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피 흘리는 가장자리:
페미니즘 선언문의 필요성
/ 브리앤 파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기껏해야 지독히 지루할 뿐이고, 더구나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도 없다. 그렇기에 시민 정신을 갖추고, 책임감 있으며, 스릴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정부를 전복시키고, 금융제도를 파괴하고, 제도를 자동화하고, 남성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현 가부장제에 전쟁을 선포한 가장 위대한 선언문인 〈스컴 선언문〉SCUM Manifesto, 1967은 위와 같이 시작한다. 이 글을 쓴 밸러리 솔라나스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 ― 더 이상 남자들이 위대한 예술, 돈, 정부, 문화를 정의하지 않는 ― 을 꿈꿨을 뿐 아니라 스릴을 즐기는 생물학적 여성들이 거주하는 세상 역시 꿈꿨다 ― “우주를 통치하는 데 자신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여성들, 이 ‘사회’의 한계를 개의치 않았던 여성들, 사회가 제공해야 하는 것 그 이상을 향해 질주할 준비가 된 여성들, 지배적이고 안전하고 확신에 차 있고 불결하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독립적이고 자긍심에 차 있고 스릴을 즐기고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여성들.”
솔라나스는 시궁창의 여성들 ― “매춘부들, 다이크dyke, 레즈비언의 속어. 보통 모욕적인 의도로 쓰이는 말이다.들, 범죄자들, 살인광들” ― 을 위해, “말쑥하고 수동적이고 고분고분해서 어디서나 받아들여질 만하고 ‘교양이 있고’ 예의바르고 고귀하고 온화하고 의존적이고 겁을 먹은, 부주의하고 위험에 처해 있고, 동의를 갈구하는 대디 걸Daddy’s Girl, 아버지와 비정상적으로 가까운 여성. 무엇이든 지불하기 위해 아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모든 여성.에 부응하길 완전히 거부한 여성들을 위해 선언문을 썼다.
1967-71년 무렵은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시기였다. 더불어 페미니즘 선언문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했고, 페미니스트적 저항, 의식의 발흥과 집단적 조직화가 출현했다. 인권 운동의 탄력과 가속도 위에 세워진 1960년대 말, 페미니스트들의 폭동은 향후 10년간 지속된 페미니즘 행동주의가 나아갈 터전을 갈고 닦았다. 여성들이 분노의 당위성을 인정받던 1960년대 말 ― 결국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여성들이 진짜로 화가 났음을 인정했던 문화적 시대정신의 순간 ― 에는 예의를 갖춰 행동하고 사회적 책무를 이행하라는 문화적 압력을 여성들이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에 여성들은 씩씩거렸고, 큰 소리로 불평했고 실랑이를 벌였고 소리 질렀고 서로의 팔짱을 끼고scrum 행진했다. 초기 선언문들에서 발견되는 페미니즘은 오늘날 우리가 여러 교육 기관들, 정부, 기업 리더십을 통해 알게 되는 좀 더 우호적이고 친절하고 온순한 페미니즘과는 확연히 다른 브랜드의 특징을 드러낸다. 제2 물결 페미니즘 선언문들은 문장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부글거리는, 땀에 전, 이판사판식으로 내지르는 페미니스트의 분노에 경의를 표했다. 선언문들은 지금 봐도 그들의 언어 덕분에 불타오르고 부글부글 괴어오르기에 돌연한 신선함을 내뿜는다.
따라서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의 폭발적인 분노는 페미니즘의 파열의 정치 덕분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오늘날 여성들은 가정폭력 쉼터로 들어갈 수 있고, 연방정부가 후원하는 육아 휴가물론 종종 무급를 쓸 수 있다. 여성들은 이전 세대 여성들보다 훨씬 더 융자, 상속, 사업 소유 등과 관련된 재정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 여성학 프로그램들은 비록 감소 추세이기는 하지만,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정체성, 정치, 신체, 테크놀로지, 커뮤니케이션, 인권 등과 같은 일련의 쟁점들을 주제로 한 풍부한 강의를 제공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2019년 가을 미국에서 낙태는 여전히 합법이고비록 위험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낙태권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이전 세대보다 재생산권과 육아에서 통제권을 갖는다. 가사 노동과 육아 노동에서 양성 평등을 지향하는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었다. 페미니즘 정치와 이데올로기들은 미술관 전시와 문화 이벤트에서 점점 더 눈에 띄는 특징을 드러낸다. 성적 자유는 심지어 새로운 도전들이 출현하고 있음에도 확장되고 있다. 정부 관공서의 재직 여성의 수는 현저히 증가했다. 노동력이나 고등교육에서 여성의 숫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아주 거대한 쳇바퀴 안을 돌고 있었던 것 같고 다시 출발선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지넷 윈터슨의 주장을 실시간으로 살아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문화적 심판의 시기로 되돌아왔다. 한편으로 우리는 집단적 운동들 및 그 연대의 필요성을 더 잘 이해한다. 즉 사람들은 게임에서 다른 지분과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 아주 다른 분노의 이유와 관점들을 갖고 있는 이들과 나란히 행진한다. 우리는 이제 모든 종류의 사회적 정체성과 신체들을 대학 분과들에서 연구한다 ― 퀴어학, 종족학, 여성학, 젠더학, 미국학, 장애학, 비만학은 아카데미 안에서 더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전에는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싸움에 가담하고 있고, 가족계획연맹클리닉에 들어가는 여성들을 호위하고, 이웃과 함께 경찰의 잔인함에 대항하는 단체를 만들고, 아나키즘과 반자본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트랜스혐오 정책 및 정치와 맞서 싸우고, 정치적 사무실이나 새로운 권력의 위치들을 타진하고, 지하실에서 혁명적 예술을 만든다. 