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서적상 거리
서적상 거리Via dei Librai는 남쪽의 시청과 북쪽의 대성당 중간에 피렌체의 심장부를 관통하며 뻗어 있었다. 1430년대에 그 거리는 잡다한 재단사와 직물 상인은 물론 통장이, 이발사, 푸주한, 제빵사, 치즈 장수와 여러 공증인, 채식사彩飾師 , 공방을 함께 쓰는 두 화가, 그리고 피아넬라이오pianellaio, 즉 어느 슬리퍼 제조공의 본거지였다. 하지만 거리 이름은 그 좁은 골목을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여러 서적상 겸 카르톨라이오cartolaio로 알려진 문구상들의 가게에서 유래했다.
그 시절 서적상 거리에는 여덟 명의 카르톨라이오가 있었다. 그 직업명은 그들이 근처 제지소에서 조달하는 다양한 크기와 품질의 종이카르타, carta를 팔았던 데서 유래했다. 그들은 송아지나 염소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를 양피지 제조공들로부터 받아서 가게에 갖추고 있었는데, 양피지 제조공들의 작업장은 송아지나 염소의 가죽을 담근 커다란 통과 함께 옆 동네 거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카르톨라이오는 종이와 양피지의 판매 외에도 훨씬 더 광범위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바로 필사본을 제작해 판매하는 일이었다. 고객은 카르톨라이오한테서 중고 필사본을 구입하거나 그들에게 제작을 주문해 필경사가 옮겨 쓴 필사본을 구할 수 있었다. 필사본은 가죽이나 판지로 장정되고, 고객이 원한다면 채식, 다시 말해 물감과 금박을 재료 삼아 삽화나 도안으로 사본을 장식하는 과정도 추가되었다. 카르톨라이오는 서적상, 제본업자, 문구상, 삽화가, 출판업자 역할을 하면서 피렌체 필사본 거래의 중심에 있었다.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카르톨라이오라면 필경사와 세밀화가미니어처리스트부터 양피지 제조공과 금박공, 때로는 저자들까지 상대했다.
책 제작은 모직과 금융처럼 피렌체 사람들이 잘하는 일이었다. 피렌체에는 책을 구입하는 시민들이 많았으므로 카르톨라이오의 사업은 호황을 누렸다. 피렌체의 성인 열 명 중 일곱 명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반면 다른 유럽 도시들의 문해율은 25퍼센트 미만에 그쳤다. 1420년에 피렌체의 한 염색업자의 재산 중에는 단테의 저작과 단테의 동시대 사람인 체코 다스콜리의 시 한 편, 그리고 오비디우스 시집이 있었다. 이 저작들은 라틴어가 아닌 현지 토스카나 방언으로 쓰인 것이었지만, 피렌체의 수공업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치고는 그래도 인상적인 개인 서재였다. 심지어 피렌체의 많은 젊은 여성들도 수도사와 여타 도덕가들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어느 양모 상인은 자신의 두 여자 형제가 “남자들 못지않게” 글을 잘 읽고 쓴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서적상 거리 북쪽 끄트머리 방향의 궁전 거리와 만나는 곳에 대형 서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 거리가 만나는 곳에는 피렌체 행정 장관의 궁의 칙칙한 담이 바디아Badia로 알려진 수도원의 우아한 장식 외벽과 마주 보고 있었다. 1430년 이래로 서점 주인 미첼레 과르두치는 1년에 15플로린에다가 납촉류candle wax, 〔밀랍이나 동물성〕 1파운드를 내고 수도원의 수도사들로부터 그 건물에 세를 냈다. 방 2개짜리인 그의 서점의 문 하나는 바디아 입구와 면했고 남쪽으로 난 문은 궁전 거리 쪽으로 나 있었는데 거기서 고개를 들면 포데스타궁현재 바르젤로 국립미술관, 즉 행정 장관 궁전에 딸린 단단하고 무섭게 생긴 탑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침이면 피렌체 최고의 지성들이 과르두치의 가게에서 몇 발짝 떨어진 이 궁전 옆 모퉁이에 모여서 철학과 문학을 논했다. 그 시절 피렌체는 작가들, 특히 문학가와 철학자philosopher,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필로소포(philosopho)에서 온 단어들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들은 오랜 시대에 걸쳐 축적된 지혜,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저작을 전문적으로 살피고 면밀히 탐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고대 텍스트들 다수는 오랫동안 소실되었다가 포조 브라촐리니 같은 피렌체인들에 의해 최근에 재발견되었는데, 포조가 커다란 환호 속에 다시 찾아낸 저작들로는 로마 작가 키케로, 루크레티우스의 작품 등이 있었다.
포조는 과르두치 가게 옆 거리 모퉁이에 모이는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포조와 친구들은 필사본을 찾기 위해 자연스레 카르톨라이오의 가게들을 훑어보았지만 1430년대 초반에 과르두치의 가게에서 그들이 혹할 만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르두치는 유능한 삽화가를 직원으로 두었지만 임대차 계약서에서 그는 ‘문구상과 제본업자cartolaio e legatore’로 묘사되었고, 수집가들을 홀리는 세월에 묻혀버린 고대 로마와 그리스 저작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기보다는 필사본을 제본하는 더 소박한 일에 종사했다. 그의 가게는 종이와 양피지 외에도 걸쇠, 장식 고정쇠, 나무판자, 망치, 못과 더불어 송아지 가죽과 벨벳 더미를 구비하고 있었고, 망치 소리와 톱질 소리가 가게에 들어서는 이를 반겼다.
