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방법대로만 하면
내용은
따라온다
내가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민주주의란 원래 구제 불능의 결함이 있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 다른 정치체제를 모두 제외한다면”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이다. 진실은 그냥 민주주의가 최악이지만, 일상의 온갖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당신이 들고 있는 이 책은 민주주의가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우리의 공존에 유해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쓴 것이다. 또 이미 검증된 반대 체제인 파시즘이 훨씬 더 나은 국가 운영 체제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즉 비용이 덜 들고 더 신속하며 더 효율적인 체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썼다. 이 책이 특별히 목표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지친 교양 계층에게 파시즘을 이해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파시즘이 더 낫다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소박한 마음에 남모를 지혜를 갖추었다고 믿는 보통사람은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민주주의 체제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에 신물이 나서 거의 자발적으로 파시즘에 눈길을 돌린다.
내가 굳이 ‘거의’라고 말하는 이유는, 파시즘이 뿌리를 내리려면 때로는 이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이념의 역사적 교체가 시작될 때마다 민주주의 국가는 파시즘을 상당히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파시즘을 불법화하는 등의 노골적이고 거친 방법으로 파시즘에 대항해 자기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다행히도 파시즘은 기다릴 줄 안다. 파시즘은 헤르페스 균과 같다.(원시적인 유기체는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는 존재다.) 다시 말해서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골수 안에서 수십 년 동안 생존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파시즘이 사라졌다고 믿게 한 뒤에야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 바이러스 같은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는데, 그것이 맨 먼저 민주주의의 면역 체계를 약화시키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신생 민주주의 국가, 특히 전쟁이나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민주국가는 파시즘에 발 빠르게 대처하겠지만, 오래된 민주국가라면 파시즘과 싸웠던 기억 대부분을 망각하고는 자신의 슬로건을 지지했던 목격자들을 이미 땅에 묻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쇠퇴하고 부패해진 나머지 자신의 원칙을 다른 정치체제와 절충하는 방안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파시즘이 재빨리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파시즘은 무기 한 번 들지 않고 전 국토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자신이 가진 도구야말로 파시즘이 자리를 잡고 마침내 승리하도록 해주는 토대라는 얘기다.
이런 역사적 순간이 오면, 우리 파시스트들은 지난 세기의 파시즘은 가져본 적도 없는 수많은 대중통제 도구를 마음대로 사용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낡아가는 민주주의 체제의 심장부에서 들고 일어나서 군사력을 대내외에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이 체제를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민주주의가 가진 도구들을 조작함으로써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도 한 나라 전체를 파시즘 국가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쇠퇴한 민주국가에서도 여전히 약간은 저항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의 언어가 모든 의사소통 영역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어떤 주제에도 잘 들어맞도록 손봐야 한다. 마치 겉면 어디에도 라벨이 없어서 아무도 그 내용을 건드리지 못하고 손에서 손으로 건네는 통조림처럼 말이다.
내용.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문제다. 그렇다, 나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그리고 우리 파시스트들 역시 적어도 처음에는 파시즘이 숨기는 내용을 민주국가에 무리하게 통용시키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단언하거나, 국익에 반하는 의견을 발언해서는 안 된다고 공공연히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을 수도 있고, 특정 상황에서는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체제가 그것을 정치적 선언으로 공공연히 표명할 수 있는 체제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독자는 이 책에서 ‘파시스트적 이념’을 정의하는 부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념 차원에서 파시즘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은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고, 너무 복잡하고 모순적이어서 시도할 가치가 없다. 그간 민주주의를 찬양해 온 세월이 너무 길고, 기념일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연합국이 거둔 성과에 너무 많은 이념적 치장이 가해져서, 이제는 누구나 참전용사 할아버지를 기억하지만 아무도 파시스트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념들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그 대신에 파시스트 방법에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 이념적 내용은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방법과 내용이 정치 분야에서 일치를 이루면, 파시스트 방법은 연금술과 같은 변환의 힘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서 이념적 편견을 버리고 일단 파시스트 방법대로 해보면, 누구라도 파시스트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포레스트 검프의 말처럼, 파시스트는 파시스트로 행동해서 파시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파시즘의 방법론을 설명하기 위한 지침서다. 특히 이 책은 언어에 대한 지침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변용하기 쉬운 문화적 토대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제도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것이 단지 단어의 지시 대상을 바꾸고 모두가 그렇게 말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라면, 굳이 제도를 전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 행동을 낳고 말을 통제하는 자가 행동을 통제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우리가 대상에 부여하는 이름과 대상에 대해 말하는 방식, 여기에서 파시즘은 그것을 다시 유행시키기 위한 도전과제를 만난다. 민주주의 지지자를 매일 단 한 명이라도 설득할 수 있다면, 우리 파시스트들은 부활할 수 있다. 그것도 위대하게.
변변치는 않지만 교육적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 이 책은 짧은 자가진단법을 부록으로 실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파시즘의 이해 정도를 파악하고, 파시즘을 추종함으로써 이룬 진전을 독자 스스로 평가해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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