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천천히 술 한잔을 마시는 일, 침대에서 사랑하는 사람 옆에 누워 있는 일, 기타를 튕기거나 서투르지만 건반을 두드리는 일, 시를 읽거나 시 몇줄을 써보는 일, 아들이나 딸과 수없이 공을 차는 일, 크리켓 경기에서 공을 멈추기 위해 바운더리 주변을 힘껏 달리는 일, 우리 모두는 지독한 순간들을 채우고 싶은 활동의 긴 목록이 있다.
시간은 귀중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뭐가 됐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관해 좋은 기억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 깨닫게 될 것이다.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는 배워야 하는 기술이며, 어느 때는 배우지 않아도 된다. 슬프게도 우리가 사는 현대의 쾌락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시장 추동 사회에서 그러한 기술을 개발하거나 훈련할 시간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시간의 정치를 통해서이다.
세가지 시간 체제가 지난 2천년 넘게 인간의 역사를 규정했다. 계절과 날씨가 인간의 시간 사용 방법을 구체화한 농업적 시간, 시계가 부상하고 삶이 시간의 블록으로 규정되는 산업적 시간, 제조업이나 농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에 기초한 오늘날 경제의 특징이며 시간 사용의 경계가 흐릿해진 제3의 시간.
모든 주류의 정치 의제는 시간에 관한 암묵적인 입장을 취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선언들은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명시적인 시간의 정치는 정당들의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으며, 시간의 자유―내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지휘할 자유―에 마땅한 우선권을 부여하지 못했다.
나는 『시간 불평등』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세계를 덮치기 직전에 쓰기 시작했으며, 이 사실은 이 책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수많은 논평가들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말하지만 이미 진행 중이던 변화들을 가속화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쨌든 팬데믹 초기부터 록다운과 임금 보조금 정책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과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경제적 불안전insecurity을 낳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으며, 이는 다시금 시간의 정치가 명시적인 계급 기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증거를 제공했다.
지불노동과 부불노동 둘 다를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역사 대부분의 시기보다 오늘날 훨씬 더 많이 일하고 있다. 이는 어마어마한 수준에서 스트레스와 질병을 낳는다. 대공황이 한창일 때 집필되었으며, 1백년 후 혹은 2030년이 되면 사람들이 주당 평균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논문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을 다시 논의하면서 일부 논평가들은 현재의 문제를 케인스의 말을 인용해 “하나의 경제 시기와 다른 경제 시기 사이 재조정의 고통”이라고 보았다. 저널리스트 수잰 무어는 통찰력 있는 기사에서 문화와 예술이 그러한 재조정을 인도해야 하지만 오늘날 문화와 예술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암시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는 최근의 지대 추구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 시대와 긴축이라는 못된 짓 속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공유지’의 침식을 반영한다.
케인스가 예언을 한 지 거의 한세기가 지난 지금 이를 달성한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우리가 성취할 것 같지도 않다. 추측건대 케인스 자신도 일을 주당 15시간으로 줄이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일을 무척 좋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의 정치와의 관계 속에서 시간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시간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철학자인 제럴드 휘트로1912~2000조차 시간을 규정하는 게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Time?, 1972의 제1장에서 그는 어느 중세 사제의 곤경을 상기했는데, 그 사제는 아무도 ‘시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지 않을 땐 자신이 그 답을 안다고 생각했으나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때는 자신이 이를 모른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고 말했다.
시간이라는 관념은 인간이 자신의 필멸과 재생산의 순환을 깨우치면서 명확해졌을 것이다. 시간의 절기와 경과와 시간 흐름의 분위기를 제대로 알아보고 소중히 여기게 되면서 인생의 이별 방법을 인식한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좋으실 대로』에 나오는 연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인생의 7기에 관해 배우며, 어느 나이 때든 이 주제에 관해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이런 감상을 강하게 느낀다. 이것은 감상벽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시간, 즉 우리 인생을 무엇이 지나가는지 고려하지 않으면서 써버린다.
2021년에 나온 『4000주』라는 짧고 분명한 제목을 단 책에 따르면 여든까지 산 사람은 겨우 4천주의 인생이 있다. 이 숫자는 매주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러한 주들의 대부분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활동이 차지한다면, 화를 낼 것까지는 없더라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 정책이 사회의 일부 집단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통제하에 둔다면, 화를 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시간이라는 주제와 씨름해왔는데, 주로 ‘일’이라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포획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시간 사용 조사에 관한 전문가 학회에 참여해달라는 초청을 받아 뉴욕에 갔던 일이 기억난다. 젊은 경제학자였던 나는 의심할 바 없이 듣고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전세계인이 수많은 활동에 쓰는 시간에 관한 상세한 통계표가 거듭 나오는 것을 보곤 나는 “이 조사를 하면서 정부情婦가 있는 사람을 찾아보지는 않았나요?”라고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 그들 가운데 그런 조사를 한 사람은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전문가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점은 심각한 것이다. 시간 사용에 관한 질문에 답할 때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믿기에 규준인 것 혹은 알맞고 책임감 있게 시간을 쓴다고 간주할 만한 것을 말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는지에 관한 통계의 과잉은 그저 모두 발언쯤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일기를 꼬박꼬박 쓴들, 십중팔구 나중에 기억할 만한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1922년에 위대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과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1859~1941 사이에서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심리적 시간’과 ‘물리학자의 시간’을 구별했다. 30년 후 그는 어떤 글에서 이 주제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간 개념의 심리적 기원은 어떠한가? 이 개념은 의심할 바 없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감각 경험과 이 경험의 기억 사이의 구별과 관련이 있다. (…) 경험은 ‘기억’과 관련이 있으며, ‘현재의 경험’과 비교할 때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 시간의 주관적 개념을 낳는다. 즉 개인의 경험의 배열을 지시하는 시간 개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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