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생존의 기억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1995년, 공식적으로 나는 재수를 하고 있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일상에서 조금씩 일탈하고 있었다. 그 무렵, 태어나 처음으로 토할 때까지 술도 마시고 담배도 배웠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방황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쳤고, 내가 아는 일탈이란 술 담배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한 친구들은 그해 모두 대학생이 되었는데 홀로 재수학원에 앉아 있자니, 같은 반 아이들은 운동장에 나가 뛰어노는데 나 혼자 벌받느라 교실에 남은 기분이었다. 해서 자주 학원을 빼먹고 대학생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재수학원에 다니던 친구가 여름에 잠깐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서초동 법원 앞에 있는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데, 일당 3만 원을 준다고 했다. 어차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우리는 6월 딱 한 달만 학원을 제대로 쉬고, 그 시간에 바짝 돈을 벌어 경포대에 다녀온 후, 7월부터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진하자고 다짐하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런 연유로 사고가 나던 날인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 지하 1층에서 친구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친구나 나나 단기로 채용된 터라, 숙련도가 요구되는 일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덕분에 우리는 유니폼을 차려입고 지하 슈퍼마켓 앞에 있는 물품보관대에서 고객들이 편하게 쇼핑할 수 있게 짐을 맡아주는 일을 했다. 별것 없었다.
‘사고 당일’이라 하면 가장 먼저 그날 백화점의 무더위가 떠오른다. 온종일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백화점 안은 찜통처럼 더웠다. 또 당일 오전에 5층인지 6층인지 식당가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가 아예 어긋나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 이야기는 그사이 친해진 동갑내기 엘리베이터 안내원이 “에스컬레이터 일은 특급 비밀이니 절대로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며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와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고, 생각보다 시답지 않은 뉴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때만 해도 ‘건물 한쪽에 문제가 생긴 게 얼마나 큰 문제일까. 고치면 되겠지’ 하고 넘겼다. 설마 그 큰 건물이 한순간에 그렇게 폭삭 주저앉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날도 더운데 에어컨도 작동되지 않으니 백화점에는 다른 날보다 손님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나는 시시때때로 물품보관소를 빠져나와 가전제품 코너에 가서, 선풍기를 쏘이는 직원 분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 결에 선풍기 바람을 쏘였다. 함께 아르바이트했던 친구는 평소에도 내가 이러는 모습을 아주 질색하는 스타일이라, 그때마다 번번이 나를 불러 도로 물품보관소에 데려다놓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당시 나와 함께 선풍기를 쐬던 사람들은 전부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고가 나기 바로 직전, 식품 코너 쪽에서 누가 갑자기 우리를 부르는 바람에 친구와 나는 함께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등 뒤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고, 동시에 바람이 무척 세게 불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아 날아가지 않으려 애썼다. 당시에 누가 우리를 왜 불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 덕분에 친구와 나는 불과 몇 초 사이에 이승과 저승을 오갔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우리가 원래 있던 물품보관소 자리는 천장과 바닥이 아주 붙어버렸다. 물품보관소 바로 옆 햄버거 가게 웬디스의 커다란 영업용 냉장고는 건물 더미에 깔려 15센티미터만 하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만약 그때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병원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건물이 무너질 때 왜 그렇게 바람이 불었는지 알게 되었다. 당시 건물 상판이 위층부터 한 층 한 층 차례로 주저앉았는데, 그 압력으로 내부의 공기가 엄청나게 회전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욕조에 받은 물에 갑자기 손을 집어넣으면 그 중심으로 물이 회오리치는 것과 같은 원리로 바람이 불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내가 있던 지하 1층 상황은 어떠했을까. 그 바람으로 사람이 빨려 들어가고 튕겨져 나오고 했다. 참고로 사고 이후 한동안 나는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승강장 안으로 지하철이 들어올 때 불어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져서.
