다. 마녀 재판은 유럽이 근대에 들어서며 더욱 심해졌고, 유대인에 대한 공격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극단적인 경건함과 과도한 방종, 타인에 대한 공격이 공존했다.
흑사병이 잠잠해진 후에는 농사를 지을 사람이 줄어 역사상 처음으로 삼림이 늘어났다. 삼림 면적이 늘어나면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줄어들고, 이에 따라 기온이 내려가 14세기 중반 이후 중세 ‘소빙하기’가 도래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더불어 대재앙 이후 유럽인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통계도 찾을 수 있다. 이전에는 봉건 제도로 영주가 토지를 소유하고 농노는 세금을 납부하고 부역하는 체제가 공고했다. 하지만 인구가 줄자 부역의 대가로 금전 지불을 하는 관행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봉건 제도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도시의 경우에도 노동자의 수가 줄어 노동자의 임금 수준이 올라갔다. 이에 따라 노동자의 생활 수준도 올라갔다.
흑사병으로 해상 운송의 규모가 커지고 대항해 시대를 앞당겼다는 평가도 나온다. 적은 수의 선원을 큰 선박에 태워 오래 항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해야 했고, 화물은 물론 선원이나 승객에 대한 해상보험도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이 필요한 일이었고, 따라서 자본이 집약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여러 금융 기법도 나타나면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텄다고도 설명한다. 페스트균은 사람들을 새로운 시대의 입구로 끌어왔다. 그것도 아주 처절한 방식으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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