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로
기너의 인생에 닥친 변화는 집에 떨어진 폭탄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렸다.
제일 먼저 마르셀이 사라졌다. 그녀를 항상 ‘마드모아젤’이라고 불렀지만, 기너는 12년 동안 옆방에 살면서 자신을 키워온 마르셀을 한 번도 그냥 프랑스 아가씨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르셀은 그냥 월급 받는 가정교사 이상이었다. 사실은 남이고, 겨우 두 살 때 여윈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까지도 때때로 잊게 만드는 존재였다. 기너가 ‘그거’라고 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말을 더듬거리며 한두 마디 할 때도 마르셀은 항상 알아들었다. 어떤 때는 마르셀이 아버지만큼이나 가깝다고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마르셀은 향수병이 도지거나 기너가 투정을 부릴 때면, 적어도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하는 아빠가 여기 계신 것을 기뻐하라고, 자기 부모님은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분들께 배운 모국어로 먹고살아야 하는 날 보라고 했다. 물론 자신이 어차피 이렇게 지내야 할 처지에 기너의 집에서 지내게 된 일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말도 항상 빼놓지 않았다. 시집은 안 갔지만 여기 비터이 씨 댁은 그녀에게 가족 같다고, 적어도 기너는 자기 아이인 것 같다고 했다. 마르셀은 기너가 집을 떠나 있을 때면 진짜 부모처럼 항상 그리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르셀이 친절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너는 알고 있었다.
이제 마르셀은 없다.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갔다. 기너의 아버지는 마르셀이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했고, 분명 아버지의 말은 옳았다. 아버지는 그들을 떨어트리는 일이 어떤 관계를 끊어내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다며 장군은 그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장군은 설명했다. 전쟁이다. 마르셀과 기너의 나라는 서로 싸우고 있다. 그들의 집에 프랑스 여자가 계속 살게 할 수는 없다. 언젠가 다시 평화가 온다면, 그때 마르셀도 다시 돌아와 그들이 멈췄던 삶을 이어가게 될 거다. 마르셀은 소지품도 다 가져가지 않고 상자 속에 넣어 지하실에 내려다 놓았다.
그러나 미모 고모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헝가리 사람이다. 마르셀이 떠나야 한다고 해서 왜 날 기숙학교에 보내야 하는 거지? 왜 고모가 날 맡을 수 없는 거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통제와 감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고모와 합가해도 되지 않겠냐고 기너가 호소했을 때, 아버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집에 남고 싶어서 어떤 방법이라도 찾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면, 기너도 미모 고모가 마르셀의 후임자가 될 수는 없다고 인정했을 것이다. 미모 고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떠나서 그녀는 그냥 적임자가 아니었다. 기너는 미모 고모가 정말 재미있었다. 가끔은 미망인에 마흔도 훌쩍 넘은 고모보다 열네 살 먹은 자신이 더 어른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고모와도 헤어져야 할 거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고모마저 잃을 수 있다는 자각이 그 존재를 다소 과장하고 미화시켰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사라진 젊음을 보존하려는 노력, 모든 사교 모임에서 자기만 주목받기를 바라는 소유욕, 새로운 패션 아이템과 화장품들에 기적을 바라며 보이는 소란한 관심을 두고 얼마나 재미있어 했는지 기너는 갑자기 잊어버렸다. 또 그 일종의 티파티에 대해 기너는 마르셀과 함께 얼마나 빨리 진실을 알아차렸던가. 미모 고모는 매주 목요일 오후에 무도 티파티를 열곤 했다. 장군은 아무리 간청해도 여기 참석하려 하지 않았지만, 고모는 엄마 없는 어린 질녀가 사교장에 익숙해지고 사교적 장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우고 춤을 연습하게 하려면, 그런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티파티는 사실 미모 고모가 좋아서, 본인의 새옷이나 자주 바뀌는 머리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어서, 춤을 추고 싶어서,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자신과 결혼할 신랑감을 찾기 위해서 열렸다. 그래서 이 자리에는 기너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뻘의 어른들이 대부분이었고 젊은이는 겨우 한두 명 있을까 했다. 마르셀은 티파티나 춤추는 자리에서만 어른이 되어 필요한 기본 소양을 배우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또 미용사가 머리를 잘못 잘랐다고 울고 있는 미모 고모를 보고 화를 냈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옳았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물론 삶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규율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닥친 일이 정말 큰일인지, 그냥 좀 짜증스런 일인지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전시 상황에, 전 세계에서 몇 십, 몇 만 명이 죽어가는 때에 헤어 컷이 조금 서툴게 된 것은 정말이지 별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모 고모의 그 유명한 티파티 중 한 자리에서 기너는 쿤츠 페리 대위를 알게 되었다. 대위는 기너 외의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거의 무례의 선을 넘기 직전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다소 이른 선물같이 기너는 자신이 쿤츠 페리를 사랑하고 언젠가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한편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너무 행복했다.
