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햄버거와 사랑에 빠진 소녀
재즐린 브래들리의 삶에 맥도날드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일곱 살 때, 뉴욕 브루클린의 붉은 벽돌로 만든 연립 주택으로 이사를 간 후였다. 집에서 한 블록 반 정도만 가면 맥도날드 매장이 있어서 쉽게 들러 간단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재즐린은 늘 해피밀을 주문했다. 황금색 둥근 손잡이가 달린 상자 안에는 군침을 돋우는 햄버거에 감자튀김, 쿠기, 거기다 장난감까지 들어 있었다. 가끔은 재즐린의 아버지가 퇴근길에 맥도날드 제품들을 한 아름 사서 돌아오기도 했는데, 식구가 늘 때마다 아버지 손에 들려 오는 맥도날드 상자와 봉지도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맥도날드 음식으로 잔치라도 벌이는 날이면 재즐린과 동생들재즐린은 10남매 중 둘째였다.은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고 마지막 남은 감자튀김을 차지하려고 싸우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맥도날드로 저녁 식사를 하는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재즐린 가족의 저녁 식탁은 대개 집에서 만든 음식들로 차려졌는데, 재즐린은 가족 중에 가장 입맛이 까다로웠다. 재즐린은 미트로프도, 소간 요리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저녁 식사에 절대 빠뜨리지 않는 으깬 감자는 특히 싫었다. 동생들이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행복하게 먹을 때 재즐린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방법을 생각해 냈다. 저녁 시간마다 재즐린은 배가 별로 고프지 않다고 말하곤 했고, 어머니는 몸무게가 늘기 시작한 재즐린이 다이어트를 한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10분 뒤 재즐린은 몰래 집을 빠져나와 살금살금 맥도날드로 향했다.
이렇게 맥도날드에 갈 때마다 용돈을 썼던 재즐린은 곧 패스트푸드의 또 다른 매력에 사로잡혔다. 맥도날드에서는 더 큰 사이즈의 메뉴 가격이 작은 사이즈와 별 차이가 없었다. 가격을 따져 본 후 재즐린은 해피밀을 버리고 햄버거 한 개 가격으로 두 개를 살 수 있는 넘버 투Number Two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탄산음료와 감자튀김도 마찬가지였다. 자이언트 사이즈를 주문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중학교 때는 맥도날드가 재즐린의 첫 끼니가 되었다. 아침과 점심은 거르고, 그보다 많은 양을 학교를 마친 후 맥도날드에서 채웠다. 메뉴판에 있는 모든 메뉴를 이리저리 조합하고 변경하여 햄버거 두 개에 감자튀김 가장 큰 사이즈, 셰이크 가장 큰 사이즈와 파이 두어 개도 추가로 주문했다. 두 개씩 시켜 남은 음식은 친구나 동생에게 주겠다는 심산이었지만 가끔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재즐린은 한동안 브롱크스에서 운영되는 방과 후 프로그램에 다녔는데, 집에 돌아갈 때면 근처에 있는 맥도날드 매장에 들렀다가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내릴 즈음이면 허벅지 위에 다 먹은 햄버거 포장지가 한가득 쌓여 있곤 했다.
“저는 남들보다 위가 큰 아이였어요.” 재즐린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먹는 것을 정말 좋아했죠. 그야말로 음식을 미친 듯이 사랑했어요. 어렸을 때도 우유보다 햄버거나 핫도그, 감자튀김을 찾았어요. 엄마가 그러시는데 제 침대 밑에서 케이크 포장지가 그렇게 많이 나왔대요. 지금도 한밤중에 냉장고를 뒤지곤 해요.”
