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도망칠 때에는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이서는 이를 악물고 앞만 보며 달렸다. 산책로의 조명등 불빛이 사방에 맺힌 빗방울들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이서에게는 그 빛이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들처럼 느껴졌다. 힘없이 풀어지려는 동생의 팔을 목 위로 고쳐 둘렀다. 그래도 가느다란 팔목은 곧장 다시 힘을 잃었다. 등에 업힌 이지는 울음을 꾹꾹 눌러 참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좁은 등에 업혀 산길을 내달리기란 여섯 살 아이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게도 여섯 살 아이를 업은 채 폭우가 쏟아진 산길을 전력 질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꾸만 다리에서 힘이 빠지려 했다. 험한 길도 문제였지만, 귓가에서 동생이 흐느끼는 소리가 ‘그것’의 숨소리와 겹쳐지는 것만 같아서, 이마와 어깨를 적시는 빗물이 사실은 등 뒤에 바짝 따라붙은 ‘그것’의 아가리 사이로 떨어지는 핏줄기인 것 같아서.
발이 미끄러졌다. 자기도 모르게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진흙탕 위를 죽 미끄러진 왼발 때문에 몸이 순식간에 기울었다. 급경사였다. 이대로 구르면 목이 부러진다. 이서는 필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손끝에 이름 모를 덩굴줄기가 걸렸다. 죽을힘을 다해 두 손으로 잡고 버티자 속력이 줄면서 몸이 휙 돌았다. 그 와중에도 이서는 이지가 등 뒤에 깔릴세라 자기 몸을 먼저 땅에 붙였다.
우당탕, 갈비뼈가 부러질 듯한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한계까지 뛰고 있던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통증에 이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언니……? 언니, 괜찮아?”
이지의 가냘픈 목소리.
이서는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은 덩굴줄기를 두 손으로 부여잡은 채 달려온 쪽을 향해 엎드린 모양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등 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둠에 잠긴 까마득한 오르막길. 젖은 풀냄새가 물씬 풍기는, 평화롭고 고요한 숲속의 밤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아직도 그 끔찍했던 비명이 무섭도록 생생하게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이서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언니?”
“괜찮아.”
동생을 추슬러 올리고, 이서는 몇 발짝 뒷걸음치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달려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그것이 쫓아오기 전에 더 빨리.
1
무리한 계획
“아, 으, 어, 어어어…….”
동생 이지가 덜덜 떨리는 제 목소리에 키득댔다. 그들은 차로 비포장 산길을 이십 분째 달리며 덜컹대는 중이다.
“언니야, 이것 봐라?”
이지가 다시 고장 난 스피커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서는 동생 쪽을 건성으로 한 번 쳐다봐 준 후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다. 강한 비트가 고막을 때리고, 놀이 기구라도 탄 것처럼 흔들리는 차체를 따라 몸이 튀어 올랐다.
“아빠! 나 배고파!”
“어, 어? 그래, 잠깐만……. 어이쿠!”
아빠가 조수석에 놓인 봉투를 한 손으로 뒤적이다가 핸들을 급히 바로잡았다. 결국 이서가 안전벨트를 잠깐 풀고 말없이 앞좌석 사이로 몸을 내밀었다. 아까 마트에서 산더미처럼 사 담은 식료품들이 봉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빵 하나를 꺼내 이지에게 건네주었다. 아빠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아. 아까 그 길에서 좌회전했어야 했는데 괜히 돌아왔네. 괜찮아?”
“응.”
등도 아프고 허리도 아팠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빠부터가 잔뜩 긴장해서 식은땀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무리한 계획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선 여행이라니. 아빠는 사실 집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마트 쇼핑 한 번으로 피곤해서 드러누울 정도로 체력도 약했다.
