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이면 엄마는 친정 나들이 가듯 들뜬 모습으로 ‘원풍모임’에 갔다. 어느 날 배달된 엄마의 이름이 새겨진 ‘민주화운동 명예회복인증서’가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렸다. 국가를 상대로 피해 보상소송을 진행 중이라고도 했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집단해고된 것은 알지만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머리띠를 두르고 경찰차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엄마가 새삼 낯설었다.
웅덩이
부엌 아궁이 옆에 작은 웅덩이가 있었어. 쌀바가지처럼 오목한 웅덩이는 장마철이면 수시로 물을 퍼내야 했는데, 바짝 마른 겨울에도 어디서 흘러드는지 솟아나는지 조금씩 물이 고였지. 커다란 돌을 올려두었지만 수시로 검불들이 날아들어 부지깽이로 긁어내야 했어. 빗소리가 커지면 바가지 속도도 빨라졌어. 부엌에는 콩기름으로 닦아 반들반들 윤이 나는 가마솥이 걸려 있고 작은 찬장을 열면 투박한 주발 몇 개와 간장종지 같은 것이 엎어져 있었지. 선반에는 두루미 주둥이 같은 입을 짚을 말아 틀어막은 식초병과 소금 단지가 놓여 있었어. 야산에서 갈퀴로 긁어모아 온 마른 솔잎과 삭 정이 같은 땔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한 귀퉁이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었지. 새벽마다 엄마는 양동이를 이고 어두운 언덕 너머서 물을 길어다 항아리를 채운 다음 밥을 지었어. 설거지를 한 물은 소 여물통에 부었어. 단 한 방울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지.
어느 날 서울살이를 접고 귀향한 아버지가 물동이를 이고 언덕을 오르내리는 할머니와 엄마를 보다 못해 지하수를 파겠다고 기술자를 불렀어. 그러나 며칠에 걸쳐 몇 군데나 마당을 팠지만 바위만한 돌덩이만 나오고 물 맥이 안 잡히는 거야. 기술자가 가버린 후 초등학교 2학년짜리 남동생이 두레박줄을 타고 내려가 봤는데 물줄기는커녕 서늘하고 차가운 돌덩이만 잡힌다고 했던가.
쟁기 한번 부려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허탈하고 속상한 표정으로 마당에 널린 돌을 리어카로 실어 나르며 주름이 더 굵어졌지. 정작 우물길은 부엌 안의 그 웅덩이인데 엉뚱한 곳만 파헤친 건 아니었을까. 늘 헛도는 인생처럼. 돌아가며 아궁이에 불을 때던 고모 언니 나 여동생들이 모두 떠나고도 오랜 뒤에야 부엌의 지반을 높여 입식으로 바뀌었는데, 웅덩이의 물길은 어느 하천을 향해 길을 달리했을지.
엄마가 평생 살다 간 그 집에 〈전설의 고향〉 세트장으로 써도 될 만한 공간이 아직 있다는 건 기념비적인 일일 거야. 큰 항아리를 묻고 나무판자를 발판으로 걸쳐둔 아슬아슬한 뒷간 말이야. 여름이면 살찐 구더기가 고물고물 문 밖까지 기어 나오고 구덩이가 다 차서 퍼내고 나면 똥물이 튈까 봐 엉덩이를 쳐들어가면서 뒤를 봐야 했잖아. 화장지로 쓰던 질소비료 포대 속지의 누렇고 거친 느낌, 그나마 보드라운 풀을 비벼 사용하던 밑닦이가 한껏 발전한 게 비료포대 종이였고 차츰 헌책 종이를 네모로 반듯하게 잘라서 실에 꿰어두는 것으로 진화했지. 밤중에 급하면 허드렛물을 흘려보내는 수채 앞에 쪼그려 앉거나 방문 밖의 요강을 이용했지만 큰 걸 봐야 할 때가 고역이었어. 헛간 두엄더미에서 뭔가 튀어나오거나 엉덩이 아래서 빨간 손이 쑥 올라올 것만 같아서 달빛이 휘황하면 뒷간 앞 대추나무 그림자에 놀라고, 깜깜할 땐 제 발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
애들을 데리고 엄마 집에 가는 날이면 늘 그 때문에 애를 먹었지. 우리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어. 엄마는 여든이 되도록 거기 항아리가 차오르면 뒷간 뒤편에 세워둔 자루 긴 똥바가지로 퍼냈지. 살가운 사위들도 그 일은 거들지 못하더군. 오로지 엄마의 몫이었지.
먼 길 가는 엄마에게 그 말을 못 했어.
엄마, 다음 생에는 똥바가지는 잡지 마시라고.
너희는 뭐라고 말했니?
스무 살 엄마와 만나다
“엄마가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것은 알지만 저런 모습까진…….”
이십대 아이들은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영상화면 속에서 앳된 모습의 엄마가 경찰에게 질질 끌려가며 울부짖고 있다.
강원도 인제 만해마을에 모인 서른한 명의 청년과 여섯 명 엄마들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렸다. 민족시인 한용운의 얼이 깃든 곳이지만, 한때 전두환이 은거했던 백담사도 지척이다. 정의와 불의의 상징이 겹치는 곳에 70년대 ‘공순이’의 2세들이 모였다.
