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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으로 살아라?
: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의 분투기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고인이 된 청년 노동자를 취재할 일이 있었다. 물류센터에서 일하다 과로사한 20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취재에 앞서 그에 관한 자료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왜 열심히 살지 않았지?’
정말, 이 생각을 했다. 그러곤 잠시 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과로사를 한 사람이었다. 너무 많이 일해서 사망한 사람. 그런 사람을 보며 왜 열심히 살지 않았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는 강도 높기로 악명 높은 일터에서 1년 넘게 주 6일 야간 근무를 하다가 심장에 무리가 왔다. 그런데도 그의 성실성을 의심했다. 내가 어떤 집단과 그의 성실을 비교하는지는 알만했다.
요즘 청년들.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가지고도 취업이 되지 않아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는 그 청년들 말이다. 이력서 300통을 넣고도 좌절은 금지니까 301번째 이력서를 쓰는 취업 준비자들, 그 이력서는 각종 공모전 입상 경력, 자격증, 워킹홀리데이와 어학연수, 봉사활동, 인턴 경험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 청년들이 바글바글한 세상에서 지방의 작은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 후 ‘정식’ 취업을 하지 않은 채 몇 년째 아르바이트를 한 이는 감히 성실을 자신의 덕목으로 가질 수 없었다. 집에 손 벌린 적도, 일을 쉬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나조차 그를 성실하다고 말해주지 못했다. 고인에 대한 미안함이나 자책은 다음 문제였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딘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삐걱거림
일하는 사람들을 취재해왔다. 정확히는 일하다가 다치고 병들거나 부당하게 해고되어 싸우는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이들은 억울해했다.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이런 대우라니. 자신을 지탱해오던 무언가에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말을 받아적었다.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의 ‘열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 하고 좋은 대우를 바라면 안 된다는 댓글이 달렸다. 소위 스펙에 포함되지 않는 노력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들이 행한 열심은 오히려 무능력에 따른 장시간 노동으로 폄하되었다. ‘진정한’ 열심이 아니었다.
세상의 변화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2011년부터 직장인의 일상을 녹인 웹툰 〈가우스전자〉를 그려온 작가는 2019년 2070회로 연재를 마치며 이런 후기를 남겼다.
“연재 중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해버리면서 직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엄청나게 변화해버렸습니다.”
극심해진 취업난은 웹툰마저 웃으며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웹툰 속 인물을 향해 취업한 자의 배부른 소리라며 열패감을 드러내는 독자도, 중견기업에 가기까지 등장인물들이 들인 노력을 계산하는 독자도 있었다. 세상이 달라지는 가운데 작가는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웹툰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하며 꾸역꾸역 그렸다고 했다. 나 또한 그랬다. 변화를 체감하며 꾸역꾸역 썼다. 인터뷰이가 댓글 창을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악덕 사장
그리고 나에겐 나의 노동 현장이 있었다. 종종 지인들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 나는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쓰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기록하는 분야가 노동이다 보니, 쓰는 글마다 과로사회에 대한 비판이 빠지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속도, 방향, 시간 등 뭐 하나 도마 위에 오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과중하게 일했다. 나를 야근시키는 악덕 사장이 바로 나 자신이라 농하는 같은 처지의 사람이 주변에 수두룩했다. 주로 프리랜서나 시민 사회 단체 활동가들이었으나, 자발적 과로는 이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기업에 걸맞은 인재가 되길 넘어 나 자신을 기업처럼 운용하라고 하는 세상이었다. 프리랜서건 자영업자건 정규직 사원이건 자기 자신의 악덕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늘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이상할 것이 없이 과로했다. 나의 사장은 변덕스러워서 어느 날은 일만 해서 우울했으나 어느 날을 열심히 살지 않아서 우울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자책하고 우울함에 시달리는 것이 현대인이 특성이라고들 했다. 나는 지극히 현대인이었다.
