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미리보기
플래시포워드
플래시포워드Flash-forward는 영화나 소설이 진행되는 도중에 미래의 한 장면을 중간에 끼워넣는 장치다. 〈플래시포워드〉라는 미국 TV드라마도 있었다. 드라마에서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기절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기의 미래 모습을 잠깐동안 보게 된다. 미래를 잠깐 보고 깨어난 사람들은 미래의 불행을 피하려,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코로나19 재난은 플래시포워드다. 우리에게 미래 세계를 잠깐 보여준 것이다. ‘잠깐’이라는 표현은 코로나 백신이 머지않아 개발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어쨌건 코로나19 재난은 ‘미래에 재난이 어떻게 일어나고, 재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강요받고,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과학자들이 미래 세계에 대하여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온실가스가 쌓여서 생기는 기후재난과, 인공지능으로 인한 사회재난이다. 그런데 꽤 많은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기후재난과 사회재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인, 기후변화는 인정하지만 재난은 없을 것이라 보는 정치인, 재난이 닥치겠지만 아직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정치인들이 많다. 기후변화와 그로 인해 닥칠 재난을 인정하는 정치인 가운데서도,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걱정해 기존 경제구조를 바꾸려 시도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인공지능을 대하는 학자들은 어떨까? 대부분은 적어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공지능이 기존 일자리를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역사적으로 기술혁명이 일자리를 늘려왔으니, 인공지능혁명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인공지능이 중심이 된 4차 산업혁명을 부정하는 학자도 일부 있다. 2차 산업혁명에 속하는 철도 건설이 시작되었을 때, 철도가 놓이는 곳에는 전에 없던 마을이 생겼다. 원래부터 마을이 있었다면 대단히 번성했다. 공장이 생기고, 사람들이 모이고, 도시가 커지면서, 경제가 성장했다. 그런데 인공지능혁명은 경제를 부흥시키지도 않고 생산성을 높이고 있지도 않으니 기술혁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인공지능혁명에 대비해 지금부터 세 경제체제, 새 분배제도를 찾아야 한다는 외침은 아직 그 목소리가 작다. 정치인들과 학자들이 기후재난과 사회재난에 대해 회의하는 사이, 코로나19 재난이 닥쳤다. 그리고는 미래를 잠깐 보여주었다.
기후재난 미리보기
코로나19가 미리보기라면, 미리보기의 내용은 무엇인가? 코로나19는 전 세계 모든 정부가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는 위험을 무릅쓰고 경제를 돌릴 것인지, 굶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경제를 봉쇄할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한국은 코로나19의 요구 앞에서 거의 유일하게 예외적 상황을 만들어낸 국가가 되었다. 감염병이 유행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다. 백신vaccine을 만드는 것, 검역quarantine하는 것, 거리를 두는 것distancing이다. 백신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백신이 없으면 검역을 한다. 검역은 확진자를 차단하는 것이다. 검역을 하려면 검사를 해서 확진자를 찾고, 확진자 주변 사람들을 찾아내서 다시 검사를 해야 한다. 검역에 실패하면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다. 거리두기는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상호작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누가 감염자인지 모르니 모든 사람과 접촉을 금한다. 감염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오직 이것 하나다. 경제봉쇄나 2인 이상 접촉금지명령 등은 극단적인 거리두기다. 한국은 검역에 성공해, 극단적인 거리두기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한국을 뺀 다른 나라들은 검역에 실패했다. 그래서 ‘병에 걸려 죽을 위험’과 ‘굶어 죽을 위험’ 가운데 선택할 것을 강요받았다. 스웨덴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정부는 굶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경제봉쇄를 택했다.
