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입니다.’며 폭언과 욕설을 자제해달라는 멘트를 들을 때마다 ‘누군가의 가족이 아니라 나의 가족인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렇게 폭언과 욕설을 들으며 일하고 있구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오토바이·다마스 퀵 서비스 기사, 청소 노동자, 콜센터 직원, 식당·마트 노동자, 오토바이 배달 기사.
나의 엄마, 아빠, 언니들 그리고 조카들이 하는했던 일이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 교복 입은 학생이 친구들과 어울리다 일하는 엄마 혹은 아빠의 모습을 보고 외면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엄마 아빠의 일이 부끄러워서다. 그때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상상했다. 그리고 대답하지 못한 채,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나는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니고,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화이트칼라 직장인이다. 회사생활 15년 차니 나이도 제법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일’하는 엄마, 아빠, 언니들, 조카들을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에 대한 대답을 망설인다.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하는 아빠가 내가 일하는 사무실로 배달을 온다면?
동료들과 함께 간 식당에서 언니가 일하고 있다면?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조카가 내가 일하는 사무실로 점심 식사를 가져온다면?
내가 일하는 사무실 건물 청소를 엄마가 한다면?
나는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 또 우리 가족의 성실한 노동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조금 두렵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이 책은 우리 가족의 노동에 관한 이야기고, 또 나의 고해성사다.
노동은 벌인가
사무실에 앉아 에어컨 바람을 쐬며 일하는 나와 달리, 우리 가족은 뜨거운 태양 아래 눈과 비를 맞으며 일한다. 누구에게든 ‘님’으로 불리며 존중받는 나와 달리, 우리 가족은 무시와 욕설, 폭언의 위험 속에서 일한다.
사무실에 앉아 일하다가도 문득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곤 했다.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외면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하는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지 모르면 된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내가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아빠는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하며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돈을 주우러 다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 6일,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는 조카 지훈이는 “나는 오래 서 있는 거 말고, 힘든 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아르바이트하며 스트레스로 탈모가 생길 정도로 힘들어한 조카 민준이는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에 웃기만 한다. 청소 노동을 하다 쓰러진 엄마도 “바닥을 쓸면서 책상을 정리해 줬더니 (직원이) 고맙다고 초코파이를 선물로 줬어.”라는 얘기만 했지, 힘들다는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말들을 ‘믿었다’.
또 하나는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 게을러서, 열심히 하지 않아서, 과하게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시작한 아빠는 20년 이상을 눈, 비 맞으며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는 대학교에 갔고, 학비와 생활비에 대한 부담 없이 졸업하고 취업했다. 지영 언니는 아르바이트하며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중·고등학생이던 나의 공부를 봐주고 도시락을 챙겨줬다. 추운 겨울, 식당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유정 언니는 퉁퉁 부은 손으로 청소하고 가족의 저녁을 차렸다.
우리 가족의 힘든 노동은 그들의 무지, 무능, 오만에 대한 ‘벌’이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우리 가족의 피를 빨아먹고 산 흡혈귀가 아닌 게 되니까.
그리고 가족을 미워했다.
내게 우리 가족은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이었다.
3대 가족의 노동사
아빠와 두 언니 그리고 두 명의 조카들과의 생애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노동사를 정리했다. 2021년 8월부터 2022년 1월까지 1~3회에 걸쳐 2시간씩 인터뷰했다. 노동 경험이 없는 일부 가족 구성원 등은 제외했다. 나이는 2022년 기준이며, 나를 제외한 가족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노동에 대해서는 ‘집·가족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가족 내의 가사 노동, 돌봄 노동 등은 제외했다.
1장 강영수. 가방 공장 사장의 꿈은 이뤘는데, 왜 퀵 서비스 가게 사장은 될 수 없었을까?
아빠1949년생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하지만 아빠의 성실한 노동과 1960~7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 덕분에 아빠는 가방 공장 노동자에서 가방 공장 사장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아빠는 승승장구했다. 가방 공장 사장에 이어 가방 자재 도매상 사장이 되었다. 서울에 있는 45평 아파트에서 살았고, 2대의 자가용이 있었다.
하지만 IMF로 아빠의 성공 신화는 무너졌다. 아빠는 오토바이 퀵 서비스 기사가 되었고 다시 가난해졌다. 아빠는 젊었을 때처럼 성실한 노동만으로 가난을 극복할 수 없었다. 아빠는 20년간 오토바이 퀵 서비스 기사로 생계를 꾸렸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로 일거리가 끊기며, 아빠는 오토바이 퀵 서비스 사장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오토바이 퀵 서비스 기사로 노동사를 마감했다.
