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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돈, 모두 부족한 이중빈곤자
: 불안정노동자들이 가질 수 없는 두 가지
독일의 유명한 동화 『모모』에서 ‘시간’은 꼭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 부드러운 모래알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푸지 씨네 이발소로 어느 날 싸늘한 한기를 몰고 온 회색 신사는 돈 많은 인생을 꿈꾼다면 바로 그 시간을 아껴야 하고 ‘시간은 돈’이라며 그를 다그친다. 사실 그동안 푸지 씨는 귀가 어두운 어머니 곁에서 매일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일이 끝나면 지역 합창단에 나가 노래도 부르고 책을 읽기도 했다. 또 매일 30분씩은 사랑하는 다리아 양에게 꽃을 들고 찾아가 그녀를 기쁘게 해주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시간은 돈’이라 외치던 회색 신사가 잿빛 차를 타고 떠나자 깨달음을 얻은 푸지 씨는 이제부터 빈틈없이 일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 일할수록 모두 도둑맞아 손톱만큼의 시간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모』 속 마을 사람들은 곧 모두가 돈을 좇아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진다. 일하느라 지워지는 삶의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모순을 깨우치게 한 『모모』는, 삶에서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질문을 던지는 소중한 동화이다. 하지만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시간에 쫓기는 것만 같아도 불안정노동자의 시간빈곤은 늦은 밤 불 켜진 도심 빌딩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의 일상과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
시간은 평등하지 않다
불안정한precarious 프롤레타리아라는 의미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개념은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한 조건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주로 가리킨다. 이들은 선택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노동을 해야만 하는 집단으로, 불안정한 고용조건이나 낮은 임금 탓에 임금노동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또한 생활을 유지하고 노동을 재생산하기 위한 무급의 일들을 수행하는 데도 긴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전자는 생산노동work-for-labour, 후자는 재생노동work-for-reproduc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프레카리아트는 그들의 불안정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여가시간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한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다음 일자리를 찾기 위한 활동이나 취업 준비, 직업훈련, 교육 활동 등에도 긴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장기간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 즉 ‘취준생’들도 프레카리아트의 일부다. 이들은 직접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하느라 바쁜 것은 아니지만, 취업 준비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여 결국에는 시간적 여유를 크게 제한받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24시간이 주어지는 것 같지만, 시간의 양이 사회적 계급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이론도 있다. 1899년에 출간된 『유한계급론』에서 베블런은 사회계급 간의 불평등을 여가시간을 기준으로 분석했다. 그는 삶에서 중요한 자원 중 하나인 시간이 사회계급에 따라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베블런은 산업화가 신속히 진행되고 자본주의 사회가 성장하면서 드러난 상류계급의 시간 활용 방식에 주목하여, 이들의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를 개념화했다.
‘과시적 여가’는 돈을 벌기 위한 일과는 무관하게 시간을 활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여러 주 동안 해외여행을 가거나 고급 취미에 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과시적 소비’를 통해 ‘유한계급’은 자신들과 다른 사회적 집단을 구별하고, 지위나 명성을 부각한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여행지나 레스토랑에서 보낸 멋진 순간들을 공유하곤 하는데, 이렇게 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보여주는 것 또한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의 예다.
그런데 과시적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부족하여 시간빈곤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시간빈곤은 하루 24시간 중에서 ①돈을 벌기 위한 일 ②가사노동이나 보살핌 같은 무급 재생산노동 ③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활동수면, 식사, 세면 등, 이 세 가지를 제외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생활비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동시간, 즉 필수 유급 노동시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특히 시간의 양은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시간빈곤은 단순히 시간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삶에서 원하는 바를 선택할 여지가 실질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을 말한다. 예를 들어 통근시간, 근무시간, 그리고 가사노동 시간까지 더해지면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자신을 위해 쓸 시간이 거의 남지 않는 것이다.
반면 휴식이나 여가 활동에 쓸 수 있는 남는 시간, 즉 ‘재량시간’이라는 개념이 있다. 재량시간은 시간의 양 자체보다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즉 선택의 자유와 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필수적인 활동에 사용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으로, 자신이 온전히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쓸 수 있는 자율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이중빈곤=소득빈곤×시간빈곤
소득빈곤과 시간빈곤을 이해했다면 이제 이중빈곤을 생각해보자. 이중빈곤은 시간을 돈만큼 중요한 자원으로 본다는 관점으로 빈곤을 다룬다.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보통 소득빈곤과 시간빈곤이 반비례한다고 설명한다. 즉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은 시간 빈곤을 증가시키지만, 동시에 임금이 공정하게 보장된다면 벌어들이는 소득이 늘어나므로 소득빈곤은 줄어든다. 그러나 장시간 일하면서도 충분한 소득을 얻지 못해 시간빈곤과 소득빈곤을 동시에 겪는 사람들, 즉 이중빈곤 노동자들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해야 하며,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더 오래 일해야 한다. 그러나 일 외에도 생활 유지에 필수적인 가사노동이나 돌봄에 쓸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수면, 식사, 세면 등 개인유지 활동 시간도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중빈곤자들은, 소득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자유시간을 줄이고 노동시간을 늘려도 소득이 여전히 부족하다. 게다가 경제적 부담 때문에 가사노동이나 돌봄을 외주화할 수 없기에 여기에 직접 할애하는 시간도 상당하다. 자유시간뿐 아니라 개인유지 활동 시간이나 돌봄과 같은 재생산노동 시간까지 줄여보며 노동시간을 늘려도 소득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불안정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만나면, 그들이 수면시간이나 식사 시간을 제한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 데만 쏟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들에게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이나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들을 단순히 ‘저임금노동자’라는 개념으로 포괄하고 ‘근로 빈곤층’으로 분류한다면, 이들의 현실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시간과 소득 측면에서 모두 빈곤한 상태, 즉 이중빈곤에 놓인 노동자들에 대한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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