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재난이란 무엇인가?
재난의 뜻과 특성
표준적인 국어사전에 따르면, 재난災難은 뜻밖에 일어난 재앙災殃과 고난을 의미한다. 여기서 재앙은 뜻하지 아니하게 생긴 불행한 변고나 천재지변으로 생긴 불행한 사고를 말하고, 고난은 괴로움과 어려움을 아울러 이른다. 종합해 보면, 재난은 갑자기 생긴 사고나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가리킨다. 재난과 비슷한 말로는 날벼락, 대환大患, 사변事變 등이 있다. 법률 용어 사전에서 재난은 국민의 생명·신체·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으로,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나뉜다. 재난을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나누는 것은 한국의 재난 관련 법체계에서 따르고 있는 분류 방식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재난의 용법도 이와 같다.
영어에서 재난에 해당하는 단어는 disaster다. 이 단어는 16세기 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어원은 이탈리아어 disastro, 불어 désastre다. disastro는 ‘나쁜’이라는 뜻의 dis와 ‘별’이라는 뜻의 astro가 합쳐진 단어로, 글자 그대로는 ‘나쁜 별’을 의미한다. 여기서 별은 별점을 칠 때 상정하듯이 ‘운명’이라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disaster의 어원적 의미는 (갑작스럽게 닥친) 나쁜 운명이다. 재난에 사용하는 한자어 災재앙 재는 물이 범람하는 모습과 火불 화를 한 단어에 가지고 있다. 수재나 화마처럼 갑작스럽게 닥친 불운을 한 글자에 담고 있는 것이다.
재난을 오랫동안 연구한 미국의 재난학자 엔리코 쿼런텔리Enrico Quarantelli는 재난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정리한다. 첫째, 재난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발생한다. 둘째, 재난은 사회나 공동체 같은 집단적 단위의 일상을 심각하게 교란한다. 셋째, 재난은 혼란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개인이나 집단에 계획되지 않은 행동 방침을 채택하게 한다. 넷째, 재난은 사회적 시공간에 할당되었던 삶의 역사를 예기치 않게 바꾼다. 다섯째, 재난은 소중한 사회적 존재를 위험에 노출한다Quarantelli, 2000, P. 682. 여기서 보듯이 재난은 사회의 물적 기반은 물론 사회 구성원과 공동체의 삶을 할퀴고 지나간다. 재난 속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되는 사람이 생기면 가족과 친지의 삶이 크게 흔들린다.
이런 의미에서 재난은 비상 위기 상황보다 더 큰 피해를 가져오며, 더 많은 이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재난과 비슷한 말로 재앙catastrophe이 있는데, 사회의 기반 시설에 심각한 손실을 입히는 사건을 의미한다. 예컨대, 지진으로 도시 절반이 붕괴되는 상황을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참사慘事’라는 표현은 재난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재난보다 사건의 끔찍하고 비참한 상황을 더 강조하는 말이다. 재난과 참사 중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의미를 갖기도 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다.
재난을 보는 관점들
재난학자 로널드 페리Ronald W. Perry에 따르면 재난에 관한 정의만 해도 30개가 넘는다Perry 2007. 이를 재난에 대한 접근 방법에 따라 몇 가지 큰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페리는 재난에 대한 이해를 관점에 따라 1) 고전적 전통, 2) 재해hazard 전통, 3) 사회과학적 전통으로 나눈다.
고전적 전통에서 재난은 사회나 그 하위 부문 중 하나가 물리적 피해와 사회적 혼란을 겪는 사건이다. 이런 사건은 특정 시간과 공간에 집중되어 있다. 100년 동안 이어지는 재난은 없으며, 지구 전체의 절반을 휩쓸고 지나가는 재난도 없다. 따라서 이 고전적 전통은 재난을 겪은 사회나 그 하위 부문의 전체 또는 일부 필수 기능이 손상된 것에 집중한다.
