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라말이 사라졌다
‘혼용’이냐 ‘전용’이냐, 문자 전쟁의 시작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두 차례의 양요에서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서양 군대를 물리쳤다는 자신감으로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는 경고문을 내걸며 백성들로 하여금 양이를 배척하도록 했다.
그러나 1876년, 조선은 굳게 닫았던 문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열게 된다. 일본은 1853년 자국을 개국시킨 미국 페리흑선의 함포외교를 그대로 흉내 내어 조선의 문을 열어젖혔다. 조선은 오랫동안 하국으로 인식해오던 섬나라 오랑캐의 협박에 굴복했고, 만국공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근대적 국제 질서와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었다.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
주시경이 태어난 것은 1876년 11월 7일음력. 서세동점과 일본의 조선 도발이 본격화한 격변의 시대였다. 아버지 주학원과 어머니 연안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주시경은 황해도 봉산군 무릉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888년 열세 살에 큰아버지 주학만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이주했다. 만일 이 일이 없었다면 주시경은 평범한 농사꾼이나 시골 선비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큰아버지는 남대문시장에서 해륙물산 객주업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덕분에 주시경은 상인과 중인들이 공부하는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좀더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배우고 싶었다. 마침 인근에 이희종이란 진사가 양반 자제들을 가르치는 글방이 있었다. 주시경은 그 글방에서 흘러나오는 글 읽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채 주변을 기웃거리기를 수십 일 동안 반복했다. 주시경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이희종이 연유를 묻자,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중바닥 서당에 다니는 주시경이라 하는데요, 선생님같이 훌륭한 분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맹랑한 답변에 호기심이 생긴 이희종은 나이와 집안 등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범상치 않은 총명함을 간파하고서는, 주시경이 자신의 글방에 기거하면서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장안 명문대가의 자제들이 다니는 곳이었기에, 주시경에게 ‘혹시라도 누가 신분을 묻거든 자신의 친구 평산 주아무개의 아들이라 대답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이희종의 당부는 엄연한 신분 차별의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었지만, 주시경은 크게 개의치 않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시경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서당 공부는 유교 경전, 즉 한문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먼저 한문 한 줄을 읽고 나서 우리말로 풀이했는데, 우리말 설명을 들어야 비로소 글자와 문장의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날마다 한자와 한자어와 한문을 반복해서 익히는 일을 되풀이해야 했다. 다른 학동은 아무도 이런 식의 학습에 의문을 품지 않았으나, 주시경에게는 머릿속을 스치는 섬광 같은 생각이 있었다.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 말을 적는 글자가 한자처럼 어렵고 거북해서야 어느 겨를에 학문을 터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언문으로 우리말을 적는다면, 들이는 노력은 적고 얻는 것은 클 것이다.’
서당에서 가르치는 것은 유학이었다. 유학은 고유문자가 없던 고대에 한자와 함께 우리 땅에 들어와 뿌리내렸다. 유학의 생각과 사상은 모두 공맹에게서 나왔으며 ‘공자 왈 맹자 왈’은 교육의 지표였다. 송나라 때 성립된 주자 성리학은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왔다.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였고,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지식인의 삶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세상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배우지만, 비범한 사람은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찾아 익히는 법이다. 한문 학습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주시경은 열아홉 살에 배재학당에 들어갔고, 세계지리, 세계의 정치제도, 산수, 물리, 영어 등의 신학문을 배우면서 국문 연구에 뛰어들었다.김윤경 편, 『주시경 선생 전기』, 한글학회, 1960.
전통 학문과 신학문을 두루 섭렵한 범상치 않은 청년 주시경의 도전은 훗날 조선어학회의 바탕이자 근간이 된다. 우리말에 대한 그의 열정과 탐구가 어떻게 조선어학회로 이어졌는지, 그 구체적인 사연은 뒤에서 알아보기로 하고, 먼저 이처럼 한자와 한문이 주도했던 시대에 언문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찾아갔는지부터 살펴보자.
지식인들의 이중 언어생활
주시경의 깨달음은 분명 남다른 것이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에는 이미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1443년 12월이었다. 그때까지 조선인들이 써온 문자는 중국의 한자였다. 말을 할 때는 조선어를 사용해도 글을 쓸 때는 한자로 썼다. 조선어를 단지 한자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한문, 즉 중국어를 썼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우리말을 글로 적으려면 한자로, ‘我愛你=我나 愛사랑해 你너’라고 써야 했다.
