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묻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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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은 이중적 진술이다. 여기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느낌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이 문장을 과거에 대한 현재의 우위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단절에 대한 긍정이거나 과거에 대한 회고적 태도로 간주된다. 반면 현재에 대한 과거의 우위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이 문장은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거나 현재의 문학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학’은 결코 대문자로 존재하지 않으며, ‘문학’은 불변의 자기동일성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다. 나는 문학이 자기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즉 어떤 것도 본질적인 차원에서 ‘문학임’을 규정할 있는 근거일 수 없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모든 것은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문학의 민주주의이다. 엉뚱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문학의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학이 아니라 형식, 내용, 표현의 층위에서 모든 것들이 ‘문학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그 열린 가능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더불어 ‘문학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산물이다. 모든 시대는 ‘문학’을 규정하는 고유의 방법을 갖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항상 ‘영향에의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탈주선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문학’에 대한 불변의 법칙을 알지 못한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잣대에 따라 훌륭한, 좋은, 위대한 등의 수식을 붙일 수는 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을 판별할 수 있는 프로쿠루테스의 침대가 없다. 우리가 ‘문학’에 관해 합의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이 ‘언어’ 예술이라는 게 전부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 이유에서 이 질문의 과거형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순전히 역사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이라면, 그리하여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생산-소비된 문학 작품의 캐리커처caricature를 그리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는 대답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 자체를 정의내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문학’이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그 물음을 통해 과거의 문학, 혹은 현재의 문학을 비판하거나 성찰하는 작업은 실행될 수 없다. 물론 ‘문학’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나 독창적인 주장은 언제든 가능하다. 문학에 대한 상식적 설명은 백과사전이나 학습용 참고서를 들춰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설명들이 ‘문학’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거의 없다. 작가들, 문학 작품의 창작자들은 이러한 개념적 이해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들 역시 그 상식적 설명을 참조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그 상식을 추종하거나 재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조한다. 위대한 작품들은 이미-항상 우리가 ‘문학’이라는 기호로 지시하고 상상 속에서 동일시하는 어떤 규범적 요소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생산되었다. 이러한 규범의 부정은 ‘실험’ ‘충격’ ‘위반’ 등으로 개념화되었는데, 이러한 부정은 실상 문학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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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이중적 진술을 순전한 역사적인 관심과는 다른 층위에서 전유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실상 사람들은 이 질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이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듯하다. 하지만 이 벗어남은 역사학이 아니라 지리학의 문제이다. 우리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과거의 순간을 확인하는 것보다 지금의 상황을 돌파하거나 탈출할 수 있는 출구를 찾는 일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순전히 오늘의 문학을 비판하기 위해 찬란했던 과거의 문학을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전유하려는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과거를 전유하여 현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을 도덕적 존재라고 가정하면서 도덕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존재들이다. 많은 경우, 그들 역시 자신들이 비판하려는 현재의 문학을 떠받치는 제도의 일부이거나 그러한 비판 대상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과거를 요술 주문처럼 불러들이길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른바 ‘문단’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문학에서 소외된 존재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그들의 ‘비판’은 대개 소외의 산물이기 쉽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좋은 옛날 것이 아니라 나쁜 새로운 것에서 시작하라.”라는 브레히트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낯선/낯익은 질문은 그것이 새로운 문학, 또는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사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20세기의 문학은 현실, 즉 정신분석이 ‘상징계’라고 부르는 세계/질서와의 불화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해왔다. 장르에 따라 이 불화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구체화되었지만, 지난 시대의 문학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거리두기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물론 이때의 ‘현실’이란 객관적이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기에 의해, 또는 작품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해를 피하는 방법일 것이다. 20세기의 비평은 문학에서 질병의 징후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를테면 타자, 광기, 에로티시즘 등이 문학의, 특히 비평의 중요한 관심사였던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질병의 징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자. 타자, 광기, 에로티시즘 등에 천착한 문학이 드러내는 것은 이들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문학 자체의 질병이 아니라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세계의 질병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상식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정상적 세계의 비非정상을, 상식적 세계의 몰沒상식을 드러내는 셈이다. 많은 독자들, 특히 비정상의 정상성과 몰상식의 상식성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문학은 쉽게 외면받고, 심지어 점잖지 못한 변태적 취향으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그 낙인을 통해 그들이 외면하는 것은 이 세계의 비非정상성과 몰沒상식성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적 의도로 책을 쓴 사람들 중에서, 그리고 물론 광인狂人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작가로 불릴 수 있다.”라는 한 철학자의 날카로운 충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싸우지 않을 때에도 투쟁이고 저항이다. 그것은 투쟁과 저항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투쟁이고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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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문학을 ‘주관’과 동일한 것이라고 오해한다. 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조차 문학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나 경험을, 또는 주관적인 감정과 정서를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라고 이해하는 것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문학이 경험이나 체험, 또는 감정이나 정서와 관계없다는 말이 아니다. 문학은 그것들에 크게 의지한다. 하지만 경험이나 체험이 바탕이 된다는 말과 경험이나 체험 자체를 언어로 표현한다는 말은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자신을 도덕적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곧 도덕적 인간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문학을 단순히 주관의 언어화 정도로 이해할 때, 문학의 최고점은 잘 쓴 개인적인 기록 이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개인 기록에 집착해 온 것일까? 문학을 쓰고 읽는 일이 노출증-관음증으로 설명되는 현상일까? 문학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도달하는 곳이 작가 개인의 이력이나 생각이 아닌 것처럼, 문학은 작가 개인의 기록 이상이다.
(본문 중 일부)
#문학나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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