2장 강지영. 아르바이트생에서 계약직으로, 계약직에서 대기업 정규직으로
지영 언니1977년생가 재수할 때 아빠가 부도났다. 선생님이 꿈이던 지영 언니는 대학에 가기 위해 편의점·카페·식당·백화점 등에서 3년간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했다. 하지만 대학 입학에 실패했다. 언니는 취업을 결심했지만, IMF 후 최악의 실업률을 기록할 때다. 언니는 다시 아르바이트하고 학원에 다니며 취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2000년 KT 114 전화 안내원으로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 계약직이었다.
민영화를 진행하던 KT는 대규모 통폐합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언니는 KT에서 한국인포서비스로 소속이 바뀌었다. 회사는 ‘당근’으로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제도를 한시적으로 운영했다. 언니는 그 기회를 잡았다. 지영 언니는 아르바이트생에서 계약직으로, 계약직에서 대기업 정규직원이 되었다. 일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언니의 생활 또한 안정되었다. 정규직이 된 지영 언니는 결혼했고, 1년 뒤 퇴사했다. 현재 지영 언니는 전업주부다.
3장 강유정. 모자가정 여성 가구주에게 가난은 숙명
유정 언니1975년생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기업 제약회사 경리로 일하다 결혼과 함께 퇴사했다. 그리고 29살에 3살, 5살 두 아이를 책임지는 여성 가구주가 되었다. 언니는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식당 설거지, 주방 보조, 마트 캐셔 등으로 일했다.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고, 벌이는 최저시급 수준으로 매우 적었다. 가족의 도움 없이 생활은 불가능했다.
아이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언니는 다마스 퀵 서비스를 시작했다. 시간당 버는 돈은 언니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언니는 가족의 도움 없이 혼자서 두 아이를 부양할 만큼 돈을 벌었다. 지금도 언니는 다마스 퀵 서비스 기사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다.
4장 이민준. 스트레스상 탈모가 생겨도 A 호텔에서 계속 일한 이유
조카 민준2001년 출생이는 22살로 경력 6년 차다. 중학교 3학년 때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오토바이 배달을 할 때는 새벽 5시까지 일했다. 한 달에 쉬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랜 시간, 늦게까지 일한 민준이는 항상 학교에 지각했다. 민준이는 노동자로도, 학생으로도 보호받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민준이는 A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동안 해왔던 ‘일’과 달랐다. 민준이는 A 호텔에서 일하며 처음으로 4대 보험에 가입했다. 또 처음으로 주휴수당과 연장근무 수당을 받았다.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있었으며, 아르바이트생에서 인턴으로 승진할 기회가 주어졌다. 민준이는 이곳에서 ‘외국어를 잘하면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현재 군 복무 중인 민준이는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5장 이지훈. 오토바이 배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카 지훈1999년생이는 중학교 1학년 때 온라인 불법 도박으로 100만 원을 ‘벌’었다. 지훈이에게 도박은 돈을 버는 방법 중 하나였고, 가출이나 실직으로 돈이 필요해질 때마다 도박을 했다. 하지만 도박은 빚만을 남겼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훈이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위험하지만 ‘많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오토바이 배달을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된 지훈이는 직업이 갖고 싶었다. 치킨집에서 치킨도 튀기고 카페에서 매니저로도 일했다. 학력도 없고, 기술도 없고, 경력도 없는 지훈이가 돈을 벌 방법은 장시간 고된 노동을 하거나, 위험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고, 힘들고, 오랜 시간 일하던 지훈이는 반복적으로 일을 그만두었고, 이것은 다시 도박에 손을 대는 이유가 됐다. 지금도 지훈이는 오토바이 배달을 한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가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생애사 측면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온 가족은 각자의 노동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엄마가 일하다 쓰러졌을 때도, 병간호를 위해 온 가족은 하던 일을 그만두던가, 더 일해야 했다.
우리 가족의 노동사이지만, 어느 가족이나 겪었을 법한 일이다. 또 집에 이런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을 수 있다. 혹은 자수성가를 이뤘거나, IMF 때 망했거나,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있거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거나, 아르바이트하며 학비를 벌거나, 미래가 보이지 않아 방황하거나 등 삶의 한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마음 가는 사람 것을 먼저 봐도 되고, 그 사람 부분만 봐도 된다.
당신만이 아니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고,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