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내가 함께 호흡하기로
/ 윤주옥
(승편·보석) 안녕하세요. 주옥님! 먼저 구례에 내려온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어떻게 구례에 내려오게 되셨나요?
(윤주옥) 제가 구례에 온 게 14년쯤 됐더라고요. 지리산이 좋아서 온 것도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더 이상 서울에서 살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와 남편 둘 다 계속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가진 돈이 없었고요. 여러 고민을 하다가 주변에 귀농한 사람들이 “그렇게 도시 빈민처럼 살지 말고, 여기선 먹을 건 해결이 되니까 일단 내려와라” 하더라고요.
남편 고향이 전라남도여서 지리산자락 전라남도 구례로 가보자 해서 왔어요. 그때 구례에 살고 있던 지인들이 전세를 구해줬죠. 처음엔 그 집이 참 아름다운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2020년에 섬진강 수해 났던 바로 그곳이었어요. 그러고 나니 거기가 사람이 살 땅은 아니었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구례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어요.
가족이 모두 내려오게 된 거예요?
제 가족은 저와 남편, 딸아이 하나, 이렇게 3명인데, 딸아이는 그때 서울에서 2년제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저희는 11월 20일에 내려왔는데 딸아이는 학교 졸업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학교 선생님 댁에서 머물다가 12월 말에 내려왔죠.
특히 구례가 좋았던 점이 있었나요?
저는 지리산을 그렇게 많이 왔는데도 항상 일 때문이었어요. 내려오면 사람들 만나 프로그램하고 답사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일정이었죠. 지리산에 살기 시작해서 감동한 것 중 하나는 섬진강이었어요. 남편이 강을 좋아해서 남편과 함께 2019년 3월에 섬진강을 걷고 차량 답사를 했는데요. 3월에 진안을 시작으로 내려오면서 강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강의 초록이 거의 신비에 가깝더라고요. 저는 주로 산의 아름다운 장소나 개발된 자연을 봤는데 강을 보면서 이 아름다움에 내가 미칠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그 신비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건 주옥님이 그만큼 열려있다는 거겠죠? (웃음) 삶터를 지역으로 하고 변화된 점이 있나요?
제 딸아이가 서울에서 연극을 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 꿈을 가지고 내려와서 이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가 오후 다섯, 여섯 시만 되면 사라지는 거예요. ‘애가 이상하다’ 생각하던 와중에 아이가 우리를 옥상으로 초대했어요. 가보니 버려진 합판에다 집에서 보이는 지리산 풍경을 그려놨더라고요. 그 집에서 보면 지리산이 쫙 펼쳐졌었거든요. 알고 보니 저녁마다 옥상에 가서 그걸 그린 거죠. 어릴 때 아이가 미술하고 싶다고 해서 동네에 있는 작은 화실을 다니긴 했지만 그림에 손을 놓고 지냈었거든요. 그런데 구례에 내려와서 지리산과 섬진강, 들판을 보면서 그림을 다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자연을 보는 눈이 생겼던 것 같아요. 구례로 내려온 게 제 삶을 완전히 바꾼 건 아니지만 아이 삶을 바꾼 건 확실하죠. 저도 남편도 내려온 것에 대해서 정말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반전이 있어요. (웃음) 구례로 내려온 지 1년이 되고 가족끼리 지난 1년을 되돌아보자고 했어요. 당연히 너무 좋은 평가가 나올 줄 알았는데 딸아이는 내려올 때 너무 싫었다면서 울더라고요. 왜냐면 친구들은 다 서울에 있고, 전혀 모르는 곳에 가는 게 싫었는데 본인이 아무리 반대해도 부모는 갈 것이고… 거기에 반대해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고 얘길 하는 거예요.
그때 ‘어른이란 어떤 존재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 청소년을 배려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범위 안에서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우리는 아이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서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단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 후부터는 특히 청년이나 학생, 아이들을 만날 때 그 부분을 조심하는 편이에요. ‘어떻게 나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본인이 가진 생각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도록 할지’ 이런 걸 많이 고민하죠. 자식을 통해서 그걸 구체적으로 느끼게 됐어요.
제가 듣기론 ‘지리산방랑단’에게 무척이나 잘해주셨다고 들었는데요.
지리산방랑단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내가 한마디 던지면 그게 상처가 될까 부담스러웠죠. 그래서 딸아이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엄마, 세상은 굉장히 냉정해서 그분들은 엄마가 그런 고민을 한다는 걸 아는 순간 벽이 허물어질 거야” 하더라고요. 왜냐면 세상 사람들은 그런 지향을 가진 사람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니 엄마의 마음이 전달만 되면 그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요. 그래서 솔직하게 지리산방랑단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그대로 했죠. 결과는 아주 좋았어요.
지금 얘기하니까 서울에 있는 딸아이 생각이 나네요. 평소에는 거의 잊고 살아요. 내가 다른 부모랑 다르게 냉정한 거지… 생각해 보면 얘가 있다는 생각을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맞아, 내가 결이를 무척 사랑하지’ 이랬다가 또 잊어버리고…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가까이서 활동하는 아이들이 내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지리산방랑단이 활동하는 4개월 동안 그들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우리 지역에 있는 아이들, 청년들을 내 아들딸로 생각하고 싶어요.
타인에게 애정을 쏟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던 이유가 있어요?
‘지리산게더링’을 통해서 지역에 있는 청소년, 청년들을 만났고 또 다른 방식으로 지리산방랑단도 만났어요. 그들이 요즘 나에게 활력이 되고 있어요. 희망을 보는 것 같아요. 지리산은 지금까지 우리가 열심히 지켜왔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방식의 운동이 우리에게 오고 있으니 우리 자리를 비워줘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또 다른 운동이 이 안으로 들어오는 거죠.
환경운동을 오랫동안 해오셨죠. 어떤 일을 해오셨어요?
지금은 국립공원 보존 운동을 하고 있어요. 대학교 다닐 땐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하기 전엔 노동 운동을 했죠. 그러니까 아주 옛날 사람들이 걷는 그 운동의 코스를 걸었죠. 그러다가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현장 활동은 정리했는데, 그 사실이 굉장한 피해 의식과 패배 의식을 주더라고요. ‘난 회피한 거야, 도망친 거야’ 이런 마음이 심했어요.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창피하고 미안한 마음이 강했죠.
결혼한 이후에도 그때 몸 상태로는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기 어려웠어요. 그러면 무슨 운동을 하면서 살까,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소비자 운동과 환경 운동이었고, 두 가지 모두 봉사 활동으로 시작했어요. 그때 한 환경단체에서 주관한 시민강좌를 들었는데, 핵 문제, 산림·생태에 대한 문제, 쓰레기 문제 등을 다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 강좌들이 저에게 너무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그전에는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운동은 노동 운동밖에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거든요. 근데 그 강의를 듣고 내가 앞으로 운동을 한다면 숲과 자연을 보존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그러던 차에 몸이 좋아졌고, 아는 후배로부터 제안이 온 거죠. 그때 강의를 했던 교수님이 단체를 하나 만드는 데 와서 일해보지 않겠냐고요.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가슴이 뛰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좋다 하고 시작했어요.
그때가 서른세 살이었죠.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환경 운동을 시작했고 처음 했던 활동이 ‘북한산국립공원 관통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 반대운동이하 북한산 관통도로 반대운동’이었어요. 나무와 숲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일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냥 뛰어든 거죠. 제 운동은 그 이후로 환경에서 산림과 생태로, 그리고 국립공원으로 범위가 좁아진 것 같아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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