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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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황금시대에는 몇 권의 책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자료는 없다. 허공에서 춤추는 몇 가닥 풀잎으로 광대한 초지를 가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자료가 아테네에 관한 것이고 그 외의 지역에 대한 자료가 없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비문해율의 흔적을 찾으려고 도자기에 그려진 독자들의 이미지로 향했다. 기원전 490년경부터 학교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들 또는 의자에 앉아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 있는 그림들이 항아리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호메로스나 사포의 글이 쓰인 파피루스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대부분의 책은 시였다. 신화에 관한 책도 있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그림의 주인공은 주로 여성이며 역설적으로 학교가 그려진 그림에는 아이들이 없다. 이 역설로 인해 우리는 의문에 휩싸였다. 아마도 책을 읽는 여성은 귀족층이었을 것이며 집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혹은 일상의 현실이라기보다는 그저 성상을 넣으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무엇이 맞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기원전 430년에서 420년까지로 연도가 쓰인 어느 비석에는 무릎에 두루마리를 펼치고 글자에 심취한 청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발목을 포갠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의자로 보이는 모양 아래로는 개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부조는 그가 과거에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는 의미다. 독서를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 무덤까지 함께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는 그전에 없던 인물인 서적상이 출현한다. 그 시기 아테네 시인들의 텍스트에는 ‘서적상’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광장의 시장 가판대에 야채, 마늘, 향, 향수 등과 함께 문학작품 두루마리가 진열되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대화에 따르면, 은화 한 닢이면 누구든 시장에서 철학적인 글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에 벌써 책이, 그것도 철학을 다루는 어려운 책이 판매되고 있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가격을 고려하면 분명 축소판 사본이거나 중고 서적이었을 것이다.
정확한 책의 가격은 알려진 바가 없다.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가격은 2~4드라크마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노동자가 하루에서 엿새 동안의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돈과 맞먹었다. 하지만 희귀본의 경우, 그리스의 작가 루키아노스Lucianos가 언급하듯, 750드라크마에 달하는 책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격이 일반적인 책값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류층이든 중류층이든 책은 상대적으로 그들이 감당할 만한 가격에 시장에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세기 말에는 후에 돈키호테로 형상화되는 ‘책벌레’를 조롱하는 전통이 시작됐다.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자기 작품을 쓰려고 다른 작품을 이용해먹는” 작가들을 비웃으며 상호텍스트성을 냉소적으로 환영했다. 어떤 희극작가는 개인 도서관을 배경으로 삼아 이런 장면을 썼다. 도서관에서 스승이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비극과 역사에 관한 책이 들어찬 책장을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에게 보여준다. “좋아하는 책이 있으면 골라 읽으시게. 느긋하게 제목을 살펴보게나.” 그리스 희극에서 늘 대식가로 등장하는 헤라클레스는 요리책을 선택한다. 당시에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다양한 소책자가 유행했는데, 그중에서도 시칠리아 요리사의 요리책이 인기를 끌었다.
아테네의 서적상들은 해외 고객들도 상대했다. 그렇게 책이 수출되기 시작했다. 그리스 외부의 세계는 아테네에서 생산된 문학, 특히 당시에 가장 애호되던 비극 작품을 원했다. 아테네의 극작품은 지금의 할리우드 영화가 그렇듯이 아테네의 제국주의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조차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4세기 전반에 글을 썼던 크세노폰Xenophon은 위험한 튀르키예 해안에서 난파선들이 즐비한 연안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침대, 작은 상자들, 많은 책, 그리고 나무 상자에 실어 옮기던 상품들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시장에 책을 공급하는 조직과 사본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직과 사람들의 범위와 기능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기에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분명 책의 사본을 생산하는 곳이 있었을 터이고, 그들은 단순히 지인에게 읽히는 것을 넘어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려는 작가들의 허가를 받고 사본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허락 없이도 사본은 생산됐다. 고대에는 저작권이 없었으니 말이다.
플라톤의 한 제자는 플라톤의 작품을 필사하여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건너가 책을 팔았다. 그는 시칠리아에서 소크라테스의 글이 시장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일을 벌였다. 사람들은 그의 판매 행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귀족층에 속하면서 하층민이나 하는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받았던 것이다.
플라톤학파에게도 도서관은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학파가 보유한 도서는 기존의 보유량을 훨씬 넘어섰다. 그리스의 철학자 스트라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책을 수집한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철학자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두루마리 책을 1만 8000드라크마에 사들였다고 한다. 그는 수년에 걸쳐 돈을 써가며 당대의 모든 과학과 예술을 포괄할 수 있는 필수적인 텍스트를 축적했다. 끊임없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도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유럽의 작은 모퉁이에서 책에 대한 열기가 들끓고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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