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한국에서 ‘다문화’로 산다는 것:
상처를 말하며 서로 연결되다
/ 이향규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런 삶은 없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나 살면서 저마다 상처를 입는다. 그것을 더러는 드러내지만 묻어두는 것이 더 많다. 묻어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낫는 경우도 있으나 어떤 상처는 오래간다. 괜히 잘못 다루면 덧나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은 치유에 도움을 줄까? 비슷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면 더 큰 위로를 받을까? 위로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까?
아이들이 모였다. 사는 곳, 가정환경, 학교, 나이가 제각각이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다문화’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몽골, 중국, 일본, 필리핀, 영국, 러시아 등 부모의 출신 국가가 제각각 다르다. 조금씩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그들은 각자 속상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슷한 처지임을 확인했다. 그동안 어디에서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맞장구치고 공감했다. 그리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문화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까지
이 글은 2013년 5월 한양대학교 글로벌다문화연구원이하 ‘연구원’이 다문화 학생들과 1박 2일 동안 진행한 이야기 캠프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다. 캠프 기간에 이들은 자신이 학교에서 받은 차별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책에서 소개하는 다른 삶이야기 프로그램과 달리 이 모임은 이야기 주제가 분명했고 진행자의 질문도 미리 정했다. 형식이 다른 캠프인데도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어떻게 공감과 이해, 위로를 끌어내는지 그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2021년 4월 기준으로 한국에는 16만 명이 넘는 다문화 학생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다문화 학생은 부모가 국제결혼을 해서 부모 중 한 명이 외국인이거나 부모 둘 다 외국인인 초·중·고 학생을 말한다. 국제결혼 가정 자녀82.2퍼센트가 외국인 가정 자녀17.8퍼센트보다 훨씬 많다. 외국인 부모의 출신 국가는 베트남32.2퍼센트과 중국31.8퍼센트, 한국계 포함이 가장 많고 그다음으로는 필리핀10.0퍼센트, 일본5.2퍼센트 순이다. 그 외에 태국, 몽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인도, 러시아, 미국, 우즈베키스탄 등 매우 다양하다(〈2021년 교육기본통계〉).
현재 다문화 학생 비율은 전체 학생의 약 3퍼센트다. 아직 전체 학령인구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저출산으로 학령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에서 다문화 학생 수가 증가하는 것이라 그 비율은 계속 높아질 전망이다. 다시 말해 문화 배경이 다양한 아이들이 한 반에 같이 모여 공부하는 것은 점점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것이다.
당시 연구원은 ‘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의 요청으로 ‘청소년을 위한 다문화 감수성 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다문화 감수성 교육이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 차이와 유사성을 알아차리는 한편, 상대를 고정관념이나 편견 없이 보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소통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여기서 ‘다문화 감수성’은 다문화 상황을 수용하는 것multicultural acceptance과 문화 차이를 알아차리고 평등하게 소통하는 능력인 문화 간 감수성intercultural sensitivity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연구진은 다문화 학생들이 학교와 또래 집단 사이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직접 듣고 그 사례로 구체적인 스토리텔링 교육자료를 만들고자 했다. 당사자가 말하는 불편함을 생생하게 전해 듣고 다수자가 성찰해야 할 지점을 찾는 것이야말로 좋은 교육자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문화 학생을 1:1로 인터뷰하는 대신 또래 아이들이 둘러앉아 각자 겪은 차별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 즉, 이 모임은 다른 ‘삶이야기’ 프로그램 참가자처럼 스스로 구성한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자가 던지는 질문을 중심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 점에서 이는 삶이야기 모임이라기보다 이야기 형식을 띤 초점집단 인터뷰Focus Group Interview, FGI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초등 1반: 말로 어루만지는 위로
초등 1반 아이들은 모여 앉자마자 진행자가 순서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오늘 속상했던 경험을 다 털어놓고 쌓인 감정을 풀고 가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말하는 규칙도 없이 아이들끼리 대화를 시작했다.
진희: 누구 먼저 얘기할까?
유진: 너부터 얘기해.
