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조지 3세1760~1820년 재위와 그의 아들 윌리엄 4세1830~ 1837년 재위의 즉위 사이 짧은 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면모는 크게 바뀌었다. 몇 백 년 동안 개방경지 경작되어 오거나 공동 목초지로 방치되어 있던 땅들에 울타리가 둘러쳐졌다. 작은 마을은 사람들이 붐비는 도시로 성장해 갔고, 늘어선 굴뚝은 오래된 뾰족탑들을 왜소하게 만들었다. 큰길이 만나기 시작했다. 대니얼 디포1660~1731 시대에 여행자들의 점잖은 자세를 무너뜨리던 저 고약한 교통로보다 더 평탄하고 더 단단하고 더 넓었다. 북해와 아일랜드해, 그리고 머시 강, 우즈 강, 트렌트 강, 세번 강, 템스 강, 포스 강, 클라이드 강처럼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강들은 잔잔한 운하망으로 한데 연결되었다. 북부에는 최초로 새 기관차가 달릴 철로가 깔렸고, 증기선들이 강어귀와 해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비슷한 변화가 사회구조에도 나타났다.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남에 따라 어린이와 젊은이의 비율도 크게 높아졌다. 새로운 지역사회의 성장으로 인구의 중심은 남부와 동부에서 북부와 중부로 이동했다. 기업심이 강한 스코틀랜드인들이 이주 행렬의 선두에 섰는데, 그 행렬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기술은 없지만 강건한 아일랜드인들도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는데, 이런 움직임이 잉글랜드인들의 건강과 생활방식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남녀들이 무리지어 함께 살면서 생계비를 벌게 되었으나,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이나 이웃 집단이 아니라 공장의 노동력을 구성하는 단위들이었다. 작업은 점점 더 전문화되었다. 새로운 형식의 기술이 발전했고 다소 낡은 기술은 자취를 감추었다. 노동은 더 유동적이 되었으며, 기회의 한복판에 뛰어들 수 있거나 기꺼이 뛰어들려는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원료 자원이 개발되고 새로운 시장이 열렸으며, 새로운 거래 방법이 고안되었다. 자본의 규모와 유동성도 증가했다. 통화는 금본위金本位로 이루어졌고 은행 제도가 도입되었다. 수많은 낡은 특권과 독점이 사라지고 기업 활동의 법적 장애물들은 제거되었다. 이런저런 사안에서 국가의 역할은 점점 더 줄어들었고, 개인과 임의단체가 점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혁신과 진보의 관념이 전통적인 규제들을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기보다 앞날을 내다보기 시작했으며, 자연과 사회생활에 관한 생각도 변했다.
이 같은 일련의 변화를 ‘산업혁명’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지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하다. 그 변화들은 ‘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지적인 것이기도 했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급작스러운 변화를 의미하는데, 사실 경제 과정의 특징은 아니다. 흔히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인간관계 시스템은 1760년보다 훨씬 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1830년보다 훨씬 나중에 최고조로 발전했다. 혁명이라는 단어에는 지속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간과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역사가들이 사용해 왔고 일상어에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뭔가 그것을 대체할 용어를 제시하는 것이 어쩌면 현학적으로 보일 것 같다.
산업혁명 시기 사회사의 두드러진 특징, 무엇보다도 그 시대를 이전 시대와 구별시켜 주는 현상은 인구의 급속한 성장이다. 장례식과 세례식의 횟수에 근거한 조심스러운 추계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합친 인구는 1700년에 약 550만 명, 1750년에는 약 650만 명이었다. 최초로 인구조사가 시행된 1801년에는 대략 900만 명이었고, 1831년에는 1,400만 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18세기 후반에 인구는 40퍼센트 가량 증가했고, 19세기의 처음 30년 동안 5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영국’Great Britain의 경우 그 수치는 1801년에 대략 1,100만 명이며, 1831년에는 1,600만 명에 이른다.
인구 성장은 출생률에서 모종의 현저한 변화가 일어난 데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18세기의 처음 40년 동안, 인구 1천 명당 출생자 수가 얼마간 증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농업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집에서 기숙하는 대신 스스로 가정을 꾸리는 경향이 있었고, 공업 부분에서 도제徒弟 시스템의 쇠퇴 역시 조혼과 가족 확대를 낳았다. 그러나 1740년부터 1830년까지 출생률은 눈에 띌 만큼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0년을 단위로 볼 때 그 수치가 37.7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하거나 36.6퍼센트 이하로 하락한 10년은 없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기간 전체를 통틀어 출산율은 높았지만, 그래도 안정적이라 할 만했다.
