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 죽은 거냐?”
“그럴지도.”
“그런데 멀쩡히 숨 쉬고 말하고, 저렇게 주스도 마시잖아.”
“그럼 안 죽었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는데? 우리가 하는 말도 못 듣잖아.”
“그럼 죽었나 보지.”
“아니, 사람이 진지하게 묻는데……. 너 지금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지?”
“잔뜩 흥분한 누구보다는 잘 돼.”
“차라리 벽을 보고 이야기하자.”
“저기 있네, 벽.”
“그래, 정말 고맙다! 됐고, 그나저나 우리 이제 어쩌지?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
“시간 되면 선령인지 뭔지 그 아저씨 따라가야지, 뭐.”
“와! 너 정말 끝까지…… 영혼 없는 대답만 할래?”
제1장
잃어버린 영혼
아침 6시 익숙한 알람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알람은 절대 좋아하는 음악으로 설정하지 말라고 하던데, ‘나’는 전혀 상관없는 듯했다. 알람은 울린 지 십 초 만에 꺼졌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스트레칭을 했다. 간단한 동작으로 목과 어깨를 이완시킨 후, 핸드폰을 열어 명상 음악을 틀었다. 잔잔한 음악 사이로 새소리와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길게 호흡을 내뱉은 후, 바닥에 앉아 명상에 돌입했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는 분명 오늘 있을 쪽지 시험과 수행 평가가 차례로 스쳐 지나갈 것이다. 오 분여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일어나 방문을 열고 욕실로 향했다.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샤워를 시작할 것이며, 또 다른 나는 텅 빈 방 안에 홀로 남았다.
“그래요, 백 번, 아니 천 번 양보해서 스트레칭은 몸이 하는 거니까 그렇다 치자고요. 그런데 어떻게 명상을 영혼 없이 할 수 있어요?”
청바지에 후드 티를 입은 저승사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갓에 두루마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명색이 저승사자라면 검은 정장 정도는 입어 줘야 예의 아닐까? 그런데 찢어진 청바지에 후드 티라니.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후드 티는 검은색이다.
“이봐요, 저승사자!”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그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에 보랏빛이 감도는 기묘한 눈동자, 피처럼 붉은 입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주위에는 냉기가 흘렀다. 단순히 차갑다고 말할 수 없는 오싹한 한기.
“저승사자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공부 좀 한다길래 이해도 빠를 줄 알았는데. 뭐야, 전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잖아.”
생각 같아서는 모른 척 발이라도 세게 밟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 상황은 하루하루 날짜가 바뀔수록 점점 더 내 영혼을 앗아 가니까.
저승사자인지 뭔지 모를 그가 비스듬히 기댄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선령이야. 사냥할 선獮에 영혼 령靈, 한마디로 살아 있는 영혼을 사냥하는 이들이지. 사령을 데려오는 저승사자들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한다고.”
선령이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콕콕 내 미간을 찔렀다. 나는 얼음장 같은 손을 거칠게 치워 버렸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죽음이라지만, 사실 이것만큼 관념적인 것도 없었다. 지금껏 누구도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니까.
그 순간 딸깍 방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의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 들어왔다. ‘나’는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를 말렸다.
그래, 역시 백 번 천 번을 양보해 죽은 후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온다 치자. 그러나 저렇게 젖은 머리를 말리고 얼굴에 스킨과 로션을 바르는, 엄연히 살아 있는 육체에서 어떻게 달랑 영혼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영혼이 빠져나온 저 몸은 과연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나?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그렇게 영혼으로 남아 버린 나는 과연 죽은 것일까?
“저기요! 산신령인지 나무꾼인지. 대체 이게 말이 돼요? 지금 거울 앞에 앉은 애가 바로 나라고요.”
영혼으로 빠져나온 내 눈앞에서 등교 준비에 바쁜 저 아이는 로사여고 2학년 한수리, 바로 나다.
“말했잖아. 우린 죽은 자의 영혼을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아니야. 너처럼 육체에서 분리된 생생한 영혼을 데려가는 특수 임무를 맡았지.”
그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더 이상 나를 엉뚱하게 부르지 마. 난 산신령이 아니라 선령이라고!”
