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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이전의 강남
‘강남’이란 지명이 생소했던 시절
따지고 보면 강남은 암사동 선사시대 유적이나 둔촌동 유적이 증명하듯이 오히려 강북보다도 먼저 사람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던 곳이다. 삼국시대 초중기에 백제는 한강 이남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를 수도로 삼았고, 당시 이곳은 한반도 남부의 명실상부한 중심이었다. 하지만 475년 고구려에 의해 위례성이 함락된 이후에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은 뒤에는 지금의 강남 일대에 봉은사, 양재역, 송파나루, 왕실의 뽕나무 밭인 잠실처럼 상당히 비중 있는 시설과 함께 선정릉과 헌인릉, 효령대군과 영의정 상진의 묘, 한명회의 호화 별장인 압구정 등이 들어섰다. 또한 양재역 벽서 사건이나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수도 한양의 외곽 지대일 뿐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저 다른 농촌 지역처럼 해주 정씨서초동, 개성 왕씨서초동, 경주 이씨우면동, 전주 이씨압구정동, 청주 한씨역삼동과 석촌동, 밀양 박씨일원동 등 집성촌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 책에서는 봉은사와 왕릉 등 유적을 어느 정도 다루기는 하지만 현대 강남이 건설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지금의 영등포와 동작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해 짧게나마 다룰 생각이다. 가장 먼저 개발된 한강 이남이었고, 따라서 ‘원조 강남’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존재는 1899년 개통된 경인선과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이다. 잘 알려진 대로 두 철도는 원통하게도 일제의 작품이었다. 여기서는 노선이 짧은 경인선은 논외로 치고, 경부선 이야기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당시 공사 주체였던 일제는 관악산과 청계산이 남쪽을 막고 있어 노선을 금천과 영등포 쪽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지금의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지역―신사동에서 양재동까지―에 철도를 놓았으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여의치 않았다. 개발 이전의 강남 지역은 전체적으로 저지대인 데다 습지가 많아 공사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던 시기1899~1905년에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철도 완공을 서두르는 중이었으니 노량진, 영등포, 금천 방면 외에 다른 안을 고려할 여유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등포와 노량진역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는 경부선, 경의선에 이어 서울을 지니는 경원선, 중앙선, 경춘선도 개통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모두 지금의 강남 지역을 경유하지 않았고 서울, 좀 더 정확하게 경성은 서울역과 용산역, 청량리역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 모두 강북 지역이었는데,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만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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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미 철도라는 인프라를 갖춘 영등포와 동작 일대 ‘한강 남쪽’에 지금은 한강대교라고 불리는 한강인도교가 건설되면서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리 남단인 오늘날의 동작구 노량진 본동과 흑석동, 대방동 일대가 널리 쓰이지는 않았지만 ‘강남’이라고 불렸다. 물론 공식 지명은 아니었다.
다리 개통 이후 일본 민간인들이 ‘강남’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가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는 흑석동에 명수대라는 이름의 유원지와 신사, 130세대 규모의 주택 단지를 조성했다. 이케다 나가지로池田長次朗라는 자는 용양봉저정을 용봉정이란 이름의 요정으로 개조했는데, 강남정회연합회江南町會聯合會라는 조직을 만들고 회장을 맡아 유지 행세를 했다. 부회장은 기노시타였다.
비슷한 시기에 영등포역 일대에 대규모 공장 시대 지대가 건설되고, 여의도에는 비행장이 들어섰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반도의 병참기지화를 위해 1939년 경성공업학교현 서울공업고등학교를 이전하고, 1941년 상도동에 영단주택 단지를 건설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개발 사업을 벌였다. 노량진에서 문래동으로 이어지는 지역은 제법 번화하고 인구밀도도 높은 지역으로 변신했다. 1936년 ‘영등포 출장소’라는 이름으로 경성부에 편입된 이 지역은 1943년 영등포구로 정식 승격되기에 이른다. 영등포구는 무려 30년 후인 1973년까지 한강 이남에 있는 유일한 구로서 독특한 위상을 지녔다. 한편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등포 주민들은 한강을 건널 때 ‘서울 간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지금의 관악구와 동작구, 그리고 서초구의 대부분 지역이 관악구라는 이름으로 독립하며 한강 이남에서 두 번째 구가 된다현재 한강 이남의 자치구는 모두 11개이다. 하지만 지금의 강남 3구 지역은 여전히 행정구역이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해 있었고, 대부분 논밭에, 마을과 마을이 달구지나 지나다니는 소로小路들로 이어진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오히려 철도 중심의 교통 체계가 구축되다보니 사실상 송파나루와 양재역이 사라지면서 이 지역의 존재감은 조선 시대보다도 약해졌다. 일본인들이 들여온 음식인 단무지를 위한 무나 서구에서 들어온 새로운 품종의 과일이 재배되었다는 것, 그리고 1927년 언주공립보통학교현재의 언주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 경성의 인구가 늘면서 봉은사나 선정릉으로 나들이하는 시민들이 늘어났다는 것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였다. 따라서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강 남쪽의 땅’이라는 의미의 ‘강남’은 동작구 일대에만 국한된 것이었고, 영등포의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지금의 강남 지역은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城東 중간’이라는 의미의 ‘영동永東’이라는 단어를 훨씬 많이 썼다. 실제로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서울에서 이름에 ‘강남’을 붙인 첫 번째 기관은 1959년 동작구 대방동에 세워진 강남중학교가 되었다. 지금도 동작구에 가면 강남초등학교, 강남교회, 강남시장 등 ‘강남’이 붙은 곳들이 적지 않다.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대신증권의 창업자 양재봉 회장은 젊은 시절 상도동에 강남극장을 세워 경영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지금의 관악구 조원동에 강남아파트도 들어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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