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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사람이다
평화는 모호하고 폭력은 분명하다
평화란 무엇일까? 진정한 평화가 현실 속에 가능한 일인가? 평화란 무지개 너머에 존재하는 막연하고 이상적인 개념과도 같다. 평화에 대한 정의도 구체적인 설명도 쉽지 않다. 누군가 당신에게 가장 최근에 목격한 평화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비둘기? 한적함? 도대체 평화가 뭐지?’
반면에, 폭력은 우리 주변에 쉽게 발견되고, 구체적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가족과 이웃에서 발생하는 폭력부터 언론을 통해 목격되는 수많은 폭력의 이야기들이 쉽게 떠오른다. 어쩌면 평화에 대한 갈망이란 폭력에 대한 저항과 비례하는 것일지 모른다. 과거 종교는 평화의 당위와 실천에 대해 주로 관념적인 논의와 개인적 실천에 대해 강조했다. 근대 이후, 특별히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부터 시작된 근대 평화학과 평화운동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그 시작을 폭력에서부터 찾는다. 폭력이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평화를 깨뜨리며 사람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해를 가한다. 특별히 ‘폭력의 부재’로서의 ‘소극적 평화’가 아닌 모든 폭력의 잠재적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를 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평화란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으로 이해되며, 폭력에 대한 이해는 물리적 폭력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평화에 대한 이해는 모호하고 다양하다. 이찬수는 《평화와 평화들》모시는사람들, 2016이란 책에서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평화’대문자 Peace와 개별적이고 실천적인 이해로서의 ‘평화’소문자 peace를 구분한다. 많은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만, 개개인의 평화 이해와 실천 방식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다양하다’는 말은 ‘상이하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이 ‘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평화에 대한 인식의 다름이어도 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 이제는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 버린 이 표현은 진부할 수는 있으나 그 필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름’과 ‘그름’을 구분할 필요성이 여전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다름’을 쉽사리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와 폭력적 갈등으로 이어져 가는 것을 발견한다. 성과 성역할 인식의 간극이 벌어지고, 세대 간의 차이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존재하던 정치적 진보와 보수는 극단적 형태의 표현으로 광장에 난무한다. 성숙한 대화와 토론의 장이어야 할 광장은 어느새 서로를 향해 비난을 쏟아내기 위한 화풀이 장소로 전락했다.
‘나와 조금 다를 뿐, 그들도 존엄한 사람이야.’ 초등학생들은 알지만 어른이 되면 잊어버린다. 사람됨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를 걱정한다. 집값이 떨어지거나 범죄율이 오를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분명한 근거나 상관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막연한 두려움에 기인하여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대상에게 갖는 부정적이고 폭력적 감정을 일컬어 ‘혐오’라고 한다. 장애인, 외국인, 다문화, 탈북민, 성소수자, 난민 등에 이르러 ‘혐오’와 ‘배제’는 오늘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이슈가 되었다.
몇 해 전 화제를 모은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동백이공효진가 첫사랑인 강종렬김지석과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회상 장면이었다. 동백이는 종렬과 결혼을 약속하고 예비 시어머니를 만나게 되지만, 종렬의 엄마는 동백이가 아들의 결혼 상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촉망받는 야구선수인 ‘아들’종렬에게는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소위 ‘현모양처’가 필요한데, 동백이는 부모도 없고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구석이 있어 싫다고 한다.
사실 동백이는 친부모에게 한 번 버려진 후, 양부모에게서도 파양되어 다시 버려진다. 동백이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동백이가 부모가 없고 그래서인지 왠지 어두워 보인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그런 과거를 가진 동백이를 향해 종렬의 엄마가 말한다. “난 네가 싫어. 그냥 네가 병균 덩어리 같아.” 어떤 사람이 상대방을 앞에 두고 ‘병균’ 취급을 할까? 평소에 사람을 향해 ‘병균 덩어리’ 같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드물다. 이 어색한 대사는 작가의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는 〈동백꽃 필 무렵〉의 전체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동백이가 옹산에 내려가 ‘카멜리아’라는 식당을 차렸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외지인, 미혼모, 술집 여자와 같은 사회적 편견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지 않았다. 옹산의 직진남, 황용식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드라마는 동백이가 사회적 편견과 싸우는 과정에서 사랑, 가족애, 마을 주민들과의 화해를 담고 있다.
단절의 역사와 모호한 혐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혐오란 나에게 해를 끼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 기인하여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심리적 활동을 말한다. 혐오에는 단계가 있다. 두려움과 분노가 집단화되고 구체화되면 끔찍한 폭력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폭력적 갈등의 원인도 혐오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나와 다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왜 그렇게 이질적인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일까?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지만, 해결의 실마리 중 하나는 한국 사회가 경험한 ‘분단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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