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그노즈야
방랑자
이 글을 시작하며 나는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미유 플라마리옹이 1888년 출간한 책에 수록된 유명한 목각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이 작품은 세상의 경계선에 다다른 한 방랑자가 지구의 영역 밖으로 머리를 내민 채 너무나도 조화로운 우주의 질서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매번 내 앞에 새로운 의미를 펼쳐 보이는 이 놀랍도록 은유적인 이미지에 경탄하곤 했다. 이 이미지는 지금껏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간의 모습, 즉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케치한 「비트루비아 맨」에 등장하는 정지 상태의 의기양양한 인간,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플라마리옹의 이미지에서 인간은 순례자의 지팡이를 들고 나그네의 망토와 모자를 쓴 채 움직이고 있는 방랑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표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얼굴에는 경탄과 환희, 그리고 가시적인 한계 너머 새로운 세상의 장엄함과 조화로움에 대한 감격의 표정이 떠올라 있을 것이다. 우리 시야에는 그저 그 신세계의 일부만 보이지만 방랑자의 눈에는 아마도 훨씬 많은 것이 보이리라. 선명하게 표시된 구역, 천체와 궤도, 구름과 광선. 이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고 한없이 복잡한 우주의 차원이다. 구약 성서의 에제키엘의 환영을 그린 삽화들에서 종종 천사들 옆에 함께 등장하던 원형의 기구 또한 방랑자와 우리가 처한 이해 불능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반면 방랑자의 등 뒤에는 그가 속한 세계, 즉 커다란 나무들과 몇몇 식물들로 대변되는 ‘자연’이 있고 도시의 건물들로 상징되는 ‘문화’가 있는 익숙한 세계가 보인다. “지겹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뻔하고 진부한 풍경이다. 이 목각화에서 우리는 이것이 방랑자의 오랜 여정이 끝나는 순간임을, 그리고 그보다 앞서 길을 떠난 많은 이가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세상의 끝’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 이제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
기원이 밝혀지지 않은 이 목각화의 신비는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탁월한 은유라는 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는 작다
지난 세기에 세계는 정말 많이 축소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수많은 오솔길을 지나고, 숲과 강을 건너고, 바다를 뛰어넘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세계의 유한성’에 대해 주관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세계화로 인해 실제로 이동 거리가 단축되었고, 운송 수단만 주어진다면 지구상 거의 모든 곳에 도달할 수 있게 된 현실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또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예전보다 훨씬 쉽게 얻게 되었다는 점도 원인으로 작용한다. 지금은 온라인에서 거의 모든 정보를 바로 확인하고, 누구와도 빠르게 소통할 수 있으니까.
확신컨대 우리는 지금 인간으로서 새로운 역사적 경험에 직면해 있다. 나는 궁금하다. 세계가 본질적으로 크지 않으며 우리가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네덜란드인들이 말하듯이 ‘구운 공기로 장사를 하는’ 신세대 사업가일 수도 있고, 어떤 ‘부유한 나라’의 여권을 소지한 채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날아다니며 끊임없이 이동 중인 ‘싸게 사서-비싸게 팔기’ 씨일 수도 있다. 아침은 취리히에서 저녁은 뉴욕에서 보내는 사람, 주말에는 따뜻한 섬으로 날아가 바다에 관한 꿈을 꾸면서 코카인으로 자신의 감각을 각성시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단 한 번도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 영역을 이탈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 그러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 존재조차 몰랐던 머나먼 타국의 누군가가 만든 장난감을 자신의 아이를 위해 구매한 사람일 수도 있다. 장난감은 겉으로 친근하게 보이지만 보편화되고 일반적인 형태 속에 자신의 이국성을 감추고 있다.
이렇게 작아진 세상과 관련된 새로운 경험에서 긴밀한 역할을 하는 것은 ‘트리스테 포스트 이테룸Triste post iterum’, 여행이 끝난 뒤의 슬픔, 그러니까 우리가 먼 길을 떠나 강렬한 체험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올 때 맛보는 슬픔이다. 여행이 특권이나 저주였던 시절에서 진일보하여 일종의 짜릿한 모험으로 여겨지는 오늘날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경계선에 이르렀다고, 아니면 과거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체험을 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여행 가방을 현관에 내려놓는 순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게 다인가? 바로 이것이었나? 내가 바란 게 이것이었을까?
우리는 이미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고, 두 눈으로 직접 「모나리자」를 관람했다. 우리는 수천 년에 걸쳐 창조된 완성품을 가차 없이 파괴해 버리는 시간의 경과, 그 극적인 효과를 체험하기 위해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에 올라갔다. 우리는 이집트나 튀니지의 리조트에서 모두의 입맛에 맞도록 조리된 대중화된 현지식으로 배를 불렸다. 몽골의 대초원, 인파로 가득한 인도의 도시들, 히말라야의 고원에서 내려다본 풍경…….
비록 아직은 못 본 곳이 많다 해도 팬데믹 이전까지 우리는 미처 가 보지 못한 도시, 그러니까 여행사 카탈로그에 상품으로 등록되고 우리가 ‘목적지’라고 부르는 낯선 장소로의 여행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때 세상은 우리 손안에 있었고,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인간이 세계의 유한성을 이처럼 절실하게 체감하게 된 것은 아마도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인간은 저녁마다 스마트 기기의 화면을 통해 타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100년 전에는 절대로 길에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다.
멀리서 타인들을 관찰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역할이나 가능성의 레퍼토리 또한 유한하며, 조상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가 훨씬 더 서로를 닮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조상들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총동원하여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묘사하기를 즐겼고, 그것은 과거의 여행자들을 흥분시켰다.
텔레비전 시리즈물이나 영화, 소셜 미디어 덕분에 오늘날에는 모두가 알고 있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머리가 크거나 유난히 큰 발에 다리가 한쪽만 있거나 얼굴이 가슴에 붙어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피부색이나 키 또는 일부 관습이 우리와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무수히 많은 닮은 점 속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타국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시와 국가, 그리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 또한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열망하고,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며, 자식들과 다투기도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근본적인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 것은 ‘스트리밍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덕분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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