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
1
북한체제 하 알려지지 않은 일반인들의 기록
역사란 정복자나 통치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기록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 지배층이었다. 그들이 남긴 자료를 재구성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역사 서술도 당연히 지배층의 시각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본격적 연구가 시작된 지 채 50년이 되지 않은 북한사도 지배층 곧 당· 정 기구 간부들이 남긴 기록에 의존하여 연구가 수행돼오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북한체제의 발전 과정을 그들 사이의 ‘합의된 가이드라인’에 따라 기술하였다.
대중들의 목소리는 좀처럼 그들의 기록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사실 지배층의 통치에 다양한 대응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그들의 통치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는 대중들이야말로 어쩌면 역사의 주역이라 할 만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단 하나의 관점만을 고수한 지배층과 달리,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인 사고력을 발휘하는 무한한 영감과 사상의 원천이었다.
대중들의 목소리를 결여한 지도층만의 기록이었다는 점 외에, 북한의 기록문화가 역동성과 생동성을 상실한 다른 원인은 다층적 수준의 검열에 있었다. 통치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한 대표적 언론 통제 수단인 검열은 현실 사회주의권 국가들에서 강도 높게 실시되었다. 물론 소련의 검열제도를 도입한 북한도 사회적으로 공인된 규범이나 관점을 벗어나는 기록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북한의 기록문화에 비추어볼 때 검열에 결박된 지도층의 기록이 당대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가장 객관적이고 진실하게 보여주는가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사실 대부분의 북한 기록물은 매우 무미건조해 생동감을 일으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실관계에서까지 오류를 보이고 있다. 특히 공식 자료 중 가장 큰 비중을 점하고 있는 신문·잡지류는 조선로동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매체로 전락한 지 오래다. 무미건조한 공식 자료를 보완할 수 있는 탈북자들의 증언록이 그동안 다량으로 출판되었으나, 사료적 신뢰성 면에서 적잖은 의심을 받고 있다.
공식 자료와 증언록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최근에 자서전·이력서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자료는 해방 후 북한체제 하에서 일반 대중들이 작성한 개인 기록물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반 대중들이 남긴 자서전·이력서의 중대한 사료적 가치는 그들의 생각과 일상 삶을 생생히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대개 일제시기에 태어난 자서전 작성자들은 자신의 성장 과정과 자신의 눈으로 관찰한 주변 세계를 진솔하게 기록하였다. ‘지배층의 언어’나 ‘지도자의 언어’가 아닌 대중들 자신의 일상 언어로 기록된 자서전·이력서는 스냅사진처럼 해방 직후 북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 기록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젖어드는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자서전·이력서의 가장 중대한 가치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일반인 개개인들의 심리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은 이 자료를 통해 북한체제의 개개인들이 일상적으로 품고 있었던 생각을 마주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의 사고방식·가치체계·세계관 등의 의식구조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대중들의 사고와 관점에 입각한 역사 서술이 가능해졌다는 점은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착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아래로부터의 역사’ 구현은 현실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대중들이 비로소 역사세계의 민주주의마저 향유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필자는 역사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알려지지 않은 많은 대중들의 경험을 재료로 활용해 북한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이 글은 대중들의 집단 경험을 모자이크하는 식의 방법론을 활용하였다. 그들의 경험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완결된 스토리를 구성하고자 하는 이 연구의 실험 목표는 낮은 수준에서나마 사회사·일상사·미시사 등의 연구 방법론이 북한사 부문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는 데 있다. 지배층의 시선이 아닌 일반 대중의 시선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려는 이 연구의 실험은 북한사 연구 방법론의 새로운 출구 모색에도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2
자서전과 이력서
현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공직자 개개인들로부터 자서전과 이력서를 수합하였다. 그들의 가족·친척 관계를 비롯한 인간관계와 활동 경력을 기록한 이 문건들은 국가가 개개인들을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 자서전·이력서는 모든 개개인들을 장악하고자 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일반적 통제 기제였다. 물론 북한도 공직자·간부·노동당원·교원·학생·군인 등에게 이력서와 자서전의 제출을 의무화했다. 그들에 관한 핵심 정보를 담고 있는 이 문건들이 당국의 수중에 들어왔다는 점은 모든 개개인 정보의 장악을 모색한 국가의 야심적 구상이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
북한당국이 수합한 자서전·이력서류 가운데 일부가 한국전쟁 기간 중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한 미군에 의해 노획되었다. 현재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소장돼 있는 이른바 “전시 노획문서들” 중 한 종류인 자서전·이력서류는 RG242 SA2007군과 RG242 SA2011군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NARA가 보유한 자서전·이력서류의 상당분은 미군 노획문서를 체계적으로 수집해온 국립중앙도서관과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한국에도 유입되었다.