진희: 4학년 때 교과서에 ‘다양한 가족을 배워봅시다’ 그거 나오잖아. 근데 선생님이 나한테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문화 가정을 발표해보렴.” 이렇게 말하는 거야. 대놓고. 그래서 그때 좀 부끄러웠어. 애들이 막 “아, 쟤……” 그러고. 눈치 없는 애들이 막 내 이름 부르고. 그때 많이 부끄러웠어.
은이: 나는 학교에서 회장 선거할 때 애들이 다문화라고 막 너 나가지 말라고 그런 적 있었어.
유진: 나는 학교에만 오면 애들이 다문화라고 놀렸어. 외국인이냐고 무시하고. 그러면 집에 가도 마음에 걸리지. 싸울 때는 내 약점을 아니까 애들이 질 것 같으면 그냥 다문화라고 해. 내가 5학년 때는 자주 울었어. 6학년 때는 잘 안 우는데…….
소영: 나는 예전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잖아. 그래서 애들이 막 일본 욕하잖아. 그럴 때마다 약간…….
유진: 둘 다 일본이야?
소영: 아빠가.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경험을 이야기했다.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고 궁금한 것은 질문했다. 이야기 순서는 자연스럽게 돌아갔고 진희와 유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다소 길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누구도 대화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
얼마 후 진행자가 개입했다. 학생들이 잘 따르는 대학생 남자 조교였다. 진행자가 생기자 대화의 흐름이 바뀌었다. 순서 없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던 이야기는 진행자의 질문에 참가자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개입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제해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제약한 측면이 있으나 적극적인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대화에서 소외되었던 다른 참가자가 발언하도록 격려하고 이끌어주었다. 그 이전까지 침묵하고 있던 일국이와 창혁이는 진행자가 질문을 던진 후에야 이야기를 했다.
진행자: 일국이는 뭐 없었어?
일국: 방금 하나 생각났어요. 3학년 때.
진행자: 지금 몇 학년이지?
일국: 6학년이요. 3학년 때 그냥 자리를 바꿨는데 새로 짝이 된 애들이 자꾸 다문화라고 왕따를 했거든요. 한 달 동안.
진행자: 애들이 다문화인지는 어떻게 알아?
일국: 학기 초에 안내장이 나가거나 그러면 옆에서 보기도 하고.
진행자: 다문화 이거 학생에게 안내장이 따로 나가? 그래서 애들이 왕따를 시켜?
일국: 한 달간. 별로 피해를 보거나 딱히 그런 건 없지만 그냥 왠지 주변이 차가운 느낌.
진행자: 그럼 그렇게 지낼 동안 친구는 어떻게 사귀었어?
일국: 혼자 다녔어요.
진행자: 혼자 다녔구나. 창혁이는 뭐 없어?
창혁: 중국에서 살다가 2학년 때 왔는데 다문화 가정이라고 무시하고.
진행자: 어떻게 했는데?
창혁: 제가 밥을 먹으면 애들이 와서 반찬을 가져가버리던지 그렇게.
진행자: 그렇게 했을 때 너는 어떻게 했어?
창혁: 그냥 보기만 했죠. 참다 참다.
진행자: 화내고 그러진 않았고?
창혁: 10월부터 그 애들을 묵사발 내주고…….
아이들이 경험한 차별은 형태가 다양했다. 아무도 곁에 오지 않거나 “왠지 주변이 차가운 느낌”을 받는 것처럼 콕 짚어 뭐가 문제라고 말하기 어려운 은근한 배제도 있고, 외국인 혹은 중국인또는 다른 출신 배경이라고 욕하거나 놀리는 언어폭력도 있고, 밥을 먹을 때 반찬을 가져가거나 아이의 물건을 함부로 망가뜨리는 직접적인 공격도 있었다. 그 대응 방식은 개인마다 달랐다. “그냥 무시한다”라며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아이가 많았지만 창혁이처럼 치고받고 싸운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자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대화가 살아났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들이 ‘자신이 겪은 차별 경험’을 넘어 타인이 겪거나 겪을 법한 부당한 일도 말하기 시작한 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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