자신의 식습관을 설명하던 재즐린은 많은 사람이 식습관과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몹시 애를 먹는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녀는 몸 안에서 식욕을 한층 강하게 만드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재즐린은 먹는 것에 열정적이었지만 그녀의 표현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미친 듯이 사랑”했다. 또 아무 음식에나 끌리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어떤 음식은 특정한 방식으로 요리된 것만 좋아했다. 이를테면 감자는 아주 싫어했지만 감자튀김에는 열광했다. 잘게 다진 쇠고기는 빵 사이에 들어 있을 때만 먹었다. 어머니가 차려 준 밥은 얼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포장해 온 패스트푸드는 아무리 먹어도 양에 차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게다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식탐을 느꼈다. 심지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사 직후여서 배고플 리가 없을 때도 식욕이 일었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당혹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음식을 먹고 남은 쓰레기를 침대 밑에 숨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즐린과 음식의 관계가 변해 온 과정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어릴 적에는 먹을 때 몸에 전율을 느낄 만큼 먹는 일이 순수하게 즐거웠으나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불행의 기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안을 느낄 때 자주 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안의 둘째여서 부모님으로부터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면 음식으로 풀기 시작했다. 재즐린은 천식이 심해서 빨리 걸으면 숨이 찼기 때문에 운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몸무게는 조금씩 오르내리기를 반복했고 열여섯 살에 110킬로그램을 넘고 말았다. 키가 168센티미터 정도였던 재즐린은 플러스 사이즈를 훌쩍 넘기는 옷을 입어야 했다.
재즐린의 인생에서 결코 음식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난독증이 있어 학교생활이 어려웠고, 가족 전체가 보호시설에서 지낸 시기도 있었다. 재즐린은 우울증을 앓았고 자주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했을 때, 여름마다 거리에서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소방관들이 열어 준 소화전에서 흘러나온 물을 첨벙거리면서 놀던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럼에도 재즐린은 모든 역경을 잘 견뎌 냈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일이 그녀를 강인하게 해 주었는지도 몰랐다. 이처럼 그녀의 삶은 늘 녹록지 않았으나, 마침내 그동안의 한을 풀 기회가 찾아왔다.
재즐린의 가족은 새뮤얼 허슈라는 변호사와 친분이 있었다. 브루클린 주민의 배짱과 근성을 지닌 허슈는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머물던 오스트리아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뉴욕 브루클린으로 이주해 고학으로 로스쿨을 졸업하고 주 의원까지 지냈다. 1978년에 유대인 남성이 칼에 찔려 사망하면서 촉발된 유대인들의 소요에 가담했다가 경찰을 구타한 혐의허슈는 혐의를 부인했고 사건은 기각되었다.로 체포된 그는 이후 마피아들을 변호하며 형사소송으로 근근이 먹고살았으나 진로를 전향해 상해를 입은 사람들을 대리하는 민사소송 변호사로 활동 중이었다.
허슈는 재즐린 집의 납 페인트 소송 건으로 재즐린의 형제자매들을 대리하고 있었다. 손해배상 청구 건은 해결되는 데 수년이 걸렸기 때문에 허슈는 재즐린 집에 꽤 자주 방문했고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을 사 오기도 했다. 2002년에 허슈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재즐린에게 다른 종류의 상해 사건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허슈는 맥도날드를 상대로 한 소송을 계획하고 있었다. 우연한 사고나 식품 오염이 아니라 제품 설계 그 자체로 사람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허슈도 이 소송이 납 페인트 소송보다 훨씬 힘든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승산도 적은 데다 이런 종류의 소송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소송은 제기된 적이 없었다. 그전까지 있었던 가장 유사한 사건은 맥도날드가 알려진 바와 달리 감자튀김을 튀길 때 우지牛脂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제기된 소송이었는데, 이 사건은 고소인에게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는 대신 힌두교도들과 채식주의자 단체에 1000만 달러를 기부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허슈는 현대인의 식습관으로 인한 문제점과 피해를 고려할 때, 건강을 근거로 맥도날드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잠재적으로 더 승산이 있고 수익성도 좋으며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라고 확신했다.
