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1863년 11월 19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게티즈버그에서 이처럼 매우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심오한 문장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했다. 그때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한창이었다.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은 남부의 노예 제도를 어떻게 평등의 이상과 양립시킬 것인가 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딜레마에서 비롯되었다. 노예 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연합은 그것이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북부의 폐지론자들은 도덕적인 이유로 노예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링컨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은 그 출발점이었던 남북전쟁의 망령만큼이나 지금도 미국 민주주의에 깃들어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지금보다 나약한 상태에 빠진 적은 없을 것이다. 약 20년 전부터 미국 유권자들은 매번 선거 결과에 의혹을 제기한다. 2000년에는 대법원까지 가는 지난한 재검표 소송 끝에 조지 W. 부시가 앨 고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로부터 8년 뒤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자마자, 그의 경쟁자들은 출생증명서까지 거론하며 그가 미국인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2016년에는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보다 300만 표나 적게 받고도 대통령에 당선되어 민주당 진영은 씁쓸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어떻게 표를 적게 받고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일까?
미국의 복잡한 선거 방식은 제도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대법원에서 의회, 그리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제도라는 것이 정통성을 점점 더 상실하고 있다. 250년 전 건국의 아버지들이 우려했던 미국의 분열 가능성이 오늘날 캘리포니아주나 텍사스주 등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갈등과 분열, 의견 대립으로 붕괴하고 있으며, 급기야 2021년 1월 6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민주적 정권 이양을 거부하며 의사당에 난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나올 법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1776년 독립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책은 미국, 그리고 미국을 넘어 나머지 세계에도 매우 중요할 이 질문에 답한다. 이 책은 오랫동안 모범으로 여겨온 미국 민주주의 실험이 어떤 허점을 가졌는지 긴 역사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안정적인 제도, 강력한 중산층, 역동적인 경제에 자부심을 느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모범이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한계, 모순, 부당함, 폭력을 강조했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서는 독자가 양측의 의견을 골고루 들어보고 나름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단선적이지 않다. 특히 1787년 5~9월 건국의 아버지들을 포함하여 미국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제헌의회에 모인 대의원들이 고안했던 완벽한 민주주의는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초기의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무능한 지도자들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민주주의를 상상하지도 말라. 다시 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리처드 닉슨의 사임이나 도널드 트럼프의 돌출 행동 때문에 궤도 이탈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불신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사실 그들은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공화정 모델을 선호했다. 미국 헌법과 이후 추가된 27개의 수정헌법은 거의 바뀐 것이 없다. 헌법에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인간이 천사라면 국가가 필요 없을 것이다.” 강력한 국가를 원했던 헌법 제정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이렇게 말했다. 원주민, 여성, 노예는 애초에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라고 말한 토머스 제퍼슨이 너무 성급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사회계약에서 애초에 배제된 사람들이 어떻게 요구사항을 관철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노예 제도 폐지와 민권 운동 등 중요한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행복 추구권’이 보장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의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에서 뉴페미니즘 운동까지 약속되었던 행복은 아직 멀리 있는 듯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동일한 헌법을 가지고 있다. 헌법을 애지중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나라가 독재 체제로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줄 견제와 균형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다. 헌법 제정자들은 특히 주와 연방국의 권한을 엄격히 구분했다. 연방주의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위배하더라도 말이다. 주마다 상원의원 2명이 선출되는데, 이때 주에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와이오밍주주민 58만 4000명 유권자 1명의 투표는 캘리포니아주주민 3900만 명 유권자 1명의 투표보다 66배나 가치가 높다. 삼권분립의 원칙도 최근 미국 대법원의 정치화를 보면 심각하게 침해될 우려가 있다.
미국의 병든 민주주의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만한 사안이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구심과 두려움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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