대학 입학을 앞둔 아이, 3개월 뒤면 입대하는 대학생, 갓 취업한 사회초년생, 인터넷신문 기자, 사회복지사, 스포츠센터 강사……. 외양이나 성격은 물론 직업도 다채로웠다. “엄마에게 등 떠밀려서” “엄마의 젊은 날이 궁금해서”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어” 주말의 많은 것들을 뒤로했다. 어렸을 때 엄마를 따라 ‘원풍노조 모임’이라는 데 한두 번은 갔지만 대부분 낯설었다. 데면데면한 청춘들은 버스 안에서 인사를 나눈 후 옆자리 짝을 번갈아 소개하며 서로를 익혔다. 함께 밥을 먹고 만해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서먹함이 가시고 조금은 편해졌다. 뜨거운 물 컵에 믹스커피 한 봉지를 털어 들고 강당에 둘러앉았다. 엄마의 이십대와 마주하는 시간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엄마는 친정 나들이 가듯 들뜬 모습으로 ‘원풍모임’에 갔다. 어느 날 배달된 엄마의 이름이 새겨진 ‘민주화운동 명예회복인증서’가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렸다. 국가를 상대로 피해 보상소송을 진행 중이라고도 했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집단해고된 것은 알지만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머리띠를 두르고 경찰차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엄마가 새삼 낯설었다.
화면에서 여러 사람의 증언이 이어졌다.
“원풍노조는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지요. 원풍노동자들을 떠올리면 자랑스럽습니다.”
고 김근태 의원이 말했다.
“원풍노조원들이 광주항쟁 때 희생자들을 위한 거금의 성금을 보내주어 요긴하게 썼어요, 그 엄혹한 시절에…….”
지금 엄마 나이쯤 되어 보이는 광주 아주머니가 말끝을 흐렸다. 이어서 같은 시대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와 일간신문 논설위원도 말을 보탰다. 모두 원풍노동자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감사하다고 했다. ‘자랑스러운 노동자’ 엄마가 화면 속에서 계속 무언가 외치는데 구호인지 비명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기억대로 해마다 ‘그날’이면 우리는 전국 각지에서 한 곳으로 모였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노조가 깨지고 해고된 후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30년 전에는 몸을 돌려 아기 젖을 물리는가 하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꼬마들을 붙잡아 즉석 놀이방을 꾸려야 했다. 그 꼬마들이 청년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영상 속에서 줄무늬 티셔츠에 커트 머리 이옥순 총무가 스칠 때 설핏 다정이에게 눈길이 갔다. 다정이는 엄마를 바로 알아봤을까. 노조활동에 헌신적이던 이옥순 총무는 늦게 결혼해서 딸 둘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다정이는 엄마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엄마의 젊은 날을 바라보는 아이들도 우리 못지않게 고단해 보였다. 엄마의 권유와 성화에 참석은 했지만 대부분 당장 내일이 답답한 청춘들이었다. 거듭 취업에 실패하고서 방문 걸고 나오지 않아 바람 좀 쐬라고 떠밀어 보냈다는 엄마 얘기도 들었던 터다. 모임의 취지에 공감하여 참여했든 떠밀려서 왔든 거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영상을 볼 때는 자못 숙연한 표정이었다.
엄마의 ‘그날’을 돌아본 아이들은 몇 조로 나누어 이야기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좀 지나자 가라앉은 분위기가 가시고 명절날 모인 사촌들처럼 편하게 떠들었다. …… 엄마는 스무 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공장 노동을 했는데 나는 용돈 타령만 한 것 같다. 아직도 엄마는 힘들게 돈을 버는데 취업이 막막하다. 짜증 덜 부리고 설거지라도 해야겠다. 배곯는 시대는 아니라 해도 우리도 힘들다. 등록금 고지서를 받은 선택한 학과는 애초의 꿈과 멀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간 직장도 불안하다. 독립하고 싶은데 월급이 너무 적다. 결혼은커녕 연애할 여유도 없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 학점 때문에 전전긍긍, 직장도 경쟁터인데 여기 분위기는 다르다. 이런 모임은 처음이다…….
강당에 다시 모였을 때 의젓한 한 청년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겠다며 마이크를 잡았다.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 조직부장을 지낸 이필남 선배의 아들이다. 계속 모임을 꾸려가기로 했고 임원을 뽑았다 했다. 회장, 부회장, 총무가 앞에 나와 인사를 하는데, 딸 혜인이가 총무다. 밤을 꼬박 새우며 이야기하고 손뼉 치며 놀더니 아이들은 어느새 친구, 누나, 언니, 형이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북엇국으로 해장을 하고 모두 백담사로 향했다. 길이 얼어 차량이 통제된 7킬로미터 길을 걸어 백담사 입구에 도착하니 하얗게 눈 덮인 계곡에 조각공원처럼 즐비한 돌탑들이 보였다. 다들 무엇을 간절히 기원했을까. 잽싸게 돌을 찾아든 아이들을 따라 나도 얼음밭에서 돌을 집어 소망 하나를 가만히 얹었다. 하얗게 얼어 있는 백담사 길을 걸으며 하루 사이에 정다워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네 새끼 내 새끼 할 것 없이 보기만 해도 좋았다. 아이들의 머리 위에 흰 눈이 사각사각 얹혔다.
원풍노조 강제해체 30주년을 앞둔 2012년 2월 만해마을에 모인 원풍노조원들 아이들 속의 딸 혜인은 내가 노조를 알고 연대투쟁을 하다 감방에 갇힌 스무 살 딱 그 나이였다. 나의 시간과 딸의 시간은 이어지는 걸까. 엄마와 나의 시간은? 반세기를 거슬러 사라지고 이어지는 시간을 돌아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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