상황은 곧 변할 참이었다. 1433년 과르두치는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Vespasiano da Bisticci라는 열한 살 소년을 새로운 조수로 고용했다. 그리하여 베스파시아노는 책 제작자이자 지식상이라는 놀라운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머잖아 피렌체의 문인들은 가게 바깥 모퉁이가 아니라 가게 안으로 몰려들게 된다. 카르톨라이오의 세계, 양피지와 깃펜의 세계, 책상에 몸을 숙인 필경사들의 세계, 두툼하고 육중한 책들이 쇠사슬로 서가에 고정된 우아한 도서관들의 세계에서 베스파시아노는 지혜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일컬은 대로 ‘세계서적상의 왕rei de li librari del mondo’이 될 운명이었으니까.
출생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베스파시아노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당시 역사상 최대의 돔인 쿠폴라를 세우는 과업에 착수한 지 몇 년 뒤인 1422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집안은 피렌체에서 남동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바위투성이 언덕 비탈에 자리한 작은 촌락인 산타 루치아 아 비스티치에서 이름을 따왔다. 피포로 통한 아버지 필리포 다 비스티치는 피렌체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양모업에 종사했다. 피포는 피렌체 시내에 세를 얻은 집과 남동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안텔라 마을 근처에 소유한 농가를 오가며 지냈는데,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그 농가에서는 밀, 보리, 콩, 무화과, 올리브를 재배하고 포도주도 생산했다. 1404년 피포는 마테아 발두치라는 열 살 소녀와 정혼했다. 마테아 발두치는 아들 넷과 딸 둘, 총 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다. 베스파시아노는 그중 넷째였다.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흔치 않은 이름은1420년대 피렌체에서 베스파시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 말고는 딱 한 명뿐이었다 그의 부모가 일찍부터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1426년 초에 피포가 죽자 당시 네 살이던 베스파시아노와 그의 형제들의 미래는 위태로워졌다. 마테아는 아직 열다섯 살이 안 된 자식이 다섯 명인 데다 뱃속에 여섯째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250플로린의 빚이 있었고, 그중 86플로린은 피포가 피렌체 최고 갑부인 메디치가에게 빌린 돈이었다. 당시 양모 가게에서 가장 봉급을 많이 받는 직원이 기껏해야 1년에 100플로린을 받았고 대다수는 집에 50플로린도 못 가져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상당한 액수였다. 마테아는 남편의 빚을 청산하려고 성과 없이 애쓰는 와중에 피렌체에서 더 싼 거처로 연달아 이사를 해야만 했다. 1433년, 마테아의 최근 집주인을 포함해 채권자들은 안텔라 농가의 땅돼기를 압류했다.
베스파시아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 2년 뒤에 학업을 시작했다. 피렌체 소년들 중 70~80퍼센트 정도가 학교를 다녔는데, 이는 다른 유럽 도시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다. 6세와 11세 사이에 베스파시아노는 시쳇말로 보테구차botteghuzza, 즉 작은 공방으로 알려진 초등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그가 처음 읽은 책은 십중팔구 산타크로체Santacroce, 염소의 목 부위 가죽에서 나온 값싼 양피지로 만든 변변찮은 소책자였을 것이다. 이 책으로 그는 알파벳을 익히고, ‘평민’이나 더 박하게는 ‘어중이떠중이’를 뜻하는 라틴어 불구스vulgus에서 온 ‘속된 말vulgar tongue’인 토스카나 방언을 읽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교재에는 바부이노Babuino도 있었을 텐데 개코원숭이baboon에서 따온 이 제목은 학생들이 교사를 ‘흉내 냄’으로써 읽기를 배웠음을 뜻한다. 피렌체의 학생 수백 명이 이런 교재를 지속적으로 구비해야 했으므로 카르톨라이오는 일감이 끊이지 않았고 사업은 활기를 띠었다.
학업을 이어갈 학생들은 열한 살 무렵에 보테구차를 떠나서 법조계나 종교계의 경력을 준비하기 위해 라틴 문학을 공부하는 문법학교에 입학하거나 피렌체 상인 경력에 필요한 산술 능력을 배우기 위해 주판학교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큰 빚을 남기지 않았거나 어머니에게 부양해야 할 자식이 많지만 않았어도 베스파시아노는 분명히 문법학교에 들어가 라틴 문학에 몰두하며 4년을 보냈을 것이고 어쩌면 대학에서 면학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다른 길을 예비해두었다. 1433년 무렵, 집안의 형편이 가장 어려웠던 해에 베스파시아노는 교재를 덮고 열한 살의 이른 나이에 일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양모업에 뛰어드는 대신 서적상거리로 향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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