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헌법의 감각
1940년 1월 18일, 쿠르트 괴델은 아내 아델레와 함께 빈을 떠났다. 오스트리아는 이미 2년 전에 독일에 합병되었고, 다음 해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알리는 포성을 울렸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헌법 위에 군림하는 수권법을 1933년에 만들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전에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아인슈타인보다 한참 늦었지만, 괴델은 헌법보다 더 강력한 법령의 압박을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빠져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망명의 길은 멀고 험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를 거쳐 지금의 벨라루스 한쪽 귀퉁이에 속하는 비고소보로 갔다. 아인슈타인은 1932년 12월 베를린에서 곧장 브레머하펜으로 가서 미국행 증기선을 탔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영국이 해상을 봉쇄하는 바람에 괴델은 대서양을 건널 수가 없었다. 시베리아를 횡단한 다음,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여객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4월 3일이었다.
괴델은 일찌감치 1931년에 중요한 업적 하나를 이루어 놓았다. 기호와 수식을 배제한 문장으로만 표현하면 그 결론은 이렇다. “고전 수학에서 하나의 체계는 그 체계의 무모순성을 동일한 체계 내에서는 중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의 기원에 이르는 것”이다. 단어 하나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사전을 찾으면, 설명의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마다 다시 사전 찾기를 거듭해야 한다. 설명의 설명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하이퍼링크를 달아 펼치면 복잡한 프랙털 구조의 가지가 끝없이 반복되는 거대한 앎의 나무가 될 것이다. 모든 지식은 인류의 기원 아니면 빅뱅 언저리에서 맴돌고, 결국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허망한 결론에 도달한다. 나폴리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데 실패하고 수사학 강사가 된 지암바티스타 비코는 그래서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세계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정확히 알 수 있는 대상은 직접 만든 것, “원인에 의한 지식”뿐이라고 단정했다. 대표적으로 든 것이 수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델은 수학의 체계마저 완벽하게 논리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괴델은 “수학 논리학을 지배한 인간” 또는 “경쟁을 초월한 인간”으로 불렸다.
괴델은 1948년 1월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한 면접을 하게 되었다. 구술시험에 대비해 미국 헌법을 펼쳤다. 꼼꼼히 읽고 난 괴델은 오스카 모겐스턴에게 말했다. “미국 헌법에서 논리적 결점을 발견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미국이 독재 국가로 바뀔 수도 있겠군요.” 깜짝 놀란 모겐스턴은 법원에 가서 그런 얘기를 입 밖에 내서는 절대 안 된다며 신신당부했다. 존 노이만과 함께 게임이론을 발표하여 세계적 경제학자 반열에 이름을 올린 모겐스턴은 아인슈타인과 둘이서 괴델의 증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 다음 날 괴델은 두 증인을 대동하고 뉴저지 주도 트렌턴의 연방법원으로 갔다. 담당 판사는 아인슈타인이 귀화할 때 면접심사를 했던 필립 포먼이었다. 포먼은 프린스턴의 두 거물 증인에 대한 예우로 괴델과 함께 판사실로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포먼은 심문을 시작하면서 인사치레로 말을 끄집어냈다. “떠나오신 조국 독일에서는 지금 사악한 독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괴델은 말을 끊고 정정했다. “저의 조국은 독일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입니다.” 약간 멋쩍은 웃음을 띠며 포먼은 말했다. “어쨌든 그런 정치적 상황은 여기 미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괴델은 정색하고 응수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잘 압니다. 미국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두 증인은 물론 판사까지 나서서 황급히 괴델의 입을 틀어막았다.
수학자 겸 논리학자와 물리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법률가 네 사람이 연출한 상황극 같은 역사의 일화는 몇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동일한 규범을 해석하더라도 어떠한 논리적 방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정치적 사건이든 사소한 재산권 분쟁이든 현실의 법정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발견한다. 나치를 피하며 미국이라는 신세계를 찾은 유대인들은 새 국적의 신분으로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변환시키는 의식에 대한 승인의 요건으로 그 국가의 헌법과 마주했다. 헌법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보장하는 장전이기 이전에, 그 국가의 고유한 정치적 특성을 드러내는 문서다. 헌법을 읽는 것이 그 나라를 이해하는 하나의 지름길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괴델과 그의 증인들이 독일의 헌법이나 헌법적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헌법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굳이 헌법에 관련시켜 말하자면, 그들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헌법이 파괴된 상황을 피해서 독일을 탈출해 나왔다. 헌법이 파괴되거나 정지됐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국가의 시민은 헌법을 정상적으로 운용하기만 한다면 생활의 안정성은 확보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자기만의 영역에서는 변화무쌍한 모험을 즐기며 끝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정치공동체는 안정적이기를 원한다. 안정이 감싸고 있어야 그 안에서 불안정한 탐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도 안정적인 생활을 선호한다. 안정성은 예측가능성에서 확보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정도의 행위는 허용되며 나의 자유와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예측가능성이다. 근대 국가의 믿음이다.
근대 국가의 징표의 하나가 헌법이다. 그때 헌법은 근대 헌법이다. 근대 국가는 근대의 산물 중 하나다. 사람들이 ‘근대’라고 말하는 순간, 근대 이전과 이후가 구분된다.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세계와 안정적 세계로 나뉘어 느껴지기도 한다. 근대는 원래 특정 시기를 지칭하기보다 일정한 시점을 가리키는 어휘였다. 단순하게는 ‘현재’와 마찬가지였다. 현재는 ‘새로운 것’의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는 과거를 뒤엎듯 넘겨버린 뒤 나타나는 현상이다. 새로운 것은 ‘일시적’이다. 매일 새로울 수는 없더라도, 언제나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현재가 타당한 것이라면, 현재가 갈아치워 버린 과거는 전근대 또는 고대가 된다. 근대는 항상 존재하고, 언제나 전근대로 변모한다. 그런데 물 흐르듯 하는 변화가 아닌 급격한 변화가 있다.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인간은 혁명적 변화를 원할 때가 적지 않다. 근대성을 연속성 위에서 파악하지 않고 극적인 계기를 제공하는 단절된 특이점으로 여기는 경향이 생겼다. 토머스 쿤이 과학 혁명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사람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던 “패러다임”이란 단어를 유행어로 만들어버렸는데, 패러다임 역시 그러한 예의 하나다. “전례 없이 특별하며, 새로운 연구자들이 해결할 수많은 과제를 던져주는” 한 시대를 지배하고 풍미하는 사상이나 이론의 개념으로 정의하는 패러다임에 대해서 풍미하는 사상이나 이론의 개념으로 정의하는 패러다임에 대해서 누구나 관심을 가진다. 인간은 그렇게 전에 보지 못했던 특별한 것을 바란다. 그것이 안정적 삶에 어떠한 기여를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근대성도 인류 역사에서 어느 특별한 시기의 출발점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역사의 무대는 특별해졌다고 정리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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