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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딱히.
그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할머니라면 그것 역시 거짓 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 속이 켕길 거라면서.
애초에 억누르지 않은 게 문제였다. 내가 먼저 녀석에게 달려들었으니까. 다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생각이 짧았다. 돌이켜 보니 그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세뇌한 두 가지 규칙 중 하나였다.
제1규칙 거짓말은 불운을 불러온다.
제2규칙 파로스 집안과 엮이지 마라.
그래, 녀석이 날 때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내 잘못이 조금도 없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일 것이다.
보통 불안장애가 있으면 싸움을 무조건 피할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늘 그렇진 않다. 적어도 나는 안 그런다.
방어 본능이 일어나기도 한다.
뜨거운 공황이 치밀어 오르면 일단 몸 밖으로 꺼내야 한다. 때때로 가장 쉬운 방법은 개자식이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느낌을 재빨리 밖으로 쏟아 내서 순간적인 안도감을 얻는 것이다. 일단 그 느낌이 떨어져 나가기만 한다면, 내 신경을 물어뜯지만 않는다면야 아무래도 좋다.
따지고 보면 이 사달을 일으킨 원흉은 학교다. 교내 필수 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 나는 늘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신청해 왔다. 이를테면 도서실 책을 서가에 찾아 넣는 일. 하지만 이번에는 하필 신청이 아니라 배정받는 거였다. 그리고 그 배정 담당께서 내가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팔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개학 첫날이라, 겨울 방학에 땀 흘려 번 돈을 쥐고 몰려든 애들로 북새통이었다. 다들 팔꿈치로 길을 뚫고 계산대로 모여들었다. 나는 계산대 뒤에서 애들이 넘치는 기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단 것을 제공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따위 시련을 주시나이까?
오늘만 버티자고 속으로 계속 되뇌었지만,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면서 요란하게 윙윙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워패치키즈가 먼저 동났다. 갓 구운 쿠키들에 이어 스타버트츠까지 줄줄이 매진됐다.
조던 스완지라는 녀석은 레드바인스 세 통을 집어 들고 40달러를 주며 잔돈은 됐다고 했다. 그러고는 문을 나서자마자 자기처럼 무지막지하게 큰 운동선수 친구들한테 나눠 주었다.
교내 매점에서 젤리 따위를 웃돈 주고 사 가며 계산대에 지폐를 던지고 돌아서는 행위는 얼간이 짓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급한 일반화일지 모르겠지만 녀석에게는 과히 그런 분위기가 흘렀다. 하긴 부자들에게는 몸에 밴 습관일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부자 동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 집이 쭉 안정적인 중산층이었다고 해도 이 동네에서는 쭉 가난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날의 두 번째 얼간이, 드레이크 기븐스가 줄 맨 앞에 도착했다. 거스름돈을 세고 있는데 녀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기습. 그게 녀석의 주특기라는 걸 진작 떠올렸어야 했다. 드레이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이 동네에 이사 온 후로 쭉 나랑 같은 반이었는데, 툭하면 사람을 열받게 했다. 녀석은 필터가 없었다. 그 말인즉슨 보통 초등학생 때 얻게 되는 가장 노골적인 별명이 모두 녀석의 입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나는 소음과 인파를 애써 무시하고 계산에 집중했지만, 드레이크는 나를 잠자코 기다려 주지 않았다. 1달러짜리 에너지바를 들어 보이며 구겨진 20달러짜리 지폐를 현금 통에 쑤셔 넣고 말했다.
“19달러 줘.”
“잠깐만.”
나는 계산대 앞 졸리랜처 통에서 풋사과 맛만 몇 개째 골라내는 여자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자기 거스름돈을 받는 게 우선이었다.
“그냥 내가 알아서 꺼내 간다.”
드레이크가 현금 통에 손을 뻗자 나는 냉큼 뺏어 들었다.
“잠깐만. 이 계산부터 끝내고.”
졸리랜처광, 그러니까 나랑 지리와 수학 수업이 겹치는 캐시는 무언의 독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느릿 속 터지게 사탕을 골라냈고, 드레이크는 자꾸 계산대 너머로 손을 뻗어 잔돈을 집어 가려고 했다. 녀석은 내가 먼저 온 손님을 응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 말이 들리면서도 안 들리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된다면.
“내가 도와준다니까. 거스름돈 19달러라고.”
드레이크는 여전히 계산대 너머로 몸을 내밀고 내 공간을 침범하고 있었다. 녀석의 입에서 단백질 셰이크 냄새가 났다. 캐시가 드레이크를 쏘아봤지만 녀석은 무시했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한 손을 펴 들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왁자지껄한 소음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거스름돈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그러자 드레이크는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아 참, 뚱레오를 열받게 하면 안 되지.”
나는 녀석을 노려봤다.
‘뚱레오’는 꼬마 드레이크가 내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별명이었다. 그 당시 무사카얇게 썬 가지와 다진 고기를 켜켜이 놓고 맨 위에 치즈를 얹은 그리스 요리: 옮긴이와 수블라키유명한 그리스 패스트푸드. 꼬챙이에 여러 조각의 고기와 채소를 꽂아 구워 먹는 바비큐 음식이다: 옮긴이를 주식으로 한 탓에 잔뜩 불어난 뱃살은 티셔츠를 팽팽하게 늘렸다. 그때는 어울렸을지 몰라도 그리 멀리 내다본 별명은 아니었다.
드레이크는 자꾸 현금 통으로 손을 뻗었고, 캐시는 자기 계산부터 해 달라고 난리였다. 그러자 뒤에 있던 애들의 태도가 서서히 거칠어졌다.
“여기 배고파서 뒤지겠거든. 퍼니언즈 좀 먹자고!”
뒷줄에 서 있던 남자애가 소리쳤다.
“민트 사탕도!”
그 옆의 여자 친구가 거들었다.
킬킬 웃는 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은 줄이 줄어들지 않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여러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우렁우렁 울리며 관자놀이가 심장 박동처럼 두근두근했다.
왜 난 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거지? 조용하고 외딴 구석이 아니라? 왜 교내 봉사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인 거지?
드레이크가 다시 현금 통을 집어 들자 나는 확 뺏어 들었다. 다른 애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릴 주시하고 있었다.
“망할, 그냥 내가 알아서 거스름돈 챙겨 가겠다고.”
그 말이 마치 마이크가 삑 소리를 내듯이 내 머릿속을 날카롭게 울렸다.
“수학 시험 57점 받은 널 뭘 믿고?”
홧김에 내뱉은 말에 드레이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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