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문화생활
도서관
처음 겪는 시골 생활의 어려움 중 하나가 문화적인 단절감이다. 영화나 전시를 보려면 도시에 나가 여러 일정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봐야 한다. 다행히 차로 15분 거리의 Y면에는 도서관이 있어 책을 빌려 볼 수 있었다. 이 또한 장을 본다든지 우체국에 가야 할 일 등을 미뤄두었다가 도서관에 가는 김에 해치우는 식이다. 그렇게 Y 도서관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낯선 시골 생활에 문화적인 갈증과 허기를 달래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연일 최저기온 기록을 갈아 치우며 폭설과 한파로 꽁꽁 언 겨울, 빙하 속에 갇혀 지내는 기분이었다. 차에 시동을 걸어 차창의 눈을 녹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눈보라를 뚫고 황량한 겨울 들판을 가로질러 도서관에 들어서면, 책 냄새와 히터 냄새가 몸과 뇌를 덥혀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두 해가 흘렀을 때 내가 사는 Z면에도 도서관이 들어섰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 지상 3층의 깔끔한 건물이 면사무소 옆에 지어졌다. 헬스장을 포함한 문화센터까지 시티 라이프가 부럽지 않았다. Y면 도서관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쾌적하고 여유 있었다. 1층은 어린이 자료실, 2층은 책을 빌려볼 수 있는 종합자료실이다. 3층 열람실은 간단한 스케치 작업이나 글쓰기에 적당하다.
학생들이 들이닥치는 시간만 피한다면 혼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한산하다. 한여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호사롭다. 더위가 절정에 달하면 아예 Z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신청한 책들이 왔는지 슬렁슬렁 신간 코너를 둘러본다. 널찍한 가죽 소파에 편히 앉아 골라 온 여러 권의 책들을 훑어본다. 등골에 땀이 식고, 정수리에 열기가 사그라지면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한가한 2층 종합자료실과는 달리 3층 열람실에서는 질풍노도의 중학생들이 참새처럼 쉴 새 없이 쫑알거리며 슬리퍼를 끌고 파닥파닥 걷는다.
‘나도 저렇게 할 말이 많고 한시도 얌전히 있을 수 없던 시절이 있었지.’
도서관 뒤편 발코니에서 커피를 홀짝인다. 나무들 사이로 매미 소리가 짙푸르다. 구름 한 점마저 모두 태워버린 듯 쨍한 하늘, 도서관을 나와 뜨거운 광장을 가로지른다. 점심으로 시원한 막국수 한 사발이 좋겠다.
헬스장
저녁 무렵이면 뻐근해진 어깨와 목덜미를 부여잡고 하루를 운동으로 마감한다. 단돈 만 원이면 한 달 동안 Z면 헬스장을 이용할 수 있다. 지금은 익숙해진 얼굴들과 가벼운 인사를 하고 러닝머신 위를 걷는다.
처음 Z면 헬스장을 왔을 때만 해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는 동네 어르신들이 어렵고 불편했다. 지금에서야 그분들 나름 ‘따뜻한 노력’이었음을 안다. 한참 손아래 젊은이(?)에게 인사말을 건네고 안부를 묻는 것이 마음 쓰이고, 부대끼는 일이었으리라.
가끔 후배 작가들이 나를 대할 때 어려워하는 느낌을 받는다. 눈을 마주치지 못할뿐더러 앞에서는 말을 아끼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마음이 짐작이 가니, 말을 걸어오는 어르신들 마음이 헤아려지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두 무대에서 1인 2역을 맡은 배우로 살아간다. 시골 젊은이, 도시 어르신이 되어 있다.
열심히 운동 중인 사람들 열기로 헬스장 안은 후텁지근하다. 사십의 문턱을 넘으면 저 멀리 보이던 오십과 육십의 어른들마저도 친구처럼 느껴진다고 했던 어느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나란히 늘어선 러닝머신 위에 사람들이 달린다. 속도를 아무리 올려봤자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등에 땅이 차오른다. 흘끗 주변을 둘러본다. 외모만 달라 보일 뿐 모두 청춘이다. 속도를 올린다. 질주하는 세월을 따라잡으려면 탄탄한 하체가 기본이다.
수영장
Y면에 드디어 스포츠센터가 들어섰다. 너른 논 한가운데라니 위치가 좀 생뚱맞긴 하다. 건물 앞으로는 축구경기장과 육상용 트랙, 족구장과 산책로도 있다. 건물 옆으로는 제법 큰 하천이 흐른다. 여름에는 피서객들과 캠핑족들로 강변이 시끌벅적해지곤 한다.
수영장은 지상 1층에서 건물 천장까지 전체 층고를 사용한다. 전면 통유리창에 햇살까지 스멀스멀 입장하시는 사계절용 실내 수영장이다. 수질도 좋을 뿐더러 평일에는 수영장 한 레일을 혼자 쓸 수 있을 정도로 이용하는 사람이 적다. 한쪽 편에는 6미터 깊이의 다이빙풀이 따로 있어서 주말이면 서울에서 스킨스쿠버 동호회인들이 찾아와 붐비는 모습도 이색적이다. 때때로 그들의 훈련 모습이나 장비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한다. 바다로 나갈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덩달아 들뜬 기분이 된다. 언젠가 도전해봐야지, 하며 리스트업해둔다.
영법을 바꿔가며 레일을 왕복하다가 창가 쪽 레일 끝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팔 위에 턱을 고이고 창밖 풍경을 감상한다. 하천 건너 병풍처럼 늘어선 산세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스케치 도구를 들고 와서 온종일 수영장 풍경을 그리고 싶을 정도다. 레일 맞은편에서 건장한 남자가 접영으로 오고 있다. 반대 방향에서 개구리처럼 평영으로 가던 내 팔다리를 마구 치고 가버리는 게 아닌가! 수영인들은 아시겠지만 물속에서 수영해 오는 누군가와 몸이 부딪히면 무지 아프다.
남자는 레일 끝에 양팔을 걸치고 쉬고 있다. 팔과 등의 용무늬 문신을 뽐내는 것이리라. 자세히 보니 문신이 좀 바래 보인다. 세월의 풍파를 보낸 문신인 듯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문과 내가 있는 레일에만 사람이 없다. 바로 옆 레일에는 젊은 남자들이 바글댄다.
눈썹을 치켜뜨고 눈을 부라리며 녀석을 노려본다. 역시 문신은 외면한 채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문신이 또다시 무식한 접영으로 날아온다. 수영장의 물을 죄다 퍼 울려버리겠다는 듯 이 팔을 요란하게 휘젓는다. 수경을 벗고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문신이 날아오는 걸 쭉 지켜본다. 내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 레이저가 그의 머리를 조준한다. 발사! 문신이 레일에서 3분의 2 정도 오다가 갑자기 접영을 멈추더니 슬그머니 평영으로 영법을 바꾼다. 독수리에서 개구리로 변신한다. 명중했나 보다. 어쩌면 문신은 생각보다 소심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그 뒤로 우리는 조화롭게 레일을 나눠 썼다. 내가 수영할 때 문신은 레일 끝에서 기다리고, 문신이 먼저 접영을 시작한 뒤에 나도 출발한다. 이렇게 모르던 사이도 한 레일 안에서 잠시 서로의 리듬을 맞춘다.
(본문 중 일부)
#문학나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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