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가부장이 있었다
슬아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열한 식구를 다스렸다. 한 명의 부인, 세 명의 아들, 세 명의 며느리, 네 명의 손주가 그의 휘하에서 지냈다.
1999년 슬아는 할아버지로부터 호칭에 관해 교육받았다. 할아버지의 큰아들은 슬아의 아빠였다. 아빠의 동생들은 삼촌인데 결혼 후에는 작은아빠로 불렸다. 작은아빠의 아내는 작은엄마였다. 슬아는 자기 엄마를 제일 좋아했다. 그러나 슬아 엄마는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바빴다. 에미야, 나와봐라. 형수, 국 좀 갖다줘요. 큰엄마, 저 오줌 쌌어요. 엄마는 이름 없이 호명되며 살림하는 자였다. 여자 어른들은 집안일을 했고 남자 어른들은 바깥일을 했으며 어린이들은 말을 배웠다. 말이란 세계의 질서였다.
할아버지는 손녀인 슬아에게만 붓글씨를 가르쳤다. 손자들은 아무도 그런 걸 배우겠다고 앉아 있지 않았다. 슬아는 할아버지의 먹물을 마룻바닥에 흘리지 않는 유일한 어린이였다. 할아버지가 먼저 화선지에 글자를 썼다.
父生我身 母鞠吾身
부생아신 모국오신
슬아는 야무지게 따라 썼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였다. 할아버지는 종이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아버지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 내 몸을 기르셨느니라.”
먼 옛날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이렇게 가르치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한 그랬을 것이다.
슬아가 잠자코 듣더니 물었다.
“엄마가 저 낳았는데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아빠 없었으면 너는 태어나지도 못했어.”
“하지만 직접 낳은 건 엄만데……”
그는 어린 손녀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생각해봐라. 땅만 있으면 거기에서 곡식이 자라겠니? 씨앗을 심어야 자라잖아. 씨앗이 없으면 땅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야.”
“그치만 씨앗도 땅이 없으면……”
슬아가 반론을 제기하자 둘 사이의 정서적 거리가 청계천만큼 벌어졌다. 할아버지는 서둘러 다음 문장을 가리켰다.
爲人子者 曷不爲孝
위인자자 갈불위효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 어찌 효도를 하지 않으리오.”
할아버지가 근엄하게 해설했고 그것은 가부장의 말이었다. 감히 내 말을 부정하는 것이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말은 우리를 ‘마치 ~인 듯’ 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세계를 송두리째로 이상하게 여기고 만다. 어린 슬아는 선택해야 했다. 속을까 말까.
*자크 라캉의 말.
그는 빠르게 속기로 한다. 화선지에 바르게 ‘아들 자’와 ‘놈 자’와 ‘효도 효’ 같은 글자를 쓴다. 효녀인 듯 유년기를 보낸다. 어쨌거나 할아버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은 슬아에게 커다란 사랑을 먼저 주었다.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주었고 슬아가 자랄 터전을 제공했다. 집과 계단과 방과 식탁과 텔레비전과 화분 등은 모두 가부장의 것이었다. 그는 손녀에게 가르쳤다. 절은 어떻게 하는 건지,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가 각각 어떤 동물을 의미하는지, 고기는 어떻게 삶아야 하는지, 계절별로 무슨 과일을 챙겨 먹으면 좋은지…… 할아버지에게 딸자식이란 결국 다른 집 며느리가 될 여자였으나, 그는 슬아가 남다르게 총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딜 가든 슬아를 데리고 다녔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몰면 슬아는 뒷자리에 앉아 그의 허리를 꼭 붙들었다. 가부장의 등에 기댄 채로 스쳐가는 세상을 보았다. 그곳은 남자 상인들의 거리였다. 골목마다 남자들이 몸과 머리를 써서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 손녀를 자전거에 태운 할아버지가 지나가면 그들은 일하다 말고 알은체를 했다.
“사장님, 어디 가세요?”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 무일푼으로 상경하여 가계를 일군 남자였다. 그의 자수성가 스토리를 골목 사람들은 다 알았다. 사장이자 가부장인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손녀 딸내미랑 우동 먹으러 가지.”
그는 손녀와의 외식을 즐겼다. 할아버지와 슬아는 집안에서 가장 자유롭게 외출하는 두 사람이었다. 가부장의 편애를 받는 손녀는 며느리나 할머니보다도 커다란 권력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우동집에서 할아버지는 물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될 거니?”
슬아는 면발을 들이키며 집안 여자 어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도 커서 며느리가 되나. 엄마를 보면 고생길이 훤한데. 아니면 할머니가 되나. 할머니는 딱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은데. 문득 맞은편 할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건강했고 자신 있었고 가진 것도 많았다. 슬아가 아는 어른들은 모두 그의 말을 따랐다.
“저는 사장님이 되고 싶어요.”
슬아의 대답에 가부장이 크게 웃었다.
“무슨 장사를 하려고?”
슬아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아직 가녀장이 아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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