앞으로 기후위기 같은 치명적인 대규모 재난이 발생하면 전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경제를 멈추는 선택을 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미리보기다. 도넛 경제학으로 이를 설명해보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는 인간은 도넛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도넛에는 바깥 테두리와 안쪽 테두리가 있다. 안쪽 테두리에 못 미치는 영역은 ‘부족함 영역’이다. 예를 들어 충분한 양의 물과 식량이 없어 죽음을 맞는 영역이다. 인류는 경제를 성장시켜 부족함 영역을 벗어나 도넛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도넛의 바깥 테두리를 벗어나면 ‘과잉의 영역’이다. 지나친 경제성장은 기후위기 같은 재난을 가져온다.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 사람은 도넛 안쪽 테두리와 바깥 테두리 사이, 도넛 위에 있어야 한다. 안전하고 정의로운 세계다.
케이트 레이워스는 현재 인류가 바깥 테두리를 넘어서려는 것을 경고했다. 인간은 바깥 테두리를 넘어서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코로나19 재난이 바깥 테두리를 넘어서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해주었다.
코로나19 재난은 도넛을 한 입 베어문 것과 같다. 경제활동에서 생태적 한계라는 바깥 테두리가 사라지자,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활동이라는 안쪽 테두리와 거의 달라붙게 되었다. 이제는 한 발짝 바깥으로 가면 병에 걸려 죽고, 한 발짝 안쪽으로 가면 굶어 죽게 되었다. 선택을 강요받은 상황에서 전 세계 정부들은 경제활동 봉쇄를 선택해 안쪽 테두리로 발을 디뎠다.
재난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다. 어느 날 갑자기 기후재난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기후재난은 대규모 홍수와 극심한 가뭄, 해수면 상승으로 도시와 경작지 감소, 식량 부족, 전염병 유행, 대규모 난민 발생 등의 모습을 띌 것이다. 기후재난의 영향은 모든 분야에서 나타날 것이다. 과학자들은 남극 빙하가 다 녹으면 해수면이 10~60m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고 내다본다. 정말 바다가 60m 올라온다면, 서울에서는 관악구와 도봉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물에 잠긴다. 평당 1억 원씩 하던 땅도 맥없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전 세계 정부는 코로나19 재난 때처럼, 기후재난이 닥쳐도 도넛의 안쪽으로 발을 디디는 선택을 할 것이다. 바깥으로 발을 디디면 인류 전체가 멸망할 것이니, 인류의 일부가 죽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 기후재난이 일어나면 탄소 배출을 멈추는 선택을 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기후재난의 경우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잠복기는 2주일이다. 즉 2주일 동안 봉쇄하고 다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후재난은 다르다. 탄소 배출을 멈춘다고 이미 공기중에 뿜어놓은 온실가스가 줄어들지 않는다. 공기 중 온실가스를 줄이려면 아주 오랫동안 탄소 배출을 멈춰야 한다. 탄소 배출이 멈춘 순간부터 인류는 탄소 없이 생필품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 사이에는 필수품이 부족한 채로 있어야 한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더라도 어쩔 수 없다. 탄소를 더 배출하면 지구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재난 때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서고, 음식을 얻으려 푸드 뱅크 앞에 줄을 섰던 모습은, 그나마 낭만적인 장면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어느 날 닥친 기후재난 앞에서 탄소 배출을 갑자기 중단시키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 1℃ 이내로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이내에 탄소 배출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한 나라는, 독일 등 한두 국가뿐이다. 지금처럼 탄소를 배출하면서 10년을 보내면, 그렇게 기후재난을 맞으면, 탄소 배출을 멈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게 된다. 정말 각 나라 정부는 국토가 물에 빠르게 잠기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허겁지겁 탄소 배출을 전면 금지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이는 생태학에서 나오는 ‘독초의 비유’를 보면 이해가 쉽다. 너른 정원에 독초가 한 포기 자리 잡았다. 독초는 매일 두 배로 늘어난다. 정원의 주인은 게으름을 부리면서 정원의 절반이 독초로 채워지면 독초를 뽑기로 결정하였다. 이 주인에게 독초를 뽑을 수 있는 날은 며칠이나 남아 있을까? 단 하루다. 우리는 지구 멸망까지 단 하루가 남았을 때, 재난을 막는 행동을 하기로 겨우 합의하게 될지 모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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