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기후변화는 우리의 안팎으로 존재한다
데자라예 바갈라요스와 처음 대화를 나눌 때였다. 데자라예는 자신이 투명한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사람들 눈이 아니라 본인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두 발이 땅에 제대로 붙어 있지 않는 느낌이랄까.” 경계에 갇힌 기분이었다. 여섯 살 딸아이를 기르며 살아가는 엄마라기보다는 허공을 부유하고 명멸하는 유령 같았다.
데자라예는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가 삶이 양면적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쪽에는 생애 단계가 작은 레고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는 삶이 존재했다. 대학 학위를 땄고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으며 집을 구입해 보수했고 딸 엘레노어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줬다. 데자라예는 자녀 교육에 특히 열중했다. 매일 밤 공부도 같이 했다. 엄마가 학사 공부를 하면 1학년 딸아이는 옆에서 학교 숙제를 하는 식이었다. 데자라예는 캘리포니아주의 샌와킨 협곡에 발생한 토양 및 수자원 문제를 오랜 연구해왔다. 샌와킨 협곡은 벙어리장갑 모양으로 생긴 광활한 농지로 어찌나 싱그럽고 비옥한지 한때는 세계의 곡창지대라 불리기도 했다. 미국에 살면서 포도나 아몬드를 먹어본 적이 있다면 샌와킨산일 가능성이 높다. 이 농지에 물을 대던 수원은 새크라멘토-샌와킨강 삼각주였다.
이곳에서는 지류가 끊임없이 갈라져 나와 복숭아나무가 뿌리를 사방팔방 뻗치듯 캘리포니아주 전역을 1,126km에 걸쳐 뒤덮는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 내륙까지 영역을 넓힌 새크라멘토-샌와킨강 삼각주는 남쪽 끝에 설치된 수많은 관개 펌프의 도움으로 샌와킨 지역 농작물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거대한 수로 체계가 수조 리터에 달하는 물을 공급하고 있음에도 수조 원에 달하는 빙 체리, 화이트로즈 감자, 툴레어 호두가 뿌리내린 샌와킨 협곡의 갈증을 충분히 달래기란 어렵다. 가뭄마저 닥치면 땅이 입을 쩍쩍 벌릴 정도이다. 결국 부족한 지표수를 보충하기 위해 샌와킨 농부들을 대수층에 닿을 때까지 무려 1km에 달하는 깊이로 구멍을 뚫었다.
악순환에도 시작점이 있다면 샌와킨 협곡의 악순환은 바로 여기, 지하수 고갈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농부들이 어떻게든 농작물의 먹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수층의 물을 한 판씩 끌어 쓸 때마다 지표 아래 깔려 있던 축축한 점토와 실트모래와 찰흙 중간 굵기의 흙-옮긴이는 수압이 낮아진 모래와 자갈 사이로 스며들었다. 실트층이 스펀지처럼 쪼그라들자 그 위에 얹혀 있던 비대한 지대 역시 내려앉기 시작했다. 샌와킨 협곡이 소리 없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셈이다.
이 악순환을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다. 우선 기록적인 가뭄이 닥치면서 지표수 공급이 끊긴다. 수로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수원을 더 깊숙이 파헤쳐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지하수를 과하게 끌어다 쓰면서 지반이 가라앉는다. 지반이 꺼지면서 지구 입장에서는 코웃음이 나올 만큼 연약한 인공 기반시설 역시 손상을 입는다. 물론 삼각주에서 지표수를 운반하는 역할을 하는 운하 역시 그러한 손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연쇄 과정이 반복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오래도록 농지를 쥐어짠 탓에 비소 화합물이 지하수면까지 밀려 들어간다. 설상가상으로 기후변화마저 알게 모르게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결과적으로 남부 캘리포니아주의 건기는 점점 더 건조해진다. 실제로 현재 샌와킨 협곡 일부 지역은 매년 61cm씩 주저앉는 중이다. 1920년대 이후 914cm나 가라앉은 지대도 있다. 인간이 드릴을 깊숙이 밀어 넣는 만큼 땅도 함께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다.