두 번째, 재해 전통하에서 재난은 예상보다 빈도와 규모가 크고 심각한 피해와 함께 인간에게 큰 어려움을 초래하는 식으로 환경이 격변하는 과정을 뜻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급격한 자연환경의 변화에 주목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늦게 등장한 사회과학적 전통은 앞의 두 전통과 대비된다. 사회과학적 전통에서는 재난을 사회적 사건으로 보는데, 여기서 재난은 외부나 내부의 취약성vulnerability으로 말미암아 그 구성원을 보호하지 못한 사회문화 시스템의 실패를 포함한다. 여기서 말하는 취약성이란 자연적인 취약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취약성이다. 따라서 재난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같은 자연재해가 덮쳐도 사회가 얼마나 취약하느냐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과학적 전통의 요체는 재난을 재해의 결과로만 파악하지 않고, 자연적 원인과 사회적 원인의 결합이 재난을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규범과 가치는 구성원의 보호와 재난에 대한 방호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더욱 중요해진다.
이러한 세 전통 중 어느 것을 따르더라도 재난은 결국 인간 사회와 관련 있다. 무인도에 홍수가 나서 토양이 전부 쓸려 내려가도, 심지어 무인도가 하루아침에 소멸해도 자연적으로는 아주 큰 이변일 뿐 일반적으로 재난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재난을 이해하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인간 중심적인 관점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재난 충격 모델
사회과학적 전통의 관점에서 보면, 재난의 피해는 재난이 일어나기 전의 여러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재난 상황에 대한 그때그때의 미봉책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재난에 대비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 종합적으로 포함한 재난 모델을 도식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1]의 ‘재난 충격 모델disaster impact model’이다Lindell and Prater 2003; Lindell 2013.
이 그림의 왼쪽 조건들이 재난이 일어나기 전의 사회 조건을 나타내는데, 여기에는 사회의 재난 노출 수준hazard exposure, 물리적 취약성physical vulnerability, 사회적 취약성social vulnerability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재난 노출 수준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특정한 재난에 얼마나 영향을 받느냐는 우연적인 조건이다. 물리적 취약성은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농업적 취약성, 건물 등의 구조적 취약성이다. 인적 취약성은 사람들을 사망이나 부상에 이르게 하는 온도, 화학약품 등에 사람들이 얼마나 취약한지의 정도를 나타낸다. 사회적 취약성은 심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재원이 얼마나 부족한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한 재해 사건hazard event이 발생했다고 하자. 재해 사건은 그 사건이 얼마나 신속하게 일어났는지, 눈에 띄는 전조는 없었는지, 충격의 강도, 충격의 범위, 충격의 지속, 발생 확률 등에 따라 그 여파가 결정된다. 강력한 화산 폭발도 전조가 있어 사람들이 대피했다면 충격이 약해진다.
사람들이 일단 이 충격에 대응해 여러 가지 즉각적인 재난 대응improvised disaster response 행동을 한다. 흔히 재난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약탈을 일삼는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나 재산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더 많이 한다.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대피하지 않거나, 재난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고 믿고 도피하지 않아 재난의 피해를 키우는 것도 이런 즉각적인 재난 대응의 한 가지 방식이다. 예를 들면, 화재가 발생해 경보가 울렸는데, 이전에 가짜 경보가 너무 자주 울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대피하지 않아 피해가 커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재해 사건의 특성과 즉각적인 재난 대응이 합쳐져 충격의 정도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런 충격은 여러 방식으로 완화될 수 있다. 우선 재난 발생 이전에 개인적·사회적 차원에서 위해를 경감하는 여러 조치를 취할 수 있다hazard mitigation. 홍수에 취약한 땅에는 집이나 논밭을 마련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난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재난이 발생한 다음에는 공동체 차원의 비상 상황 대응이나 가정에서의 대응이 결합해emergence preparedness 재난의 충격 정도를 줄일 수 있다. 재난에 자주 노출된 공동체나 가정은 경각심을 가지고 철저히 준비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재난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준비에 소홀할 수도 있다. 재난 훈련이나 재난 상황의 파악 같은 준비를 공동체 차원에서 잘 진행하는 것이 재난을 줄이는 방법이 된다.
정리해 보면, 재난을 유발하는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사건의 특성에 즉흥적인 대응이 합쳐져 재난의 강도를 결정하고, 여기에 위해 경감 조치와 비상 상황에 대한 준비가 이 강도를 줄인다. 그 결과가 재난의 물리적 충격physical impact이다. 물리적 충격에는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포함된다. 사회나 개인이 어떻게 즉시 대응하고, 또 사전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느냐에 따라 물리적 충격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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