마르셀은 별나게도 이 페리 사건 ― 그녀의 아버지에게 한 번도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유일한 일이었다 ―을 절대 좋게 보지 않았다. 기너와 대위 사이에 뭔가 있다는 것을 고모가 눈치 챘을 땐 그녀의 이해심이 훨씬 더 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미모 고모는 첫사랑만큼 아름답고 순수한 것은 없고 결혼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그 기억은 그 무엇보다 빛나는 것으로 남게 된다고 기너에게 설명하면서 이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의 수호천사가 되어주겠노라고 기꺼이 자청했고, 또 그렇게 했다. 마르셀은 페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페리 사건은 훨씬 더 그랬다. 장군이 그녀에게 프랑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 얼마 전, 마르셀은 목요일마다 일어나는 밀회와 속삭임들을 기너의 아버지에게 모두 말해버리겠다고 그녀를 협박하고 있었다. 장군이 이 프랑스 아가씨에게 자신의 경솔한 여동생 대신 기너를 잘 살펴달라고 자주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군인 중 어느 누구도 딸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누군가 딸에게 청혼하는 일은 정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결국 마르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떠날 준비와 헤어짐이 기너의 생각을 온통 채워버렸다. 프랑스 아가씨, 미모 고모, 그다음엔 대위도 사라질 상황이라 한편 속 시원히 말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기너가 부다페스트에 머물 수 없다면, 어떻게 쿤츠 페리와 연락을 이어갈 수 있겠는가?
마르셀은 없다. 내일이 되면 미모 고모도, 페리도 없을 것이다. 마치 새가 날개에 끼고 날아가버리듯 쇼코러이 어털러 학교도 사라진다. 이것도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이후, 기너는 쇼코러이 어털러라 불리는 학교에 다녔다. 구석구석 돌 하나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유명한 구도시의 여학교로 훌륭한 자격의 사려 깊은 교사진을 갖추고 있었다. 미모 고모가 하우스 파티나 보르발러 영명축일 파티, 미클로시 축일 파티를 열 때면 교장선생님은 항상 그녀를 보내주었고, 극장이나 오페라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기권 공연이 있는 날이면 종종 장군도 공연에 따라가서 기너와 마르셀, 미모 고모가 앉아 있는 칸막이 좌석 뒤쪽에 가 앉았다. 그 순간, 그러니까 칸막이 좌석의 문이 열리고, 등과 목에 약간의 찬 공기가 닿고, 붉은 천을 씌운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고, 아버지가 그들 뒤에 앉는 바로 그 순간을 그녀는 보고 있던 연극이나 뮤지컬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기너는 뒤돌아보고 자신과 꼭 닮은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과 꼭 닮은 눈썹, 그 밑에 자신과 꼭 같은 회색 눈을 지닌 장군의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녀는 머리카락도 똑같았다. 장군의 머리는 회색이고 기너의 머리는 갈색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머리카락의 질감이나 부드러움이 같았다. 그들의 입과 치열 모양도 모두 똑같았다. 기너가 열네 살이 될 동안 둘 중 어느 누구도 대놓고 먼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사실 그들은 함께 있을 때에만 세상이 온전하다고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셀이 떠난 뒤에 기너가 지방에 있는 기숙학교로 가서 학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갑작스러운 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거의 모든 것을 허락해주던 아버지였지만, 이번에는 기너가 아무리 간청해도 귀를 막았다. 더군다나 사전에 어떤 언급도 없이 그냥 무엇을 결정했는지 통보할 뿐이었다.
만약 이해할 수 있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어떤 설명이라도 해준다면, 익숙한 세계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좀 더 쉽게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히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너가 이제 가정교사의 도움으로 집에서 교육을 받기보다는 좀 더 큰 기관에서 규칙을 익힐 때가 왔으며, 뿐만 아니라 지방은 공기가 더 좋고, 자신은 아이 돌보기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으니 훌륭한 전문가들이 기너를 돌보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그들의 저택은 두너강과 도시를 바라보는 겔리르트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산 측면에 거대한 정원이 있는 이곳보다 공기 좋은 곳이 어디 있으며, 누가 마르셀보다 더 대단한 격식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더 훌륭한 선생님들? 전에 자녀를 위해 선택했던 최고의 학교는 아버지 자신이 고른 곳이 아니었던가? 아니다. 지금 장군은 기너를 그저 멀리 보내고 싶어 할 뿐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미모 고모의 말이 옳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미모 고모는 몇 달 전부터 기너에게 말했다. “오빠가 변했어. 더 우울해하고 더 말도 없어. 근무를 한다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그러는 건 그냥 말이 안 돼. 비현실적이야. 여자가 있을 거야. 기너, 봐라, 언젠가 장군은 갑자기 결혼할 거야.” 새 부인이 기너를 키우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아버지는 자기 자식보다 낯선 여자를 더 사랑할 수도 있겠지?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