바람이 멎자 주변은 암흑으로 변했고 그사이로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건물이 폭삭 무너져버린 것을 알았다. 친구와 나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먼 데 있지 않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둘 다 피투성이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몇 미터 앞서 걷느라 나보다 적게 다친 친구는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턱까지 닿았고, 몇 걸음 뒤에서 걷던 나는 등쪽, 그러니까 뒤통수에서 발꿈치까지 무너진 건물의 파편에 얻어맞아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 놀라서 우리 둘 다 아픈 줄도 몰랐다.
서로의 손을 잡은 우리는 얼결에 사람들이 몰려가는 쪽으로 따라갔다. 좁은 출구로 몰려든 사람들이 서로 먼저 나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친구나 나나 그때는 어려서 사람들이 밀면 밀리고 가라면 가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출구를 코앞에 두고도 드센 어른들에게 한참을 치이다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날의 기억은 훗날 세월호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어째서 먼저 살겠다고 악다구니하며 그 배를 탈출하지 않았는지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 나 역시 세월호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였는데, 그때 내 눈에도 사고 직후 먼저 나가겠다고 서로 드잡이하는 어른들의 행동이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월호 아이들도 이때 나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이맘때 아이들은 오랜 세월 공교육을 통해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섣부르게 개인 행동하지 말고, 주변 어른들의 통제에 따르고, 질서를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교육받으니까.
그렇게 겨우겨우 지상으로 올라서자 먼지로 가득 찬 꽉 막힌 도로변 보도블록 위에서 부상자를 실어 나르는 미니버스 한 대가 보였다. 친구와 나도 사람들을 따라 그 차에 탔다. 얼결에 버스에 올라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자리 아저씨 머리에 난 상처가 너무 심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별 생각 없이 찢어진 허벅지를 지혈하고 있던 손수건을 그분에게 건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꽤 어려운 결정이었다. 주변에 회색빛 먼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인데 벌어진 허벅지 상처에서 피가 퐁퐁 솟아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어디 가서 돌멩이라도 주워오고 싶은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내 분홍색 유니폼은 합성섬유였다. 찢어서 붕대로 쓰고 싶었지만, 물고 뜯고 별짓을 다 해도 찢어지지 않았다.
특별히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어떤 여자 분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나를 보고는 머리를 흔들고 울면서 덤벼들더니, 자기가 1층에 있다가 바람 때문에 잡고 있던 아이 손을 놓쳤는데 어쩌면 좋으냐며 아이가 괜찮을지 물어왔다. 평소 같으면 아마 100퍼센트 확률로 “저도 몰라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했을 텐데 그날은 무언가에 씌워도 단단히 씌웠는지 그분 손을 꼭 붙잡고, “저는 지하 1층에서 이렇게 걸어 나왔어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 꼭 찾으실 거예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사실 속으로는 ‘어른도 버티기 힘든 데서 세 살짜리 꼬마가 과연 괜찮을까’ 싶었지만, 그의 간절한 눈을 들여다보며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꽉 막힌 도로를 이리저리 돌아 겨우겨우 도착한 강남성모병원은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이미 응급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응급실 앞 복도 맨바닥까지 피투성이인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걸을 수 있는 정도인 내 차례는 과다출혈로 죽은 다음에나 올 것 같았다. 해서 나는 친구를 데리고 무작정 병원 외래동으로 가,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 분을 붙잡고 ‘저희 좀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선뜻 알겠다 하더니 자기 차에 우리를 태웠다. 차는 아주 작았고 새 차였다. 아주머니는 초보운전이었는지 10시 10분 방향으로 핸들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리고는, 눈에 띄게 손을 덜덜 떨면서 백미러로 내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학생, 괜찮아요? 정신 잃지 말아요. 병원에 곧 가요.”
그분에 내게 보여준 친절과 용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큰마음을 먹고 새로 뽑은 차의 시트에 생면부지 타인의 피로 범벅이 되었을 텐데, 그분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우리를 태워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놀랍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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