허슈는 소장에 미국 연방 공중보건국장의 분석을 언급했는데, 그 분석에 따르면 비만 하나만으로도 매년 30만 건의 조기 사망이 발생했다. 허슈는 또 공중보건국장의 말을 인용해 심장병, 2형 당뇨, 특정 앞, 무릎 관절염을 비롯한 근골격계 장애가 모두 과식이나 건강하지 않은 식습관과 관련이 있으므로 “미국인들의 식습관은 머지않아 흡연에 맞먹는 규모의 예방 가능한 질병과 사망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심지어 경제도 큰 타격을 입을 거라고 강조했다. 의료비, 임금 상실 등 비만과 관련하여 매년 지출하는 비용이 1170억 달러로 추정되는데, 간접 비용의 일부는 패스트푸드나 고가공식품 기업들에 의해 소비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허슈가 맥도날드를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은 재즐린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의 첫 원고는 몸무게가 120킬로그램이 넘고 패스트푸드를 주식으로 먹는 퀸스 출신의 건물 관리인 시저 바버였다. 이 남성이 과체중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미 두어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후였다. 그러나 쉰여섯 살의 바버가 과체중 문제를 햄버거와 감자튀김의 책임으로 돌리자 곧 타블로이드 신문과 식품 업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한 신문은 “햄버거 먹고 비만해진 남성, 패스트푸드에 소송”이라는 헤드라인을 뽑기도 했다.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그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가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했을 때 프로그램 진행자는 이렇게 다그치기도 했다. “바버 씨, 당신은 심장마비를 두 차례나 겪었고 주치의가 패스트푸드를 먹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계속 드셨잖아요. 그럼 당신도 여기에 책임이 있지 않을까요?”
“어느 정도는요. 맞습니다. 저도 책임이 있죠.” 바버의 대답은 자기 무덤을 파는 듯했다. “하지만 제 말은, 내가 그동안 먹은 것에 대해 그들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트륨과 지방 함량이 왜 그리 높은지, 설탕은 또 왜 그렇게 많이 들어 있는지 말이에요. 나는 이런 사실을 몰랐고 매장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어요. 대안이 없었으니 먹었을 뿐입니다.”
분명 바버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몇 년 후, 뉴욕시는 사람들이 자기가 먹는 음식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도록 식당에서 음식 열량 정보를 제공할 것을 의무화했고, 맥도날드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대체할 수 있는 샐러드를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버는 개인 책임의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었고 소송은 패색이 짙어졌다. 허슈가 존 밴자프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그때였다. 밴자프는 워싱턴의 변호사로 대기업과 싸워 승소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로부터 몇 년 전인 1997년에 담배 업계를 무릎 꿇린 법정 싸움을 기획한 인물이었다. 그는 담배 제조 업체들에게 개인의 건강을 해친 책임을 묻는 대신 주 정부를 소송으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전략을 고안했다. 병에 걸린 흡연자들의 치료 비용을 대야 하는 보건 당국의 예산을 축낸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슈를 개인의 윤리적 판단이 아닌 돈에 관한 문제로 만든 이 전략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마침내 1998년에 담배 회사들은 항복했고, 유해한 마케팅 관행을 중단하고 그들이 초래한 의료적 손해를 상쇄할 조치를 마련하는 데 246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밴자프는 주로 불법행위에 대한 민사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들과 함께 1조 5000억 달러 규모의 가공식품 업계를 다음 소송 대상으로 점찍고 주시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허슈가 바버를 대리하여 소송을 제기하고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다. 밴자프가 허슈와 통화하면서 건넨 충고는 단도직입적이었다. 새로운 의뢰인을 찾아라. 인생에서 올바르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람, 자기가 먹는 음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사람, 한마디로 중년의 건물 관리인보다 훨씬 어린 의뢰인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밴자프는 허슈에게 말했다. “새로운 법리를 세우고 강력한 논거를 얻으려면 아이들을 대리하여 소송을 진행하는 편이 훨씬 승산이 높을 겁니다. 배심원단은 쉰여섯 살의 비만 남성보다 여덟 살의 비만 아동에게 더 마음이 끌릴 테니까요. 그 순간 허슈는 납 페인트 소송으로 만난 재즐린을 떠올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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