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보이는 건 손
: 염습실에서
시신 염습을 돕겠다고 염습실로 쫓아 들어가는 내 등 뒤로 탄식이 들린다.
“아이고, 젊은 사람이 저길 왜….”
내가 염습실로 가리란 걸 예상하지 못하고 방금께 내 손에 누룽지를 쥐여준 장례식장 식당 조리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남은 누룽지 조각을 문 앞에서 빠르게 씹어 삼킨다. 고인 앞에서 오물거릴 순 없으니. 그랬다간 고인이 노하기 전에 장례지도사에게 한소리 들을 테다. 덜 씹힌 누룽지 조각이 목을 긁듯 넘어간다.
오늘 만나는 고인은 자신이 입고 갈 수의를 손수 지었다고 했다. 염습실 한편에 반듯하게 접힌 수의를 손으로 쓸어보니 가슬가슬하다. 올이 굵은 삼베다. 삼베 수의를 짓는 장인에게 듣기로는 요즘은 표면이 거친 삼베는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이 옷은 오래전에 지어둔 것일 테다. 구순 노인이다. 언제부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왔을까. 수의를 마련해두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무병장수를 빌며 삼베를 기웠겠지만, 까슬거리는 삼베가 손 끝에 닿는 순간엔 오늘 같은 날을 떠올렸을 테다. 자신이 만든 수의를 입고 갈 날을, 수의는 손수 만들 순 있어도 손수 입지는 못하는 옷이다. 누군가 입혀주어야 한다. 그 일이 기다리고 있다.
무섭지 않냐고
사람들은 시신을 보는 일이 무섭지 않냐고 묻곤 했다. 그럴 리가. 염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하는 생각은 이것이다. 춥겠다. 철제 안치대에 고인이 누워 있다. 염습실은 냉장 시설이 있는 안치실과 연결된 공간이라 싸늘하다. 내 앞의 그는 잘 입어봤자 병원 환자복이다. 추워 보인다. 물론 이 또한 산 사람 생각이란 걸 안다. 그는 죽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산 사람이라, 움켜쥔 듯 곱은 그의 손에 온기를 지닌 내 손을 가져가 감싸 쥔다. 차갑다. 고인의 손은 말랑한 동시에 단단하다. 밀랍 인형이 이런 감촉일까. 그렇지만 너무도 사람이다.
내가 처음 입관을 지켜본 이는 여든이 훌쩍 넘은 남자 노인이었다. 그때 나는 장례지도사 실습생 신분염습과 입관 참관이 허락된다이었다. 안치대에 누운 그를 보며 안타까울 정도로 마른 몸이라 생각했는데, 그 뒤로 보게 되는 노인 대부분이 그랬다. 살아내는 데 연료로 써버린 듯 근육과 살이 말라붙어 있었다. 배가 없어 가슴뼈 아래가 가파르게 기울어진 데다가, 팔이건 무릎이건 한군데 이상 굽어 있었다. 나는 사람이 시체로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늙은 몸으로 등장한 데 더 놀랐다. 나이 듦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벗은 몸. 나는 나이 듦도 모른 채 죽음에 대해 알고자 했던 것이다. 고인의 몸에서 욕창 밴드를 떼어내며 죽는 일보다 늙는 일에 대해 먼저 배웠다.
나이 든 몸 앞에 서는 동안 무수한 감정이 몰려들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몸이 초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요하는 이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라도 두 손을 모아 쥐게 하는 종류의 것임은 분명했다. 동정이나 안쓰러움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나중에 내가 책에서 다음 구절을 읽었을 때 염습실에서 포개 쥔 나의 두 손을 떠올린 것을 보아 그건 숙연함, 그 언저리의 감정이었을 테다.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많든 적든 살면서 불행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일단 죽은 사람이 되면 숙연한 친애와 경의의 뜻이 담긴 장송의 예우를 받았다.”
친애와 경의를 담은 숙연함. 수십 년 전 일본 어촌 마을에서 장례 행렬이 지나는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의 죽음을 떠올린다. 떠나는 자에게 예우를 보내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서든 같다. 사람은 모두 죽으니까. 피할 수 없는 일 앞에선 겸손해진다.