지난주 토요일에 아침 먹다 말고 우리도 오랜만에 가족여행 좀 가자고, 아빠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시간 비워 두라고 했을 때 그냥 싫다고 말할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였다. 평소처럼 말없이 그릇을 정리하는 이서의 반응을 아빠는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아빠는 한 달 치의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 애써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이서는 불편했다. 옆자리에서 재잘거리는 이지는 그저 즐거운 얼굴이었다.
“맛있다. 언니도 먹을래?”
고개를 가로지었다.
“아빠도 한 입 줄까?”
“아니, 이따 먹을게. 우리 딸 많이 먹어.”
“응! 근데 우리 얼마나 더 가야 해?”
“아마 한 오 분?”
길가로 늘어진 나뭇가지가 차창을 탁 때리고 지나갔다. 아빠는 낮게 비명을 질렀고 이지는 아야! 외치며 팔을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빽빽이 늘어선 나무들은 지난여름 내내 무성히 자란 가지를 길 위로 축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늘이 짙게 드리운 숲길은 마치 이지의 그림책에 등장하는 마법과 저주가 숨겨진 비밀스러운 통로 같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 길게 이어졌다. 이서는 조금 숨이 막혀 왔다. 내색하지 않으려 차창에 이마를 대고 창밖만 노려보았다.
얼마쯤 더 갔을까.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싶더니 한순간에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방을 메우고 있던 나무들이 멀찍이 물러나고 좁긴 해도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가 펼쳐졌다.
아빠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도 소리 없이 그렇게 했다. 차는 드디어 매끈해진 길 위를 부드럽게 달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다리로 얕은 계곡물을 건넜다. 그리고 오르막길을 올라 모퉁이를 한 번 돌자 넓은 공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다 왔다! 아빠, 다 왔지! 저기지?”
“그래. 여기야.”
관광버스도 몇 대 들어갈 만한 너른 주차장이었다. 거기서부터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따라 크고 작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늘어선 것이 보였다. 전체를 통나무로 지은 듯이 꾸민 건물들이었다. 벽면은 세월을 먹어 반들반들하게 윤이 났고 커다랗게 뚫린 통창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몇십 년은 된 듯한 나무들이 늦가을 단풍에 빨갛고 노랗게 물든 채 건물들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 이서도 눈을 크게 뜨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잠깐이었다. 이지가 환호성을 지르며 운전석을 발로 찼다.
이미 주차된 세 대의 차를 피해 세우고, 아빠는 트렁크를 열어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언니야, 잠깐만.”
이지가 언니의 손을 콕콕 찌르고는 비밀스럽게 할 말이 있다는 듯 자기 입가에 손을 댔다. 이서는 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기며 허리를 숙였다.
“왜?”
“저거 뭐라고 읽는 거야?”
속삭이며 묻는 이지. 아직 한글을 다 못 깨친 이지는 어째선지 모르는 글자를 묻는 걸 창피해했다. 동생이 가리키는 것은 주차장 초입에 아치형으로 매달린 간판이었다. 빛이 바래고 귀퉁이가 빨갛게 녹이 슬어 있었다. ‘ㄹ’자는 떨어져 나가고 붙어 있던 자국만 남은 것이 어딘지 을씨년스러웠다.
“하늘뫼 수련원.”
“하늘메?”
“뫼. 산이라는 뜻이야.”
작은 입술이 동그랗게 모이더니 방긋 반달 모양으로 벌어졌다. 이곳 이름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 원래는 학교나 회사에서 단체 여행으로 많이 오는 곳인데, 요즘 같은 비수기엔 독채들을 펜션으로 쓴다더라고. 다녀와 본 친구가 괜찮다길래.”
이서의 눈치를 살피던 아빠가 조금 변명조로 덧붙였다.
이서는 조수석의 식료품 봉투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손잡이가 없는 종이봉투는 꽤나 묵직했다. 무거울 텐데…… 하고 중얼거리던 아빠는 이서가 걷기 시작하자 허겁지겁 캐리어를 끌고 앞장섰다. 이지가 발을 통통 구르며 둘의 뒤를 따랐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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