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보리차가 끓는 시간
문을 닫는다
보리차를 끓인다
밤은 어떻게 보리차를 맛있게 하는가
너는
간밤에 혼자
눈 쌓인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온
영혼의 언 발을 녹이는 중이다
김현, 「기화」 중에서
엘라이자는 저녁 9시에 일어난다. 시계의 알람을 끄고 욕조의 물을 채운다. 부엌으로 가 냄비에 물과 달걀을 넣고 가스 불을 켠다. 달걀 타이머를 돌려 욕실에 두고 욕조에 들어가 자위를 한다. 토스트와 달걀을 종이봉투에 담는다. 반쪽은 접시에 담는다. 친구 자일스의 몫이다. 달력을 뜯고 달력 뒤에 쓰인 하루의 글귀를 읽는다. 구두를 골라 구두를 반들반들하게 닦는다. 옆방의 자일스에게 음식을 건네고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춤과 음악을 좋아한다. 그리고 출근하는 길, 버스 차창에 모자나 머플러를 얹고 머리를 살짝 기댄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물방울들이 흐르는 모양을 바라본다. 언제나 조금씩 지각한다. 친구 젤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8의 주인공 엘라이자의 일상이다.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엘라이자의 일상은 그가 얼마나 고귀하고 존엄한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자신의 일상을 꾸리고 지켜나가는 사람, 이를 통해 삶을 지속하고 견뎌내는 사람. 어느 날 엘라이자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식사를 나누어 주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엘라이자의 일상이 누군가의 존재와 만나 깊어지고 확장하는 가운데 사랑은 태어난다. 그가 자위를 하던 욕조의 물, 달걀을 삶던 냄비의 물, 차창에 기대어 바라보던 빗물. 일상을 이루었던 물방울들은 엘라이자가 누군가와 감정과 욕망을 주고받고 자신의 사랑을 거침없이 끌어가는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시인 김현의 작품 「기화」는 눈을 맞고 돌아온 ‘너’의 등을 비추며 시작한다. 기화,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현상. 너의 등에 쌓여있던 눈송이가 기화한다. ‘나’는 문을 닫고 보리차를 끓인다. 네가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발가벗은 몸이 되어 ‘영혼의 언 발’을 녹이고 있다. ‘영혼의 언 발’은 누구의 것일까, 보리차를 끓이던 나의 발, 공원에서 돌아온 너의 발, 혹 어느 틈엔가 우리 집을 방문한 낯선 영혼의 발인 것 같기도 하다. 보리차의 물방울이 날아가는 순간과 언 발의 물방울이 날아가는 순간이 교차하면서, 두 사람은 영혼이 아늑해지는 것을 느낀다. 일상이 교차하며 사랑이 머물고 그로 인해 영혼이 따뜻해지는 장면은, 시를 읽는 우리의 영혼까지 그 밤으로 불러들여 위로한다.
이어 나는 “모든 순간을 연다” 그런데 그곳에는 “네가 없다” 수면양말 속 발가락을 어루만지던 기분만이 영원히 남아 있다. 일상으로 돌아가 나는 다시 보리차를 끓이고 물방울이 또다시 기화하는 가운데 우리 집에 문득 누군가 방문한다. 겨울밤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온 영혼이 문을 두드린 것이다. 나는 영혼을 맞이하여 함께 보리차를 나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와 마주하고 있는 낯선 영혼을 우리 독자들이라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시인이 열어 둔 낯선 영혼의 자리에 당신이 가 앉아 보면 어떨까. 이제 “모든 순간을 연다/네가 없다”라는 구절은 다르게 들린다. 시인은 우리 각자가 겨울을 견디며 가까스로 언 발을 녹이던 순간들을 열어젖힌다. 꽁꽁 언 겨울밤은 신비롭고 따뜻한 밤으로 열린다. 물방울이 녹아 날아가는 자리는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고 우리의 영혼이 들어앉는 자리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삶에 누가 “똑똑똑”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낯선 영혼을 맞이하고 그 영혼의 등에 얼굴을 쑥 집어넣을 수도 있겠다.
올해 겨울은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길고 추운 겨울은 처음이었으니까. 처음엔 이렇게 날씨가 이상한 나라에 산다는 것이 짜릿하고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런 기분은 잠깐이었다. 계속되는 겨울은 나를 지겹고 짜증이 나게 했으며, 눈비가 섞어 치는 날이면 우울하게 만들었다. 또 겨울이 얼마나 잔인한 계절인지는 충분히 아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간밤에 누가 얼어 죽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랬던 겨울이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다. 날이 따뜻해지고 밝은 낮이 길어진다.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번 겨울을 견디며 지냈을까.
나는 저녁마다 호수를 보러 공원에 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호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것처럼 호수는 얼어 있었다. 매일 아침 깨어나 하루를 살아내고 매일 저녁 호수를 찾아가자 호수는 결국 녹았다. 지난밤 드디어 물이 되어 흐르는 호수를 보았다. 아무도 없던 호수에 이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맥주도 마시고 따뜻한 얼굴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영혼들 사이를 걸었다.
엘라이자를 보며 일상을 가꾸고 지속해 나가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일상의 모양을 변화시켜 다른 존재와 나누는 가운데 사랑이 탄생하는 경이를 본다. 김현의 시를 읽으며 내가 보리차를 끓이고 네가 언 발의 영혼을 녹이는 순간이 있을 때, 이불 속 서로의 발가락을 어루만져 주는 사랑의 순간이 있음을 생각한다. 일상이 겹치는 순간 사랑이 머물고, 그 사랑의 여운을 간직할 때 또 다른 사랑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김현의 시는 날아가는 물방울들 속에서 우리가 함께 교차하는 따뜻하고 신비로운 미래를 그려낸다.
김현
「기화」
『입술을 열면』창비, 2018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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