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남일동 제일약국 건물이 철거되었습니다.
약국이 있던 1층만 보면 세월의 흔적을 느끼기 어려웠지만 고개를 들면 붉은 벽돌이 떨어져 나간 흔적과 금이 가고 깨진 자리가 선명히 보이는 3층짜리 조그마한 건물이었습니다. 남일동 초입에 있는 탓에 재개발 재건축 논의가 불거질 때마다 가장 먼저 철거 대상에 오르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매번 일이 흐지부지되면서 남일동을 대표하는 구닥다리 건물이 된지 오래였습니다.
나는 아침 아홉 시가 되기 전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중에 철거 작업을 시작한다는 예고가 있었고 주변 도로의 차량 통행은 이미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근처에 도서관이 위치한 탓인지 내가 도착했을 땐 널찍하게 가림막을 치는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가림막이 너무 높게 쳐지면 건물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씩 더 현장 쪽으로 다가서게 됐습니다.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물러나세요.
작업복과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다가와 경고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서는 척했지만 그 사람들이 가고 나면 다시금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창과 문이 다 뜯겨져 나간 건물은 구멍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람이 심한 날이어서 언뜻 보면 직사각형 건물이 아니고 납작한 천 조각이 이리저리 나부끼는 듯했습니다. 바람이 건물을 관통할 때마다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가 말다가 했습니다.
금방 끝납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서 모서리 한쪽만 부수면 금방 주저앉아요.
오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포클레인 기사에게 지시를 내리고, 전화를 받고, 현장 안을 들락거리던 남자는 무슨 일인가 하고 주변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곤 보란 듯이 포클레인 기사를 향해 손짓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건물의 1층 내부가 바로 들여다보였습니다. 텅 빈 창고 같은 그곳에 여전히 눈에 익은 물건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접수대 상판과 자그마한 선반, 유리병을 수거하던 플라스틱 상자와 흙 묻은 화분, 세 명이 앉으면 몹시 비좁았던 의자 같은 것들이 보일 때마다 그곳을 지키던 중년 약사의 모습이 떠올랐고 다시금 주해와 수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안타까움과 미안함, 후회와 죄책감 따위의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이라 할 만한 것들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이상할 지경이었습니다.
마침내 이곳이 사라지는구나.
오히려 그곳에 서 있는 동안 내가 느낀 건 그런 실감이었고, 오늘 정말 그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심이었습니다.
삑삑, 소리를 내며 포클레인 한 대가 건물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호스를 쥔 두 사람이 멀찌감치 서서 물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건물을 때린 물줄기가 사방으로 튀고, 물이 닿은 건물 외벽의 색이 점점 짙어졌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굵은 물줄기와 뒤섞여 건물의 형체가 휘어지고 구부러지면서 흘러내리는 듯했습니다.
죽자 사자 하고 달려들 땐 되지도 않더니만 이번엔 될라나 모르겠네.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뭔 일이래요. 버스도 다니고 저 앞에 젊은 사람들이 가게도 하나 냈잖아요. 이냥저냥 지내겠다 싶더니만.
그런 말 말아요. 언제 해도 해야 하는 일인데 지금이라도 시작하니 얼마나 다행이요. 진작 했으면 벌써 여기도 싹 바뀌고도 남았지.
나는 건물 쪽으로 접근하는 포클레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곁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일동에 사는 사람들인지, 떠난 사람들인지, 투자니 투기니 하는 소리에 이끌려 온 외지 사람들인지 궁금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건물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포클레인이 천천히 집게발을 치켜들었습니다. 집게가 건물의 뒤쪽 모서리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건물 외벽에서 시멘트 조각들이 부서져 내렸습니다. 포클레인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 후엔 집게발을 들어 본격적으로 모서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벽에 커다란 구멍이 나고 크고 작은 철근들이 계속 뜯겨져 나왔습니다.
그걸 보는 내 마음의 한 부분이 싸해졌습니다. 사정없이 건물을 흔들어대는 포클레인과 뼈대만 남은 몰골로 끝까지 버티려고 하는 건물의 힘겨루기를 눈으로 보는 그 순간에서야 이 모든 일이 실감이 났던 것입니다. 놀이기구를 타고 높이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하강할 때처럼 가슴속에 선득한 바람이 거듭 쏟아져 들어오고 또 들어왔습니다.
잠시 후 어디선가 한 남자가 나타났고, 가림막을 뚫고 현장으로 진입하려는 그 남자 탓에 작업이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현장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뛰어왔고 작업자들이 막무가내인 남자를 만류하는 모습이 보이다가 말다가 했습니다. 소란이 금방 끝나겠지 생각했지만 점심시간이 지나고서도 작업은 재개되지 않았습니다.
작업은 오후 두 시가 지나서야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사이 현장을 지켜보는 사람은 줄어서 얼마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고 그냥 가려고 했지만 현장 근처를 서성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오던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거기, 위험해요! 물러나세요, 물러나요! 사고 나면 책임 못 집니다. 거기, 더 물러나세요!
작업자 몇 사람이 경고했고 멀리 포클레인이 다시금 집게발을 치켜드는 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참 만에 껍질이 벗겨지듯 건물의 외벽이 기다랗게 부서져 내렸습니다. 그게 신호였습니다. 마침내 3층짜리 건물 전체가 뒤쪽으로 넘어지듯 무너진 것입니다. 발아래를 뒤흔드는 굉음이 아니었다면 시멘트와 벽돌, 철근으로 쌓아 올린 건물이 아니라 비스킷으로 만든 장난감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자욱하게 먼지가 피어오르고 솟구치는 먼지구름 너머로 남일동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남일동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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