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정말로 민주주의인가
서방세계의 선거대의제 체제를 가리켜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만큼 잘못된 일은 없다. 이 부적절한 명칭혹은 환상은 1800년경부터 사회 일반에 정착되기 시작했는데, 실은 그 전까지 선거대의제는 민주주의와 정반대의 것을 뜻한다고 인식되고 있었다. 원래 민주주의란 시민들이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통치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뜻했다. 즉 특정 안건에 대해서 혹은 공직자 임명에 대해서 직접 투표하여 결정하는 것, 스스로 비상근 공무원으로서 복무하는 것, 그리고 추첨으로 선발된 기관의회 등의 구성원예를 들면 배심원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참여의 실천들은 모두 선거대의제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서 구성된 정부는, 민주정이 아니라 ‘과두정’이라고 인식되었다. 과두정은 ‘민중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소수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 그 차이는 명백하면서도 기초적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통치하고자 한다면, 그 일이 부담스러운 일일지언정 우리 자신이 통치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를 대신할 사람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통치하게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며, 곧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래에 인용한 발언들은 1800년에 이르기까지 과거 수세기 동안 민주주의가 어떻게 인식되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인용된 인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민주주의를 선호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선거를 민주주의적 과정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헤로도토스기원전 5세기
민주주의는 가장 공평하다. 즉 법 앞에 평등하다. 공직자는 추첨으로 임명되고, 권력에는 책임이 지워지고, 제기된 모든 질문은 공개토론에 붙여진다(《역사》, 3권 80장 6절).
플라톤기원전 428-348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승리하여, 일부의 사람들은 처형되고 또 일부는 추방되고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통치권력이 동등하게 분배될 때 민주주의가 성립된다(《국가》, 8권).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추첨으로 공직을 임명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과두정치였다(《정치학》 4권, 1294a).
키케로기원전 104-43
통치권이 한 사람에게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군주제라고 부른다. 선택된 특정한 사람들에게 통치권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귀족정이라고 부른다. 통치권이 민중의 손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국가론》 1권, 41권, 42권).
엘리엇1490-1546
도시와 자치령은 모든 시민의 합의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머리를 여러 개 갖고 있는 괴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방식은 믿을 만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보유한 미덕과 지혜로써 공공선에 가장 크게 기여한 최량의 시민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일도 흔히 일어났다. 이런 통치방식을 그리스어로 ‘데모크라티아Democratia’, 라틴어로 ‘포퓰라리스 포텐티아Popularis Potentia’, 영어로 ‘평민에 의한 통치rule of the commonalty’라고 불렀다(《위정자론》).
알투시우스1557-1638
민주주의는 그 본성상 자유와 평등한 존중을 요구한다. ‘평등한 존중’이란 다음과 같은 것에 존재한다. 즉 시민들은 번갈아가며 통치하고 복종한다.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 사적 삶과 공적 삶이 교차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특정 안건에 대해서 모두가 함께 결정하고 개인은 언제나 그 결정에 따른다(《정치학》, 39, 61).
홉스1588-1679
통치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군주제는 단 한 사람이 통치권을 갖는 경우이고, 데모크라시는 민회에 통치권이 있는 경우이며, 귀족정은 (임명되었든 선출되었든 상관없이)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되는 일부 특정한 사람들로 구성된 기관이 통치권을 갖는 경우이다(《리바이어던》).
몽테스키외1689-1755
공화국에서 민중이 주권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민주주의다. … 대표자를 추첨으로 뽑는 것은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대표자를 선거로 뽑는 것은 귀족정의 방식이다(《법의 정신》, 2권 2장).
루소1712-1778
“추첨에 의한 선발방식은 본성이 민주적이다”라고 몽테스키외는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 그러나 나는 이미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상理想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선거와 추첨을 결합한다고 할 때, 군사직처럼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한 자리는 선거를 통해 임명해야 한다. 한편 추첨은 사법관 같은 경우에 적합하다. 즉 양식이 있고 정의롭고 정직하다면 충분히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경우 말이다. 그리고 잘 구성된 국가라면 이러한 자질은 모든 시민에게 있다(《사회계약론》).
시에예스1748-1836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스스로 법을 제정하고 공무원을 직접 임명한다. 우리의 계획에서는 시민들은 대체로 대리자를 직접 선발한다. 따라서 입법행위는 민주적이지 않다. 그것은 대표제가 된다.
버크1729-1797
[‘민주주의’를 묘사하면서] 모든 공무 혹은 공무 전반을 민중이 직접 스스로 처리했고, 법은 민중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공무원이 직무에 소홀한 점이 있었을 때에는 당사자에게(만) 그 책임을 물었다(○○경卿에게 쓴 편지).
메디슨1751-1836
민주주의에서 민중은 함께 모여서 직접 통치한다. 공화국에서 민중은 대표자들과 대리인들을 소집하여 통치를 위탁한다.
플라톤 시대에서 프랑스혁명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가·정치가·철학자들은 통치행위가 비밀리에 행해질 때에는 선거가 과두정을 만들어내고, 통치가 투명하게 행해질 때에는 선거가 공화정을 만들어낸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대중이 선거를 ‘민주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극히 적고, 또 대부분의 역사가와 학자들에 의해서 이 주제는 심히 호도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 변화는 18세기에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의 정치구조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았다. 군주들은 법과 관습에 의한 제약이나 혹은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다소간 자제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권력을 마음껏 행사했다. 한편 그들은 교회나 의회 같은 사회제도에 의해서도 제재를 받았는데, 이러한 기관의 구성원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하원 중 일부가 당시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법학자들은 당시의 전반적인 비민주적 통치구조 속에서 그나마 이렇게 선출된 의회를 가리켜 ‘민주적 요소’라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물론 투표권은 재산을 소유한 남성에게만 있었다. 예를 들어서, 애덤 스미스는 1762년에 행한 법학 강연에서 “고대에서와 같은 식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당시의 유럽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주제체제 내의 선거대의제는 “민주적 요소”라고 말했다. 블랙스톤은 1765년에 낸 논평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우리의 통치구조 내에 있는 민주적인 부분이 작동하는 것을 기사나 시민, 공민 선출에서 목격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발단이 되어 대의제를 ‘민주적인’ 과정으로 여기게 된 오늘날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더 나아가, ‘민주적 요소’ 그 자체로도 충분히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고 최초로 글로써 주장한 영예는 아르장송 후작에게 돌아간다1764년. 그는 심지어 고대의 ‘거짓’ 민주주의보다, 대표자들에 의한 이 일종의 ‘민주주의’가 더욱 진실된 것이고 나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짓 민주주의는 이내 무정부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다수에 의한 반란자들의 정부이며, 따라서 무도하고 법과 이성을 경멸한다. 이런 정부의 행위는 폭력적이고 의결은 난항을 겪는데, 여기서 그것의 전제적 속성이 드러난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민중은 대리인을 통해서 행동을 하며, 이들 대리인들은 선거를 통해서 권한을 부여받는다. 민중에 의해 선출된 대리인들의 임무와 그들에게 지워지는 권한이 공권력을 구성한다. 대리인들의 의무는 최대 다수 시민들의 이익을 규정하고, 시민들을 유해함으로부터 보호하면서 그들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아르장송 후작의 주장은 동시대인들에게 무시를 당했던 것 같다. 그런 주장을 하는 다른 문헌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길하고 역사적이었던 순간, 즉 1794년 2월 5일에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속에서 다시 그것이 채택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근대에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민주적’ 테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후작의 주장과, 또 그것과 얼마간 공명하는 몽테스키외의 발언을 결합시켰던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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