‘현대’ 사회의 저널 인사들은 ‘그건 노력이 아니야. ‘노오력’일 뿐이라고’라며 이 우울한 과로의 무용함을 말했다. 그 노력이 현 체제의 불평등을 유지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라 일갈했다. 정작 무용한 것은 그들의 훈계였다. 청년들은 코웃음 쳤다. 우리가 그걸 몰라서 노력하는 줄 아나. 이들은 “노력의 가치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하지만 가장 노력하는” 세대였다. 노력이 뭐 대단한 보상을 준다고 믿진 않았다. 다만 정체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모두가 달리는 사회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멈춰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달리면서도 자신이 멈춰 있지 않은지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낙오되지 않으려면 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이들의 절박함을 납득케 하는 것은 청년 두 명 중 한 명만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지경이 된 취업률이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 평등, 돌봄, 변혁, 공동체 같은, 방향을 달리하는 가치들을 앞세워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들이 제시하는 ‘다른 선택지’를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선 자리에서 몸을 틀어 한 발짝 옮겨야 한다. 모두가 뛰는 사회에서 멈춰서 방향을 바꾼다는 건 내딛는 자리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 다음 걸음이 향하는 곳이 진창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다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위험이 따르는 일은 무모한 일로 취급받기 일쑤이고 잡음을 일으킨다. 응원의 박수 같은 것은 받기 어렵다. 이들에게 무작정 박수를 보낼 수 없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 다른 청년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아니 열심히 일할 생각이 없는 20~30대 청년들을 만나면 머리가 복잡해졌다. 직장 상사가 불합리하게 군다고 말하면 상사 욕을 함께해줄 수 있고, 직장 갑질에 대해 글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그래서 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 당혹스러웠다. 조금 더 버텨보지.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그가 지금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한 것인지 그만둘 핑계를 찾은 것인지 판별하려고 했다.
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를 반복하는 이들을 사회과학 서적에선 신자유주의 시대의 피해자나 불안정 노동의 당사자로 바라보지만, 타인과 부대끼는 현실에서 이들은 ‘루저’, ‘낙오자’, ‘철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평가를 꼬리표처럼 달았다. 그리고 나 역시 현실을 이루는 퍼즐 조각 하나였다.
이들을 글에 담을 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직조하느라 바빴다.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물고 뜯고 난리인데, 열심히 일할 생각이 없다는 사람을 그 자체로 세상에 내놓을 자신이 없었다. 내 딴에 합당한 ‘불성실’의 이유를 만드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렇게 나 또한 타인의 ‘열심’을 측정하고 있었다.
타인의 비非노력에 납득 가능한 이유를 찾는 행위도, 타인의 ‘열심’을 측정하는 행위도, 나의 성실 강박을 농담으로 치부하는 일도 그만하고 싶었다. 아마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기는 힘이 들었다. 번아웃이 왔다. 번아웃증후군을 ‘과도하게 피로한 상태’ 정도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뛰질 못했다. 경주 트랙에서 멈춰 선 그제야 내가 달리는 중이었음을 알았다. 어떤 인터뷰 상대건 달리는 상태로 만났다. 열심히 일하지 않겠다며 멈춰 선 이를 만나면 이상해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뛰다 지쳐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데 그들의 피부는 뽀송하다 못해 메말라 있었다.
작정하고 ‘좀 다른 청년’들을 만나기로 했다. 사회가 청년답다고 여기지 않는 청년들을 인터뷰한 것이다. 차곡차곡 스펙을 쌓지 않고, 취업 준비를 유예하고, 취업을 하더라도 자꾸 퇴사를 하고, 사람들이 정식 일자리로 보지 않는 곳에서 일을 구하는, 세상의 기준에선 열심히 살지 않는 청년들이었다.
세상이 이들을 부르는 말로는, 니트나 프리터, 프레카리아트가 있다. 그 명칭에 따라 이들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기도, 지탄받기도, 비정규 노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어떤 관점으로 보건 간에 이들은 시대의 ‘이상’ 현상이었다. 위태로운 사회 현상이거나 예외적 양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라고 대단히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당혹과 마주하고, 그 삶을 해석하는 나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무리 임금노동의 속성을 비판해도, 내 안에는 노동을 윤리적인 것으로 보는 시선이 있었다. 노동을 대하는 특정한 태도가 옳다고 보는 관점이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성실’과 신자유주의의 ‘효율성’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제대로 노동하지 않으면 낙오하는 것은 물론이고 삶의 의미를 잃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지금과 다른 방식의 노동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믿음도 있었다.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도 나만큼이나 온갖 감정을 품으며 노동하거나 멈추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어딘가 ‘나사 풀린 사람’ 정도로 여겨질 이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시선에 노출되고, 그런 시선과 낙인의 이유를 무엇에서 찾을까?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무엇을 합리화하며, 그것을 통해 어떻게 삶의 이유를 만들어갈까?
이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미리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열심히 공부하고 구직 과정에서 모욕과 수모를 당해도 꿋꿋하게 일어서 또다시 시험을 치고. 그런데 이런 사람들만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내가 인터뷰의 의도를 설명하자, 미리는 그 말을 받아쳐 자신을 소개했다.
“그거를 하지 않는 미리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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