이 가라앉는 땅이 데자라예의 또 다른 삶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데자라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딸한테는 미래가 없어요. 지구 위 삶은 시한부나 다름없죠.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끔찍할 거예요. 그런데도 재앙을 멈추려는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죠.” 이것이 기후변화가 불러일으킨 혼돈이다. 데자라예는 생수 시장마저 등장한 현실을 바라보며 머지않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물이 사유화될 것이라고, 물 소유주를 보호하는 개인 민병대가 나타날 것이라고, 자신의 고향 스톡턴에서도 자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갇힌 존재가 유령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데자라예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구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저도 같이 느끼는 것 같아요.”
당신 인생은 다림줄건물을 지을 때 수평이나 수직을 가늠하기 위해 사용하는 추가 달린 줄-옮긴이과 같다.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특정한 방향을 향해 뻗어나간다. 예컨대, 아침에는 결국 침대에서 나온다. 이를 닦거나 닦지 않기로 결정한다. 때로는 커피와 바나나를 가져다 놓고 책을 활짝 펼친다. 마음이 내키면 다음 단락까지 읽기도 한다.
그런데 이 방향성이 오로지 당신 의지에만 달려 있는 건 아니다. 어젯밤은 굉장히 더웠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종일 비틀거린다. 당신의 기분이 당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이다. 바나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바나나가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만 같다. 커피 두 잔을 들이켜고 나서야 통제력을 되찾는다. 홀짝, 홀짝. 휴, 이제야 당신 자신이 된 듯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세계가 당신을 움직인 것이다. 세계가 당신을 살짝 끌어당기자 당신 인생의 경로도 아주 살짝 틀어진다. 거의 티도 안 난다. 삶이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인 수준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가 말하는 건 나비효과와는 전혀 다르다. 재채기가 저 멀리 파도를 일으킨다는 어마어마한 도미노 효과와 같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지극히 작은 변화가 또 다른 작은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젯밤이 유난히 더워서 오늘 당신이 카페인을 조금 더 찾게 되는 식이다. 물론 커피에 손을 뻗는 건 여전히 당신이지 세계가 아니다. 세계가 당신 삶의 경로를 어그러뜨리더라도 결국 당신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시 말해 변화가 닥치더라도 당신의 삶에는 여전히 방향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생이라는 다림줄 끝에 달린 추는 지구를 가리키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게 되는가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마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자연, 우리의 기억과 정신을 비틀고 뒤트는 자연,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눈금을 살짝 건드리는 자연에 관한 책이다. 때때로 자연의 간섭은 온화한 편이다. 예컨대, 당신이 엄마와 통화를 하다 전화를 갑자기 끊어버리는 이유는 이미 했던 대화를 또 반복하는 게 싫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기온이 섭씨 35도여서 참을성이 바닥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날은 공기 질이 너무 나빠서곳곳에 산불이 나는데 뭘 바라겠나? 머리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 보니 연인의 생일이 5월 1일인지 2일인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이건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건데. 생일이 진짜 근로자의 날이랑 같은 날이었나? 그럼 애초에 헷갈렸을 리가 없는데.
전화를 갑자기 끊거나 생일을 잊는 게 별일은 아니다. 너무 더워서 잠이 오지 않는 날이라도 그 정도 실수는 바로잡을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때로 자연의 간섭은 팔꿈치로 쿡쿡 찌르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아예 양손으로 떠밀어서 삶의 경로를 영영 뒤바꾼다. 예컨대, 허리케인과 산불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트라우마라는 악마가 당신 정신에 똬리를 틀고는 당신이 어떻게든 대가를 치를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자연 경관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마음속 깊이 극심한 우울감이 깔리고 수온이 올라가면서 뇌수막염의 발병률이 높아진다. 뇌를 갉아먹는 아메바, 곤두박질치는 시험 점수, 만성 스트레스로 인한 뇌 위축도 있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요점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변화가 세상 밖이 아닌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이다.
일단은 커피부터 들이켜자. 아직 잠이 덜 깬 거 같으니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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