말과 글의 불일치는 불편하고 답답한 것이었다. 한자 학습은 어릴 때 일찍 시작해야 했고,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그나마 어느 정도 한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자를 안다고 해서 한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외국어를 공부하다 보면, 모르는 단어는 없는데 문장이 해석되지 않는 난감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문도 마찬가지였다. 한문에 통달하려면 장기에 걸쳐 깊은 공부가 필요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한문을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지식인 대접을 받았다. 한문을 척척 쓰는 사대부의 언어생활은 곧 언문 불일치의 삶이었다.
‘이두’는 한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적는 표기법이다. 한자를 우리말 어순으로 쓰거나 한문에 우리말의 특징인 토를 다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설총이 ‘이두를 집대성했다’는 이야기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중구난방인 이두 표기를 정비하기 위해 철자법을 제정한 것이다. ‘구결’은 한문을 읽기 쉽게 읽는 순서를 알려주는 표시를 하고, 우리말 토를 달아놓은 것이다. 이렇듯 한자 사용과 한문 읽기의 어려움, 말과 글의 불일치로 인한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천 년 넘게 고투했지만, 뾰족한 해법을 찾을 수 없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어에 맞는, 조선어를 알맞게 표기할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종이 바로 그런 문자, 즉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 새 글자를 창제하여, 신분 고하를 떠나 지식과 정보, 학문을 공유하도록 한 데서 세종의 민본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견고한 신분제를 단숨에 흔들 수는 없었지만,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혁명적 사건이었다.
훈민정음은 근대화 이후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 잡은 민주・주권・평등의 정신을 두루 품고 태어난 꿈의 문자이자 혁명의 문자였다. 만일 새 문자의 창제자가 임금이 아니었다면 쉽게 보급되고 실용화될 수 있었을까? 반포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대부로부터 언문으로 천시되었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지만, 그럼에도 차츰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훈민정음의 우수성 덕분이었고, 또한 자신의 발명품을 널리 알리고자 한 세종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불경』 『유경』 등 한문 서책들을 훈민정음으로 펴내는 언해 사업을 활발히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에도 훈민정음을 추가했다. 세종 때는 이과에 제한적으로 시행하면서 뜻은 통하지 못하더라도 자모를 합해 글자를 쓸 수 있으면 뽑으라 했고『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12월 26일 기미 3번째 기사. 세조 때는 이를 문과에도 적용했다. 『세조실록』 20권, 세조 6년 9월 17일 경인 2번째 기사. 입사를 희망하는 과거 응시자들이 훈민정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일부 지식인들도 훈민정음의 가치에 주목했다.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을 훈민정음으로 창작하고, 정철은 한글 가사 「관동별곡」 「성산별곡」「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짓고, 허균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썼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한문은 타국의 언어’라 단언했다. 그는 ‘언문으로 써야 우리 노래를 곧이곧대로 옮길 수 있고, 우리 노래의 참맛을 살려낼 수 있다’면서 송강이 언문으로 쓴 글을 극찬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다. 여염집 골목길에서 나무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에야디야 하며 서로 주고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 하여도 그 진가를 따진다면, 학사學士 대부大夫들의 이른바 시부詩賦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는 없다...
자고로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다만 이 세 편뿐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세 편에 대해 논한다면, 「후미인곡」이 더욱 뛰어나다. 「관동별곡」과 「전미인곡」은 오히려 한문 어구를 빌려서 그 빛을 꾸미었기 때문이다.”김선기, 「서포 김만중의 우리말 시가 옹호론」, 『한국언어문학』 43, 한국언어문학회, 1999.
시간이 흐를수록 언문은 영향력을 넓혀갔다. 오늘날 문맹률이 2퍼센트 정도에 그친다는 점과 비교하면 언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18세기 중엽 언문 소설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등장하고 목판으로 찍은 방각본이 유행할 정도로 언문 소설의 독자층이 형성되었다.김슬옹,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 역락, 2012, 306~307쪽. 지식인들은 글을 쓸 때는 한문으로 썼지만, 추사 김정희처럼 가족과 아내에게 편지를 쓸 때는 언문으로 쓰기도 했다. 언문으로 입말을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왕실 여성들은 언문으로 편지를 주고받았고, 정조나 선조 등도 언문 편지를 남겼다.김슬옹,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 역락, 2012, 309~346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말과 글이 다른 지식인들의 ‘이중 언어생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문 사용은 근대까지도 지속되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라는 안중근 의사의 글이나 ‘대장부가 집을 떠나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윤봉길 의사의 절창도 한문으로 쓰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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