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성님
우리는 그이를 성님이라 불렀다. 형님도 아니고 언니도 아니고 성님이라 부른 것은 우리가 그이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말이 아니었을까. 성님이라 칭하며 올려주고 우리는 아랫사람이 되어 너그러움을 강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누리는 것은 성님이 김치를 담갔다고 하면
“놀러 갈까요?”
해서 거절할 수도 없게 성님의 치마폭을 마구 늘인 것이었고, 우리는 그만큼 영악했다. 투정과 응석과 떼와 애교를 섞어가며 옴짝달싹 못하게 올려놓고 우리가 한 행동은 자못 버릇이 없었다.
“성님 떡국 맛있게 하더라.”
그러면 어김없이 좁은 집에 우리를 불러 모았다. 다들 학교에 서 오는 자기 자식들까지 아파트 동 호수 일러 오게 했다. 떡국뿐이랴. 주말에 오는 남편을 위해 꽂아둔 것까지 털어 먹고 아수라장으로 만든 집을 물러 나오는 시간은 다들 자기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우리에게 베푼 것들은 성님 자신의 위로였을까? 어쨌거나 성님의 삶은 신산했다. 아들 보려고 낳은 자녀가 넷이었고 소원은 이뤘는데 살림이 어려웠다.
소문을 들으니 바깥양반이 노름을 한다고 했다. 공무원인데 섬으로 돌며 무료함을 화투로 달랬던지 습관이 되었고 그게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주말에 가족이 모여 화기애애하기보다는 싸움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어느 날 우리 몇은 성님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적금 타서 애들 납부금 주기로 했네. 탄 돈 가져왔냐니까 되레 억지소리 안 하는감. 꼭 그런담 마시. 돈 잃고 나면 와서 나 잡고 애들 볶고 날더러 이제는 서방질했다고까지 하네.”
그런데 성님의 머리 모양이 이상했다. 어제까지의 그 머리가 아니었다.
“머리가 왜 그래요?”
“듣다못해 내가 가위 들었네. 자고로 그런 짓 하는 년은 머리를 잘라 가두는 것이라고. 내 머리 자르라고.”
“그래서 형부가 이렇게 해놨어요?”
“내가 바짓가랑이 아래서 잘랐네. 몹쓸 년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함께 울었다. 같이 간 이가
“가발을 쓰려면 그렇게 자르면 안 되잖아. 여기까지 자르면 어떻게 해.”
하고 울어 가발에도 어디쯤은 머리가 있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며칠 뒤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기도 모임에 성님이 보였다.
“성님 이쁘다. 파마 잘 나왔네. 물까지 들였구만. 어디서 했어요?”
누군가 묻는 말에 성님이 말했다.
“섬의 애들 아빠한테 가서 했네.”
“섬도 파마 잘하네.”
머리띠까지 단정하게 한 가발은 그 전 머리보다 한결 예쁘긴 했다. 사실을 아는 몇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다.
성님이 매번 맞고 싸우고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젊은 사람도 못 쓰는 비싼 화장품을 남편이 사줬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젊은 것들이 놀렸다.
“나도 뺨 한 대 맞고 화장품 받고 싶다. 정말!”
선물 공세는 분란이 있고 난 다음 남편이 사과의 의미로 했다. 놀음으로 그보다 몇 배 몽창 날리고 달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 반복의 연속이었다.
복잡한 성님네 집을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우리는 차츰 성님네 집에 마구 쳐들어가는 것을 자제했다.
가을바람이 부는 어느 토요일이었다. 성님이 보퉁이 한 개를 안고 아이들과 있는 놀이터를 지나쳤다.
“어디 가? 성님!”
우리는 여전히 반가웠다.
“목포 가네.”
“왜요?”
“주의보 내렸으니 여까지 왔다가는 못 들어간다고 해서 옷 가져다주러 가네.”
“아들 막둥이 안 데려가시고?”
“혼자 오라는구만. 에이즈*가 창궐하니 본처가 대접받네. 목포 여관으로 가.”
*1981년 6월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보고로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가 알려진 뒤, 국내에서는 1985년에 최초로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인이 발생했다. 이 이야기의 시점도 1986~1987년경이다.
가을, 누구든 부르면 달려가 아픔을 들어올려주고 어루만져주던 성님이 생각난다.
(본문 중 일부)
#문학나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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