고인의 몸에 하얀 한지지의가 감싸이고 누런 삼베가 입혀지는 걸 두 손을 모은 채로 지켜보며, 입관을 처음 본 이의 이름을 기억해두자고 생각했다. 참관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장례식장 로비에 걸린 부고란 전광판을 보았다. 박호준가명. 영정 사진 속의 풍채 좋은 사람이 낯설어 몇 번이나 그가 맞는지 확인했다. 명복을 빕니다. 좋은 곳으로 가시길요. 작게 읊조렸다. 내세가 있다는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된다.
같은 시기에 실습을 나갔던 교육원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꼭 잠든 거 같지 않아요?” 시신이 무섭기보다 자는 것같이 보여 이상하다고 했다. 다들 눈을 감고 다소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언뜻 보면 나쁜 꿈을 꾸나 싶다. 간혹 표정이 한없이 평온한 이도 있었다. 표정은 표정일 뿐인데도, 얼굴이 평온해 보이면 괜스레 안심됐다. 다 산 사람의 위안이다. “좋은 곳으로 가시나 보네요.” 입관을 진행하는 장례지도사가 입 밖으로 말을 내기도 한다. 임종하는 신체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기능하는 게 귀라고 했다. 그 의학적 사실이 사람이 죽은 후에도 들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닐 텐데, 산 사람은 산 사람이라 고인이 듣고 있을 거라 믿어본다.
귀가 열린 고인 앞에서 좋은 말을 얹는 장례지도사가 있고, 그래서 더욱이 입을 열지 않는 장례지도사도 있다. 물론 누워 있는 이를 개의치 않고 제 하고 싶은 말이나 하는 지도사도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안치실 안. 마음 쓰는 만큼 손과 입이 움직일 뿐이다. 그러니 각양각색이다.
떠날 사람이니까
“어머, 고우셔라.”
이날 함께한 장례지도사이안나는 열린 귀로 좋은 말 많이 듣고 가시라고 어화둥둥 하는 이다. 긴 세월 화장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 고인의 딱딱히 굳은 피부를 매만지며 연신 곱다고 한다. 유분이 듬뿍 담긴 로션이 고인의 얼굴에 스며든다.
“어머니가 몇십 년은 젊어져서 아버님이 기다리시다가 못 알아보겠어요.”
버짐 핀 고인의 입가를 스윽 엄지로 닦아내며 그는 저승길 앞장선 배우자까지 소환한다. 옆에서 나는 남편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못 알아보고 지나쳐도 좋을 일이라 생각한다. 둘 사이 일은 둘밖에 모르니. 물론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는다. 아까보다 고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다. 화장품을 바르느라 생긴 마찰로 인해 근육이 이완되었기 때문이겠지만, 또 한번 믿는다. 좋은 곳으로 가시려고 표정이 좋은가보다.
사실 이런 한가로운 감정은 잠시 스친 것일 뿐, 보조부사수 축에도 못 드는 나는 고인에게 이런 귀엣말을 하기 바빴다.
“귀한 옷을 제가 어설프게 입혀드려서 죄송해요.”
아무래도 손이 서툴다. 손수 지은 수의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더 부대낀다. 한 번에 묶고 한 번에 입혀야 구김이 안 가고 예쁜데. 두어 번 손이 간다. 주름이라도 펴보려고 애꿎은 치마저고리를 잡아당긴다. 사수 역할을 하는 이가 이 일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 전부라며 나를 안심시킨다. 기술은 그가 매끈한 솜씨로 부리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이 전부라 한다.
“아휴, 고우시다.”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이 돌보다 정든 어르신에게 하는 말을 연습실에서 듣는다. 고인이 참 예쁘다고, 심지어 ‘내 고인’은 더 예쁘다고 하는 이도 있다. 무슨 납량 특집이나 담력 테스트가 아니다. 마르고 검붉은 몸이 예쁠 리 없다. 두 눈만 감고 있어도 ‘곱게 돌아가셨네’ 소리를 듣는 게 주검이다. 시체가 예쁘다고요? 염습실에 함께 들어가지 않았다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되물었을 말이다. 시신을 향한 애처로움이 애틋함으로 변한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곳에서는.
곧 떠날 사람이니까. 사라질 사람이니까. 잘해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는다. 그래봤자 알코올 솜으로 몸을 닦고, 옷을 번듯하게 입히는 것뿐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타인인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 그러니 열의를 다하게 된다. 냉방된 연습실에서 땀이 주룩 흐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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