“아, 네네. 알겠습니다, 선령 씨. 그런데 그럼 나, 아니 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쟤라고 부르게 될 줄은……. 세상 그 누가 자기 뒷모습을 생중계로 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어떻게 살긴. 그냥 영혼 없이 사는 거지.”
“사람이 어떻게 영혼 없이 살아요!”
소리를 빽 내질렀다. 선령은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생각보다 많아.”
“…….”
“영혼 없이 사는 사람들. 너도 곧잘 말하잖아. 영혼 없는 인사, 영혼 1도 없네, 영혼이 가출했네. 뭐 그뿐인가? 영혼이 콩이나 과일이야? 뭐만 하면 영혼을 갈아 넣었대. 그렇게 쉽게 갈아 넣을 수 있는 거, 차라리 없이 살면 좀 어때?”
물론 그런 이야기들을 지주 내뱉었다. 단순한 유행어였다. 상대의 무심함을 장난스레 말하거나, 무언가를 힘들게 해냈다는 우회적 표현이기도 했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고는 하지만, 정말 영혼을 상실한 채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기막힌 일을 과연 누가 믿을까?
나는 거울 앞에 앉아 등교 준비를 하는 내 육체에게 다가갔다. 한수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벽이 막아섰다. 나는 두 주먹으로 벽을 쾅쾅 두드렸다.
“이 바보 한수리.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네 영혼이 여기 있는데 왜 받아 주지 않는 거야. 어떻게 네 영혼을 몰라볼 수 있어? 시간이 없다고!”
내가 유령 상태로 남아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육체가 자신의 영혼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대로 사흘 뒤면 나는 저 선령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나고, 한수리는 영혼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된다. 장난스럽게 내뱉었던 말이 현실이 되어 진짜 영혼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내 육체를 노려보다 선령에게 말했다.
“이 방에서 지금 당장 나가요.”
그가 ‘뭐?’ 하고 되묻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 번 더 경고했다.
“빨리 나가라고요. 수리 교복 갈아입을 시간이란 말이에요.”
“아, 미안. 그럼 나는 잠시 실례하지.”
선령이 스르르 벽을 통과해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이 배고프다. ○○이 어제 개봉한 영화 보고 싶은데. ○○이 새로 산 옷 어울려? 스스로를 삼인칭으로 부르는 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졌다. 그런데 내 입에서 수리 교복 갈아입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다니. 나는 고개를 돌려 잠옷을 벗는 육체를 바라보았다.
“야! 영혼인 내가 진짜 한수리냐, 아니면 육체만 남은 네가 진짜 한수리냐?”
정말 모르겠다. 이런 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학원에서조차 배운 적 없으니까. 제 영혼을 거부하는 육체에게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수리야, 나와서 밥 먹어.”
문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육체만 남은 한수리가 야무지게 머리를 매만지고는 방을 나갔다. 영혼 없이도 녀석은 생활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지난 사흘 동안 한수리는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하고 오 분간 명상에 잠겼으며 세안을 한 뒤 아침을 먹었다. 학교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처럼 수업에 집중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으며 쪽지 시험에 완벽하게 답을 적어 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말 내가 한수리의 영혼인지, 한수리가 영혼을 잃어버린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영혼이 있든 없든, 한수리는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니까.
“말도 안 돼. 내가 얼마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는데…….”
너무 분해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살았다면 이렇게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공부는 물론이고 그 밖의 것도 늘 열심히 하려 노력했다. 나야말로 세상 누구보다 영혼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부했는데, 영혼이 분리된 채로도 저렇듯 아무 변화가 없다니. 엄마 아빠를 걱정시키고, 한수리답지 않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영혼을 잃었음에도 너무 아무렇지 않은 수리가 서운하다 못해 야속했다. 영혼은 서랍 속 낡은 볼펜 같은 게 아닐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야말로 잡동사니 말이다.
귓가에 수리와 엄마의 웃음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좋아하지 마, 엄마, 저거 다 영혼 없는 웃음이니까.”
나는 반쯤 열린 방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창밖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하얗게 얼어 있었다. 사흘 뒤면 크리스마스고 나는 선령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난다. 육체만 남은 수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텅 빈 방에 홀로 서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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