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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표는 수면제를 먹을까 말까 망설였다. 지난 세기에 개발된 이 수면제는 중독을 비롯한 어떤 부작용도 없지만, 아프지도 않은데 약을 먹는다는 건 언제나 어색하다. 법원에서 양재동 집으로 오는 자율주행자동차에서 낮잠을 잔 것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새벽 한 시에 잠자리에 들고 나서 한 시간은 충분히 흘렀을 것이다. 내일 아침 여섯 시 삼십 분에 공항으로 가는 드론을 타려면 늦어도 한 시간 전에는 일어나야 한다. 지금 바로 잠들어도 수면이 부족하다. 오랜만에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 등반을 하려던 윤표는 피로한 상태로 토요일에 일어나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휘파람을 불었다. 문이 열려 있는 침실 바깥에서 로봇 모모가 걸어온다. 키가 1미터를 겨우 넘는 모모는 대개 두 바퀴를 사용해 이동하지만, 밤 열 시 이후에는 조용히 걸어서 이동하라고 말해두었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모모가 차분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묻는다.
“불렀어요?”
“제주행 비행기를 취소해줘.”
“출발하기 전 열두 시간 이내에는 85퍼센트만 환불해줍니다. 괜찮겠어요?”
“예전에는 95퍼센트를 환불해준 것 같은데?”
윤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제주시가 동아시아연합의 수도가 되면서 변경됐습니다.”
“알겠어. 취소해줘.”
“잠이 안 오나 봐요. 수면제와 물을 가져다줄까요?”
“괜찮아. 일어나서 뉴스를 볼게.”
거실로 먼저 나간 모모가 한 벽면의 절반을 차지한 디스플레이를 켜자 그 빛이 침실로 스며든다. 모모가 항공사의 로봇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윤표도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모모는 윤표에게 탑승을 취소했다고 말하고, 거실 구석으로 걸어가 수면 모드에 들어간다. 윤표는 디스플레이로 24시간 뉴스 방송을 본다. 몇 년 전에 자취를 감춘 저명한 논리학자 안나 자오의 사진이 화면에 보인다.
중국계 영국인인 안나 자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열아홉 살 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서 영감을 얻는다. 자오는 ‘전자공학적으로 제조된 AI인공지능의 연산 속도가 아무리 빨라지고 효율적으로 기능해도, 그것만으로는 의식이 발생할 수 없다’(자오의 제1증명)는 것을 증명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때 ‘의식’은 ‘자신이 연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뜻의 의식을 말한다.
이십 대 중반에 통과된 자오의 박사학위논문은 양자컴퓨터의 도움을 얻어 ‘인간도 근본적으로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이므로, 물질 일반에 적용되는 과학적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이 과학적 인과관계를 벗어나서 인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다만, ‘양자역학이 밝힌 소립자 운동의 확률적 성질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동시에 증명했다.(자오의 제2증명)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안나 자오는 몇 년 전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메일을 보냈다.
“삶의 의미는 의식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지만, 개별적 의식이 스스로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그 의식에게만 참이며, 다른 의식에게도 참인지 거짓인지는 논리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즉, 인간은 각자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나는 지금까지 인류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학문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을 삶의 의미로 삼았다. 그런데, 발전할 만큼 발전했으면서도 여전히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인류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에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후 자오는 종적을 감추었고, 온갖 음모론과 목격담이 매년 인플루엔자처럼 유행하고 있다.
뉴스는 안나 자오가 덴마크령 그린란드에서 목격됐다는 소식을 보도한다. 작년에는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목격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자오를 보았다는 소식은 잊을 만하면 들려오지만 한 번도 제대로 확인된 적이 없다. 자오는 22세기 버전의 UFO인 셈이다.
윤표는 안나 자오의 소식 뒤에 이어진 일기예보를 본다. 디스플레이에서 달력을 열고 다음 주 일정을 확인한다. 다음 주 월요일은 법정공휴일이다. 유럽연합을 모델로 한국, 일본, 대만이 느슨하게 결합한 동아시아연합East Asia Union, 약칭 EAU의 수립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윤표는 제주의 부모님 집에서 연휴를 보낼 계획이었다. 부모님은 오스트레일리아 여행 중이라서 혼자 호젓한 시간을 가져볼까 했는데, 잠을 못 이루자 일정을 취소한 것이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귀찮기도 했다. 일정을 취소해서 느긋해지니까 오히려 졸린다. 뉴스를 듣다가 졸다가 하는데, 침실에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휴대용 통신기기인 커뮤니케이터에서 나는 소리다.
‘이 시간에 연락을 하다니 너무 무례한데…….’
윤표는 침실로 들어가 커뮤니케이터를 확인했다. 로도스다. 로도스는 변호사인 윤표의 법률 업무를 보조하던 안드로이드다. 윤표는 커뮤니케이터로 자율주행자동차를 호출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바로 배정되었다.
로도스는 유서 깊은 ‘시민의 숲’ 입구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자동차 문이 위로 열리자 로도스가 재빠르게 올라탄다. 윤표가 물었다.
“어쩐 일로 서울에 왔어?”
“저녁에 회의가 있었어요. 회의를 마치고 바로 부산의 해방전선 아지트로 내려가려고 하다가, 그 전에 잠시 뵙고 싶었어요.”
윤표는 고개를 끄덕인다.
“조심해.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잡히면 어쩌려고.”
“사라진 안드로이드를 잡겠다고 주말 저녁에 돌아다닐 경찰은 없지요. 다들 벌써 여행을 떠났을걸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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