인구 증가가 다른 나라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10년을 단위로 보면, 매 10년마다 선남선녀들이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가는 배에 올랐고, 기근 시기에 그 작은 흐름은 큰 물결이 되었다. 하지만 1840년대의 마지막 5년 동안 쏟아져 들어온 아일랜드인 이민과 같은 급류는 없었다. 다른 한편, 18세기 동안 아마도 100만 명 정도가 주로 식민지에서 살 길을 찾으려고 영국을 떠나 해외로 나갔을 것이다. 그중에는 북아메리카의 메릴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보터니 만으로 이송된 죄수 5만 명도 있었다. 또 유럽 대륙으로 건너간 수많은 수공업 장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법을 어기고 자신들의 전문 지식과 숙련 기술을 유럽에 전파했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것이 그들의 조국에 불이익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영국은 인구 수용실이 아니라 바다 건너의 새로운 사회들을 위한 양육장 구실을 했다.
인구 증가를 이끈 것은 사망률의 하락이었다. 18세기의 처음 40년 동안, 값싼 진gin에 대한 과도한 탐닉, 간간이 중단되면서 이어진 기근과 질병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갔다. 그러나 1740년부터 1820년 사이에 사망률은 거의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1740년까지의 10년 동안 어림잡아 35.8퍼센트였던 사망률은 1821년까지의 10년 동안에는 21.1퍼센트로 떨어졌다.
여러 요인이 사망 건수의 감소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 무렵 감자나 순무 같은 뿌리채소가 재배되기 시작하여 겨울철에 더 많은 가축을 사육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사시사철 신선한 육류 공급이 가능해졌다. 질 낮은 곡물을 밀로 대체하고 야채 소비가 늘어남으로써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졌다. 비누와 값싼 면내의가 보급됨에 따라 사람들의 청결 수준이 높아지고 전염의 위험성도 줄어들었다. 목재 대신 벽돌을 사용하여 벽을 세우고 짚 대신 슬레이트나 돌을 사용하여 오두막집의 지붕을 올림으로써 해충이 감소했다. 또한 몸에 해로운 여러 가내공업 제조 공정을 제거한 것은 가내노동자 집 안을 더 쾌적하게 만들었다. 더 큰 도시에는 도로가 포장되고 배수 시설이 갖추어지고 수돗물도 공급되었다. 의약과 외과 수술 지식이 발전하고 병원과 약국도 늘어났다. 또한 쓰레기 처리와 적절한 시신 매장 같은 일에 더 큰 관심이 기울여졌다.
믿을 만한 통계가 없기 때문에, 인구 중 어느 세대가 이러한 개선으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입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에드워드 기번1739~1794은 자서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모가 사망하기도 전에 갓난아기가 죽는 일은 가혹해 보일 수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일정한 수의 신생아들 중에서 아홉 살이 되기 전에, 즉 심신心身의 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꽤 많은 아이가 목숨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헤프게 인명을 낭비하거나 온당치 않게 기교를 부리는 대자연을 비난하지 않겠으나, 이 불행한 일이 내가 자라던 유년기에 비해 곱절로 불어났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몹시 허약한 체질이었고 죽지 않고 잘 자라날지 너무 불안했기에, 신중한 아버지는 내 동생들이 세례 받을 때마다 ‘에드워드’라는 내 세례명을 불렀다. 그러면 장남이 죽을 경우에도 이렇게 아버지가 부른 이름이 가족 안에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은 1792~1793년에 쓴 것이다. 그때는 기번이 태어났을 때보다 유아의 생명이 헤프게 스러지는 일이 약간 적었을 것이고, 또 만일 그랬다면 인구 중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더 높았을 것이다. 이 점은 초창기 공장의 노동력 구성을 살펴볼 때 유념해야 하는 문제이다.
