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가족은 어떻게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이 비정상적인 가족인가’를 정의하는 것보다 ‘무엇이 정상적인 가족인가’를 정의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민들은 이미 하나의 가치나 형태모델로서의 ‘가족’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의존과 돌봄을 실천하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가족과 친밀성은 1인 가구의 증가, 비혼의 장기화와 함께 혈연 중심의 법적 가족을 넘어선 다양한 방식의 관계성으로 가시화되며 또한 재구성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족형태를 둘러싼 제도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들 또한 봇물 터지듯 일어났다. 부모의 자녀 체벌을 허용됐던 친권 징계권의 폐지, 신혼부부나 1인 가구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성에 기반한 주거권운동, 생활동반자법이나 동성결혼 법제화에 대한 요구, 이성부부·혈연을 넘어서 내가 지정한 사람이 보호자가 될 수 있게 해달라는 삶의 결정권에 대한 요구,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인 탈시설, 재생산권 등 가족을 둘러싼 다양한 불평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전개된 의제들은 가족을 정치화하는 흐름과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정치권과 언론은 저출생, 1인 가구 증가, 비혼 증가, 고독사 증가, 돌봄 공백 등의 문제를 마치 한국사회의 ‘새로운 위기’인 양 호명하지만, 이는 사실 ‘새로운 문제의 출현’도, ‘새로운 문제적 집단’의 등장도 아니다. 현재 사회의 ‘위기’로 호명되는 여러 현상은 누적된 불평등과 차별의 결과이며, 따라서 이 책은 이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사회를 재구성하는 질문을 시작하고자 한다.
고립, 단절, 위기라는 말이 전례 없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가족변동 속에서 발생하는 외로움과 빈곤 등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보는 신자유주의적인 시각 또한 공고하다. ‘취약가족’ ‘위기가족’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회에서 ‘위기’는 너무도 쉽게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개인의 문제로 축소된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시기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도, ‘취약함’이 ‘이상적인 시민’으로부터 벗어난 특정 인구집단의 특성으로 정의되어 그들만의 문제로 소환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취약함’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해서’ 취약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취약하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고, 연대하고, 유대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고 실천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이 책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가족문제가 공적인 영역과 분리되는 가족 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불평등과 연결된 사회적인 의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활발한 가족변동 상황은 가족구성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하는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직 많은 이에게 낯선 개념일 가족구성원은 말 그대로 ‘가족관계를 구성할 권리’를 뜻한다. 이 권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중요할까? 우선, 가족구성권의 보다 상세한 정의를 보자.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가족구성권을 “다양한 가족의 차별 해소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가족·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한다. 이는 즉, 가족과 가족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며, 가족을 구성할 권리 또한 평등하게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가족구성권이란 개념은 1948년에 채택된 유엔 세계인권선언 제16조 1항에서 처음 제시되었는데, 해당 조항은 “성년에 이른 남녀는 인종, 국적 또는 종교를 이유로 한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결혼할 권리와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했다. 이는 백인과 흑인의 결혼이 금지되었던 당대의 인종차별적 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와 맞물리면서, ‘모두의 권리’로 보장되지 않는 가족구성의 현실을 인권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조항이었다. 이후 2006년, 25개국 29명의 국제인권법 전문가들이 정교화하며 성소수자 관련 국제인권 기준을 총 29가지의 원칙으로 나열하고 기술한 요그야카르타 원칙Yogyakarta Principles 선언 또한 동성결혼이나 가족구성을 인권문제로 확대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가족을 정치화하는 가족구성권은 단순히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 관계들을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앞서 가족구성권의 정의에서 살펴보았듯 가족구성권은 근본적으로 가족을 둘러싼 여러 갈래의 복합적인 차별 해소에 대한 접근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상상해오고 권장해온 ‘가족’의 의미와 가족모델은 무엇인지,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시민’으로 가정되고 상상되는 이들의 모습과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제도가 어떻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지 등 여러 갈래의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으로서의 삶과 자격이 부여되는 데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핵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은 시민들이 제도적 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제도적 가족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보며, 시민 개인의 생애를 가능하게 하는 돌봄, 경제적인 협조, 정서적인 유대 등이 모두 이성 간의 결혼을 중심으로 한 가족단위 안에서 가능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인식을 전제한다. 나아가, 그러한 개인들만이 ‘시민’으로 상상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내가 어떤 가족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라는 개인의 삶이 판단되고 차별에 연루될 가능성이 짙어진다. 이상적인 가족형태와 이상적이지 않은 가족형태의 경계는 결혼 여부,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국적, 경제적 상황, 나이 등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서 공고해지고, 따라서 어떤 가족이 ‘이상적인 가족’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사람이 ‘이상적인 시민’인가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즉,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퀴어, 장애인, 비혼여성, 싱글맘, 빈민 등 ‘이상적이지 않은 시민’들은 곧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이들로 간주되며, 이들은 말 그대로 ‘뒤처진 존재’이자 보이지 않게 가려져야 하는 존재들로, 즉 중요하지 않은 시민으로 여겨진다.
사회에 이로운 생명과 이롭지 않은 생명을 구분하는 생명정치에 기반한 가족정치의 핵심은 불평등의 원인을 국가가 규정한 ‘비정상적인 집단’의 속성으로 만들어, 상호의존의 공동체와 상호의존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하는 사회의 역할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과 함께 최대한 방기하는 것이다. 생명정치에 기반한 가족정치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성에 대한 불인정으로도 이어지며, 이는 다시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근거’로 활용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동원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사회적인 유대와 다양한 관계에 대한 인정 요청은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권리를 현재의 제도가 단지 인정하고 존중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이에게 권리 주장이 가능해지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어야 하며, 이는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심문하는 사회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가 제시한 ‘권리를 가질 권리’는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시민과 권리를 박탈해도 된다고 구분하는 사회’에 개입하는 것이며, 사회공동체의 일원이 될 권리로부터 벗어난 존재들의 삶을 가시화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에 따라 이 책에서 말하는 가족구성권은 기존의 ‘주어진 권리’를 획득하는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가족을 매개로 강제되어온 삶의 방식, 관계의 방식과 가족을 매개로 부여하는 ‘이상적인 시민’의 자격을 해체하는 개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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