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개업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나는 툴툴거리며 집기류와 그릇들을 정리한다. 분식집 개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일류 요리사에 바카라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갖춘 고급 레스토랑도 아니고, 하다못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북한 음식점도 아닌 그냥 분식집이라니 말이다(어복쟁반이라든지 메밀냉칼국수 등을 만들어야 했다면 적어도 ‘북한’이라는 세계적 이슈에 한 발 담갔다는 위안 정도는 얻었을 것이다).
나는 내 불만을 언니가 모르지 않도록 퉁명스럽게 손을 놀린다. 그사이 언니는 달랑 네 개뿐인 테이블 중 하나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인사동에서 중국산 도자기를 샀다면 딱 그렇게 생겼을 법 싶은 하얀 호리병에서 연한 꿀물 같은 게 나온다. 잔에 술을 따를 때마다, 기분을 산란하게 하는 울금과 계피 향이 번진다. 언니가 마시는 이강주는, 어제 제 이름이 조 아무개라며 수줍게 자신을 밝힌 노인이 두고 간 것이다. 노인은 고종 황제 운운하며 여러 번 허리를 굽혔다. 설마 백 년도 더 된 술을 들고 온 건 아니겠지. 하지만 중국산 도자기일지 모른다고 의심한 그 하얀 병이 가치를 따질 수 없다는 이조백자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언니라면 그런 물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가 지금 찬장에 정리 중인 진짜 중국산 사발처럼 쓸 수 있을 테니까.
호기심을 충족해 살맛을 얻는 데 습관이 된 자들이 가게를 흘끔거리며 지나간다. 수레를 밀고 가는 계란빵 장수 아줌마, 정육점 주인, 과일 가게 아들, 건어물점 며느리…… 그중에는 흘깃거리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숫제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옆집 할머니도 있다(안면을 튼 지 오 분도 안 된 문방구 아저씨가 지나가던 할머니를 곁눈질하며 재수 황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할머니는 여느 날처럼 무료함을 달래줄, 적어도 그날 밤 자기 전까지 서너 번 곱씹을 거리는 될 일을 찾아 즐거운 모양이다. 할머니는 경계심 높거나 수줍음 많은 인물이 아니고 또 그럴 나이도 아니기에 당당히 분식집 문을 연다. 다행히 온몸을 들이밀진 않는다.
오메, 잘해놨구려. 하루아침에 식당이 됐네, 그랴.
나는 언니가 달갑잖게 여길 게 뻔하므로 웃음 없이(미소를 짓지 않는 게 내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인사한다.
예에. 내일부터 식사 가능해요, 할머니.
할머니가 지금 당장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 아직 무람없이 우리를 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작게 분노하며 식당 내부를 살핀다.
이전에 여기 있던 편의점은 장사를 잘하지 못했어. 분식점이 낫지, 암만.
네에……
언니가, 더 말을 걸다가는 입고 있는 누런 팬티를 뒤집어쓰게 되리라고 윽박지르는 듯한 위협적인 어조로 답한다. 눈치가 전혀 없진 않은지, 할머니가 들이민 상체를 조금 뒤로 뺀다. 부끄러운 과거사 한 보따리쯤이 까발려진 채 수치심에 발구르게 되리라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밀어내기 위해 한(실은 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 “감사합니다. 내일 오세요”를 싸 들고는 허둥지둥 문을 닫는다. 하지만 할머니의 호기심은 그녀의 거친 피부만큼이나 질기다. 곧 다시 가게 앞을 지나치며 술 마시는 언니를 일별하고, 또다시 지나가며 테이블보 펴는 나를 곁눈질한다.
할머니가 네 번째로 지나갈 때, 내가 불러 세운다.
떡 좀 가지고 가세요, 할머니. 개업 떡입니다.
곧 재개발이 될 줄 모르고 집을 팔아버린 사람만큼이나 내내 아쉬웠을 할머니가 마침내 흡족해한다. 이제 우리와 가까워졌다고, 다시 집을 돌려받아 재개발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착각한 자의 미소가 얼굴에 그득하다.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한다. 늘어진 피부를 잠깐이나마 팽팽하게 만든 그 늙은 욕망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는 이웃들에게 개업 떡을 골고루 나눠준다. 사람들은 그렇게 빨리 가게를 리모델링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는 일 분 만에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대신, 미리 준비를 많이 했다며 얼버무린다. 문방구와 정육점과 과일 가게와 건어물점과 맞은편 철물점까지 빼먹지 않고 인사를 한다.
마침내 철물점 이층에 있는 작은 사무실 앞에 선다. 금방이라도 황갈색 가래를 뱉으며 기침을 해댈 것 같은 철문에 ‘휴대전화기 보호필름 판매업체 델포이’라 적혀 있다. 굵은 글씨로 강조된 상호를 보며, 나는 실소한다. 설마 아폴론의 신전? 금이 간 벽과 군데군데 깨져 있는 콘크리트 계단이 무안한 듯 나를 따라 웃는다. 게다가 문손잡이에 걸린 분홍색 요구르트 배달 바구니라니(차라리 문 앞에 쌓여 있는 신문이나 잡지였다면 구질구질한 청회색 문에 어울리기라도 했을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다. 이 맥락도 없고 조화도 없는 이상한 곳에서 일하는 청년을 위해 멸치 맛국물을 내거나 달걀을 부쳐야 한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도대체가 김밥과 라면과 국수라니, 게다가 델포이라니!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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