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 김남주 옮김,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 1988
아침저녁으로 읽어야 할 것이 있을까. 그것을 시대가 결정하기도 한다. 브레히트가 쓰고 김남주가 번역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민주화를 위해 사람들이 제 목숨을 던지거나 미래를 포기하며 싸우던 시대에 읽혔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사랑하는 동지들을 위해 나는 살아 있을 필요가 있는 존재다. 그러니 아침저녁으로 되새겨야 한다. 나를 돌보자고, 무엇에든 조심하자고.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삶이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웠던.”이시영 그런 시대로부터 떠나오면서 사랑이라는 말의 쓰임새는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했다. 그후 이 시는 강렬한 연애시로 읽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원한다니, 나는 그를 위해 내내 온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의 바보는 난생처음, 제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임을 깨닫는다.”이영광 이 두 독법은 적절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이 시가 쓰인 맥락을 알고 나면 달리 보이는 대목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독일어판 브레히트 전집 14권에 수록돼 있는데, 공적으로 발표된 작품이 아니라, 편지에 적힌 글이 훗날 시로 수습된 경우다. 쓴 사람은 브레히트, 받은 사람은 루트 베를라우다. 루트 베를라우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쓴 시라는 뜻이다. 루트 베를라우는 ‘브레히트의 공동 집필자이자 연인’이다. 아니, 이렇게 소개할 수는 없다. 짧아서가 아니라 같은 문구로 소개될 사람이 그 말고도 더 있기 때문이다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마르가레테 슈테핀 등. 베를라우는 회고록 『브레히트의 연인』을 남겼으니 400쪽이 넘는 그 책을 봐야 한다. 그 뜨거운 책을 읽어보면, 베를라우를 ‘이기적인 남성 문인에게 재능을 착취당한 여자’로 간주하는 것이 결코 그이의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적어도 그 책 속에는 뜨겁게 살고 사랑하고 쓴 여성이 있다. ‘자신의 생을 그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다 마셔버린’테니슨, 「오디세우스」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덴마크에서 함께 지내던 브레히트와 베를라우는 1937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문화수호를 위한 국제작가회의’에 동반 참석했다. 진행중이던 회의 장소가 내전중인 스페인으로 옮겨지자 베를라우는 용감하게 스페인으로 떠났지만 브레히트는 덴마크로 돌아왔다. “그는 폭탄을 싫어했던 것이다.”『브레히트의 연인』 베를라우는 마드리드에 오래 머무르며 열렬히 활동했다. 국제여단의 대규모 회의에도 참석했고 전선의 전사들도 만났다. 베를라우의 관심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념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내면을 향해 있었고, 그 곁에 바짝 다가가서 이야기를 얻어왔다. 그러나 베를라우가 덴마크로 돌아왔을 때 브레히트는 화를 냈다. 베를라우가 가져온 이야기는 브레히트가 알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를라우는 너무 늦게 왔다. 브레히트는 베를라우를 기다리느라 피로했고, 돌아오지 않는 베를라우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 그는 뭐라고 썼을까.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가 보낸 편지들로 미루어볼 때흔히 짤막한 메모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내게 보낸 편지에서 그대는
내가 필요하다고 말했죠.
브레히트가 주로 사용한 말은 ‘필요하다brauchen’였던 모양이다.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어 보내면 ‘당신이 필요해요’라는 답장을 받게 되던 한 사람을 생각하는 일은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베를라우가 쓴 것으로 짐작되는 다른 짧은 시 한 편에는 ‘약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거기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당신에겐 한 가지도 없었지만 내겐 한 가지 있었지. 그건 내가 사랑했다는 것.”1951.1.28. 이 말이 사실이라면 베를라우는 끝내 브레히트를 온전히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상호의존적인 약점이 있을 때 사랑은 성립된다.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상대가 필요한 사람은 대등하게 약하지 않다. 전자는 내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만, 후자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 무렵 베를라우가 받은 편지 중 어느 하나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가 적혀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브레히트가 쓴 시니까 “나”는 그일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아닌 것이다. “나”는 베를라우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브레히트다. 그러니까 브레히트는 지금 베를라우의 위치로 가서, 베를라우의 ‘나’를 사용하면서, 베를라우가 브레히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신 써주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썼다. 베를라우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시니까 말이다. 이것은 매우 기묘한 방식의 사랑 고백이다. 아니 세뇌인가? ‘베를라우, 이 시를 아침저녁으로 읽으시오. 그리고 잊지 마시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는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실 독일어 원문엔 이미 단서가 있다. 김남주 시인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옮기면서 성별이 지워진 문구는 원래 ‘내가 사랑하는 남자Der, den Ich liebe’다. 이성애자 남성 시인 브레히트가 어느 여성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시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드러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브레히트의 이 시를 받아 보고 베를라우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재확인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했다. 브레히트가 나를 원하기 때문이고, 또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일이 됐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가 되면 자신을 망가뜨릴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렇게 늘 정신을 차려야 했고 빗방울까지 두려워해야 했다면 그 사람은 행복했을까. 이 시를 읽으면 알 수 있다. 베를라우가 브레히트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러나 브레히트가 베를라우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브레히트가 베를라우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베를라우가 브레히트를 사랑한 방식과는 달랐을 것이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읽으면 이 시는 우리가 알던 그 시가 아니게 된다. 후반부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부에 상처받는 독법이다. 그것은 ‘당신을 사랑해요’와 ‘당신이 필요해요’가 다르다는 진실이 주는 상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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