제2 물결 페미니즘 활동가들이 직면했던 억압적 조건들은 이제는 웃으며 회고해도 될 것 같은 과거사로 보이고, ‘과거의 일’이기에 행복하게 추억해도 좋을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주의는 제도화된 관행으로서 새로운 힘을 획득하는 것으로 새로운 경종을 울린다. 불가사의하리만치 친숙한 일군의 조건, 재정적 불안정, 팽팽한 젠더 관계들, 인종차별적 폭력, 만연한 호모포비아, 피해자에 대한 공개적이고 뻔뻔한 비난, 더 악화된 계급 불평등의 지배를 받는 조건이 지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우리 삶에 필요하기에 만들었다. 페미니즘 선언문은 사회적 스트레스가 엄청난 시기에 구비해야 할 필수품이다. 우리의 분노, 우리의 혼란과 내적 파열의 느낌, 우리의 운명과 질식할 것 같은 가능성들을 의미 있게 만들려면 달리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선언문의 절박함 ― 절단 면 위에 앉아 있다는 그 선명한 느낌 ― 이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았다는 느낌, 줄리언 한나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우리가 정황상 ‘피 흘리는 가장자리’에 있다는 너무나 선명한 느낌을 전달한다. 언제 쓰였건 모든 선언문은 새로움과 신선함으로 가득 차 있다. 선언문은 우리가 차라리 닫으려했던 눈들을 헤집어 열어서, 직면하지 않으려 했던 비열하고 더럽고 무시무시한 진실들을 처리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혹시라도 페미니즘 선언문 묶음을 만들 시간이 있다면, 여성들의 분노를 경축할 문서들을 수집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선언문
모순, 아이러니, 충돌이 그득한 선언문은 불안정한 지반 위에서 작동한다. 선언문이라는 장르는 새롭고 변덕스러운 것을 상상하는 몽상가들과 예술가들의 낭만적인 속성을 체제순응적인 전통들을 부수고 지나가는, 용인된 사유의 방식들을 엉망으로 만드는, 과거를 뿌리 채 뽑아버리는 미식축구 수비수의 강력한 힘과 조합한다. 선언문들은 희망과 파괴의, 사물을 비추이면서 폭력적으로 사물을 종식시키는 변형적 작업을 동시에 거행한다. 한나가 쓴 것처럼 “선언문의 매력은 놀라울 만큼 복잡하고 종종 역설적인 장르라는 데 있다. 건방지면서 진지하고, 까칠하면서 부드럽고, 논리적이면서 부조리하고, 물질적이면서 비물질적이고, 얄팍하면서 심오하다.” 이런 복잡함은 부분적으로 선언문들이 과거를 전혀 존경하지 않기에, 이전에 있었던 것에 대해 아무런 존중도 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선언문은 오직 새로운 것, 지금을 현재 시제로 원한다. 그리고 선언문은 그것을 즉시 원한다.
이런 선언문의 절박함은 종종 방향을 바꾸어 대담하게 허무주의로 직진한다. 1909년에 미래파는 새로운 세대에 의한 자신들의 전복을 기대했다: “더 어리고 더 강한 이들이 우리를 쓸모없는 초고처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일일 일어나길 원한다!” 좋은 선언문이 그랬듯 미래파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했고 다음 세대 작가들과 사상가들이 그들을 밟고 지나가리라 기대했다. 좋은 선언문은 미래의 다른 선언문에 의해 자신이 폐지될 것을 안다. 그들은 영원히 알기를 주장한 게 아니다. 그들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알기를 주장한다. 그들은 무차별 파괴하고 무차별 파괴될 것이다.
선언문은 이런 식으로 좌파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전통주의 그리고 천천히 꾸준하게 증가하는 변화와의 단절을 표지할 성마르고 긴급하고 휩쓸어버리고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유를 통해 새로운 무엇을 위한 여지를 만들어왔다. 대신에 선언문은 저자의 세계관의 뻔뻔하리만치 대담한 진지함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관객에게는 엄격히 수행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강력하고 극적인 주장을 주입한다. 선언문은 단지 퍼포먼스 아트가 아니다. 선언문의 저자는 곧 그 자신이 말한 것과 동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선언문 발화자/저자는 선언문과 나란히 태도를 바꾸고 변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선언문들은 공식적으로 출판되기보다는 종종 “발견되고”, 그렇기에 일시적인, 미간행의, 직접적인 느낌을 발산한다. 대체로 미술계에서 등장한 선언문의 핵심은 대중의 의식을 대중의 권력을 박탈할 만큼 철저히 뒤집고 전복시키려는 것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박탈당한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선언문을 읽는 것은 불에 타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 우리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환해지고 그 뒤에는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노출된 채 남겨진다. 선언문들은 전염력을 갖고 전파되는 문서, 의도적으로 독자나 청자를 불타오르게 할 메시지를 내포한 문서, 불일치나 합리적인 척하며 중언부언하는 담론에는 어떤 여지도 주지 않는 문서로 작동한다. 선언문의 저자는 우리에게 생각하는 법을 들려주고 우리가 자신들에게 동의한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거절하거나 정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상상한다. 그들이 우리를 초대해서 선언문을 읽힐 때 원하는 것은 선언문에 대한 신중한 독해나 해석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정서적인 반응을 원한다. 우리는 웃고 소리 지르고, 그게 아니면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선언문이 만들어내는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찰스 젠크스가 말했듯 “선언문 장르는 피를 요구한다.” 선언문을 읽고 그 즉시 자기 자신의 임박한 소멸의 중요성을 상상하는 것은 별난 일이 아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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