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정경_1986
일곱 살 때 나는 ‘작은’ 회사원 같았다. 하루하루가 길고 피로했다. 맡은 임무가 있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조용히 앉아 책 읽기, 글씨 베껴 쓰기, 텔레비전 보기, 심부름하기, 말하지 않기, 뛰지 않기, 울지 않기, 쓸데없이 밖에 나가지 않기, 손님이 오면 인사하기, 손님 앞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동시 암송하기, 한숨 쉬지 않기, 인사하기 인사하기 인사하기, 겸양 떨기.
아니에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인사하기.
일곱 살 때 이미 나는 지쳤다. 지나치게 예를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공자보다 더 예와 형식을 중요시해야 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건 규율과 법칙이었다. 규율과 법칙, 그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숨거나 죽은 척하기. 아이에겐 퍽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자주 들어올려지고, 불려다녔다. 얼굴이 다 닳은 이파리처럼, 일찍이 시들어 있었다. 주로 고모가 불렀다. 여름! 여름!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아무 때고 불리는 여름은 물론, 여름이 아닌 계절들까지도 긴장했으리라. 나는 녹지 않는 여름이었다. 녹을 기회가 없었다.
고모가 부른다. 달려간다.
“가서 가위 가져와.”
가위를 대령한다.
“틀렸어. 다시! 어떻게 줘야 하지?”
“두 손으로요.”
“다시.”
“한 손으로요.”
“다시!”
우물쭈물하면 침묵이 도착한다. 침묵이 시간 위로 내려앉는다. 침묵은 아이의 존재를 잠식한다.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밀려나게 한다. 침묵이 나를 휘감고, 납덩이처럼 목을 조르는 일을 자주 겪는다. 먼지처럼 가벼이, 우주를 떠도는 일. 도대체 가위란 무엇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가위를 전달할 때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할까? 세상에는 왜 이렇게 법칙이 많을까? 알 수 없는 걸 알아내야 할 때의 괴로움으로 나는 찌부러지고 있다. 그때, 시간의 균일한 흐름을 깨고 돋아난 버섯처럼 사촌언니가 등장한다. ‘날을 네 쪽으로 들어. 네가 뾰족한 쪽을 쥐고 드려야지.’ 속삭임은 은밀하다. 은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사촌언니의 사랑으로 나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위로, 위로, 떠올라 제자리를 찾는다. 사촌언니의 말대로 가위 날을 손에 쥔다. 차갑다. 찌그러진 눈깔 한 쌍 같은 가위 손잡이를 고모 쪽으로 해 건넨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두 손으로 건네며 예의를 갖춘다.
“됐어.”
고모는 가위를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아마 몇 시간 동안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고모는 늘 머리가 아프고 혼자 있고 싶어 하니까.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나는 가위 날을 쥐고야 살 수 있었다. 사촌언니가 내 손을 잡고 말한다.
“놀러가자.”
우리는 둘만의 비밀 수첩을 꺼낸다.
“어디까지 썼어?”
“다 못 썼어. 자막이 너무 빨리 지나가.”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만화영화를 기다린다. 고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되므로 속삭인다. 만화영화 속 등장인물을 맡은 성우들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 한 명도 빠짐없이 알아내는 것, 우리가 원하는 건 그뿐이다.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들의 이름을 알아내려 한다. 그러나 끝내 몇 명은 알아내지 못하고, 적지 못하고 지나칠 것이다. 주의집중을 하지 못해서, 성우들 이름이 적힌 자막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공기가 너무 무거워서. 우리가 너무 어두워서. 우리가 너무 슬퍼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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