미군이 전시에 북한 지역 공공기관에서 탈취한 이 문건들은 그 기관에 근무한 직원들 개개인의 기록물이다. 구체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진, 평양공업대학 교수진, 흥남공업대학 교수진, 평양의학대학 교수진, 함홍의과대학 교수진, 청진의과대학 교수진, 평양교원대학 역사과·지리과·노어과·수학물리과·화학과·체육과 학생들, 황해도 재령군 내 각 중학교 교사들, 강원도 김화군·평강군 내 각 중학교 교사들, 함경남도 영흥군·함주군 내 각 중학교 교사들, 황해도 벽성군·송화군·은율군 내 참심원들, 조선인민군 하사관과 병사들, 조선 중앙통신사 직원들 등의 자서전·이력서가 전시에 노획되었다.
북한당국은 공직자 개개인들로부터 수합한 자서전·이력서에 평정서라는 문건을 끼워 한 세트로 보관하였다. 개개인들이 직접 작성한 자서전·이력서와 달리, 평정서는 당국자가 그들을 평가한 문건이었다. 때때로 이 세 문건 뒤에 기록자들의 학력을 입증할 근거 자료인 졸업증서 사본이 침부되었다. 그것을 제출한 이들은 전문학교나 대학을 나온 고학력자들이었다. 그들은 복사 기술이 대중화되지 않은 당시에, 학교 직인까지 정성껏 그려 넣은 졸업증 필사본을 제출하였다.
자서전·이력서는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다. 먼저 작성자의 사진을 오른쪽 상단에 붙여야 하는 이력서는 수십 개의 기재 란을 두고 있었다. 평양공업대학 교수 이력서 양식의 경우 기입해야 할 항목이 총 42개에 달했다.
1) 소속 직장과 직위 2) 성명 3) 성별 4) 민족별 5) 생년월일 6) 본적지 7) 출생지 8) 현주소 9) 부모의 직업 10) 토지개혁 시 몰수되거나 분여받은 부모의 토지 평수 11) 토지개혁 시 몰수되거나 분여받은 본인의 토지 평수 12) 부모의 재산정도 l3) 본인의 재산 정도 14) 출신성분 15) 사회성분 16) 소속 정당 17) 타 정당이나 외국 정당 가입 여부 18) 학력 19) 해방 전 보통문관이나 고등문관 시험 합격 여부 20) 저작이나 발명 여부 21) 소유한 기술 22) 해방 후 정치 강습 수강 여부 23) 외국 여행 24) 여덟 살 이후의 경력 25) 이력에 대한 증명인 26) 주 직업 외에 겸한 직책 27) 선거를 통해 당선된 기관과 직위 28) 구사 가능한 외국어 29) 책벌 여부 30) 표창 수여 여부 31) 해방 전 친일 단체 가담 여부 32) 해방 전 표창 수여 여부 33) 혁명운동·지하운동 참가 여부 34) 정치운동에 따른 체포·구금·투옥 여부 35) 정치운동 외의 이유에 따른 체포·구금·투옥 여부 36) 해방 전이나 해방 후 군인 복무 여부 37) 신앙 38) 가족관계 39) 친우관계 40) 취미 41) 이력서 기입 년 월 일 42) 이력서 취급자
42개 항에 걸친 단답식 서술을 요구한 이력서는 개개인들의 일생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단답식 서술만으로는 작성자의 구체적 활동과 경력, 가족관계를 비롯한 인간관계, 내밀한 의식구조 등에 관한 심층적 정보를 파악하기에 불충분했다. 개개인들의 거시적 활동 궤적과 대강의 경력만을 보여주는 문건인 이력서 이상의 자료가 요구되었다. 바로 자서전이 그들의 활동 경력과 가족 배경을 미시적 수준까지 해부할 수 있는 자료였다. 자서전 양식은 백지에 밑줄만 그어져 있었다. 기록자들은 작문을 통해 그 빈 공간을 메워야 했다. 물론 자서전에도 가이드라인에 해당하는 작성 요강이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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