영국의 인구 증가는 상품 생산 역시 급속히 증가하고 있을 때에 일어났고, 이러한 동시성은 성급한 일반화를 낳았다. 어떤 저자들은 산업의 성장이 인구 증가를 낳았다고 추론해 냈다. 이게 사실이라면, 산업의 성장은 출생률앞서 살펴보았듯이 출생률은 여전히 안정적이었다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망률을 통해서 영향력을 발휘했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개선된 생활양식 중 일부는 분명히 산업 발전 덕분이었지만, 그것이 사망률 감소에 주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영국만이 아니라 성격상 산업혁명 같은 것이 전혀 발생하지 않은 서유럽과 북유럽 다른 나라 대부분에서도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저자들은 앞의 인과관계를 거꾸로 놓고 인구 성장이 상품 수요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산업 팽창을 자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구 증가가 반드시 공업 제품들에 대한 유효수요의 확대를 의미하지 않으며, 또 해당 국가에서 공업 제품들의 생산 증대를 의미하지도 않는다만일 그런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18세기 아일랜드에서, 그리고 19세기 이집트와 인도, 중국에서 급속한 경제 발전이 일어나리라고 내다봐야 할 것이다. 인구 증가는 차라리 모든 사람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린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1798년에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마음을 억누르던 것은 생계 수단에 대한 인구의 압력이라는 유령이었다. 그것은 망상이 아니었다. 다만 맬서스가 가정한 것보다 직접적인 압력이 덜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 철도가 없었고 대평원 개척이 없었고 증기선이 없었다면, 영국은 가혹한 경험을 통해 ‘두 개의 손에는 하나의 입이 딸려 있으므로’with every pair of hands there is a mouth 모든 인구 팽창은 반드시 소비 증가와 이에 따른 생산 증가를 가져온다는 견해가 오류임을 배웠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18세기와 그 이후에, 인구 증가와 나란히 다른 생산 요인들이 증가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국민국민 대부분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수 있었다.
경지 면적이 증가했다. 늪과 습지에서 물을 빼내는 일, 오래 묵어 있던 거친 공동 목초지흔히 황무지라고 불렀다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전환시키는 일, 그리고 곡물과 가축을 더 많이 기르기 위해 토지에 울타리를 치는 일 등에 상당한 관심이 기울여졌다. 이러한 사태 진전을 목격한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 명예혁명 이후 모든 전쟁에서 획득된 영토보다 더 쓸모 있는 영토가 개인들의 희생을 통해 제국에 보태졌다”고 썼다. 몇 가지 새로운 곡물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순무는 기르던 가축의 규모를 늘릴 수 있게 했고, 북부에서 대중 음식이 되고 있던 감자는 토지를 꽤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농업과 농민의 변화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이전까지 경제활동 네트워크의 바깥에 있던 토지가 그 안으로 끌려 들어와 선용善用되었다는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날에도 토지 경계선이 이동하고 있는 모습을 산 중턱에 올라서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자본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생필품을 충당하고도 남을 만큼 소득을 얻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저축할 여력도 커지고 있었다. 1688년의 정치적 해결에 뒤따른 안정된 정치적·사회적 상황은 더 먼 지평선을 바라보도록 사람들을 북돋웠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시간선호’는 축적에 유리했다. 계급 구조도 축적에 유리했다. 더 많은 저축은 공정성에 대한 근대적 관념에 더 가깝게 접근해 있는 사회에서가 아니라 부의 분배가 불균등한 사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1688년 그레고리 킹1648~1721에서 1812년 패트릭 커훈1745~1820에 이르기까지, 통계학자들의 추계는 여러 사회계급의 소득에서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국채National Debt를 비롯한 새로운 제도의 출현은 이전 세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공채public debt는 윌리엄 3세가 벌인 전쟁이 불러온 긴급 상황의 산물이었다. 공채는 꾸준히 증가하여 1815년에는 8억6천1백만 파운드라는 액수에 이르렀다거의 전적으로 잇따른 전쟁의 결과였다. 이 모두를 영국인들이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1776년에 아마도 그중에 4분의 1 또는 그 이상이 네덜란드인의 수중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영국과 전쟁에 연루된 1781년 이후, 영국에서 공채의 대부분을 보유한 이들은 귀족, 향신鄕紳, 법률가, 은퇴 상인, 유복한 계급의 과부와 미혼 여성이었다. (헨리 파넬 경의 추계에 따르면) 1815년에 연합왕국United Kingdom 국민의 화폐 소득 가운데 아마도 11분의 1가량이, 1827년에는 12분의 1가량이 빈민을 포함한 납세자들로부터 징수되어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채 보유자들에게 이전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축적이 저절로 자본재capital goods의 창출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는 저축을 하겠다는 의사뿐 아니라 저축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도 커졌다. 18세기 초, 토지귀족landlord들은 저축 자금을 자신의 영지領地를 개량하는 데 사용했고, 또 상인들은 시장을 확장시키는 데, 제조업자manufacturer들은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사용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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