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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만남
우리 만남은 우연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를 관통하는 주제는 ‘만남’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진정한 만남이라면 그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만남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만남이 그렇듯 학교에서의 만남도 우연으로 시작한다. 문제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만남 가운데 어느 하나도 진실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학교에 진정한 의미의 만남이 있을까?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이 세상의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과 ‘나와 그것’의 만남 두 가지밖에 없다고 말한다. 전자가 진정한 만남이라면, 후자는 형식적 만남이다. 그는 우리의 만남이 대부분 ‘나와 그것’의 만남에 머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너’와 ‘그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너’는 나에게 그 자체로 목적인 대상을 의미하고, ‘그것’은 수단인 대상을 의미한다. 영화 〈겨울왕국〉에서 크리스토프에게 안나는 결과적으로 소중한 ‘너’이지만, 한스 왕자에게 안나는 아렌델 왕국을 차지하기 위한 ‘그것’에 불과했다. 부버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대상이 ‘너’와 ‘그것’의 상태를 오가다가, 그 대상과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을 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 다시 말해 ‘영원한 너’가 된다고 말한다.
결국 내 앞에 있는 존재와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진정한 만남이라는 것이다. 어느 공동체나 진정한 만남이 있어야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다.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 교사와 학부모의 만남 모두가 그렇다. 엄기호는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단순히 책상에 앉아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수많은 교사들과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고, 거기서 발견한 단서를 바탕으로 학교라는 공간을 해부한다. 책의 1장은 ‘학생들이 왜 소외되는지’에 대해서, 2장은 ‘교사들의 바쁨과 침묵’에 대해서, 3장은 ‘연대하지 못하고 순응하는 교사의 문화’에 대해 다루었다. 따라서 이 책은 학교에서 만남과 소외라는 이중주가 어떻게 연주되고 있는지를 설명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교실이다. 엄기호는 교실을 ‘정글’로 표현한다. 그가 설명한 교실 풍경은 ‘널브러진 애들’과 ‘공부하는 애들’로 나뉘어 있으며, 이 둘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널브러진 애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공부하는 애들’은 필요한 공부만 하면 되기 때문에 교사와 진심으로 만나지 않는다. 수업에 참가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한 아이들도 교사가 상대하기 어려운 대상이지만, 전략적 판단으로 교사와 수업을 선택하는 학생들 역시 반갑지 않은 대상이다.
학생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고 그들이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면, 교사는 수업을 진행하기 어렵다. 배움이란 기본적으로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성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은 나에게 자극을 줄 수 없다. 자극이 없으면 지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학생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배움을 거부하고 그들의 무리를 풀지 않는 것이 바로 교실 붕괴(수업 붕괴)이다.
교실 붕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의식과 장기적 대책이 동시에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는 교실 붕괴를 교사의 탓으로만 돌린다. 교사나 학생이 크게 다치거나 죽어 나가야 잠시 관심을 보인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 “거참, 선생이 좀 더 노력하지 않고 말이야!”라고 하면서 교실 붕괴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본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무감각이 교사에게도 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실 붕괴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교사들 역시 교실 붕괴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엄기호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가 교실 붕괴에 대한 교사 각자의 경험이 매년, 매시간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등과 중등이 다르고, 지역과 학교에 따라 다르며, 같은 학교라 하더라도 학생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니 교실 붕괴는 교사 각자의 고통일 수 있지만 교사 공동의 고통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교실 붕괴가 교사 공동체 차원의 담론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화한 상태로 접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거기에 공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고통에 동참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교사들이 겪고 있는 교실 붕괴라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만남과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엄기호 역시 비슷한 말을 한다.
어떤 해는 수업이 잘되고, 어떤 학교에서는 완전히 망해버린다. 이 편차가 워낙 심하다 보니, 자신이 수업 붕괴를 겪으면 이것을 교육의 보편적 현상으로 여기며 심각하게 생각하다가도 다시 수업이 잘되는 학교나 학년으로 이동하면 곧 잊어버린다. 수업 붕괴에 대한 교사들의 공감과 연대가 깊어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45쪽
삶의 서사를 빼앗긴 교사들
공감과 연대가 사라진 학교에서 교사들은 매일 널뛰기를 하고 있다. 학생들의 수업 태도와 표정에 따라 매시간 예측할 수 없는 널뛰기가 반복된다. 혹자는 “그런 널뛰기가 교사로서의 성찰과 성장의 바탕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학교 현장에서 한 시간도 수업해 보지 않은 이론가나 관료들의 어설픈 착각에 불과하다. 타인과의 소통이 전제된 널뛰기라면 성찰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소통이 제거된 채 우연이라는 중력으로만 이루어지는 널뛰기는 자존감의 하락과 매너리즘으로 치달리는 급행열차일 뿐이다.
이러한 널뛰기는 교사의 경험이 연속적인 이야기로 정제되는 것을 가로막는 주범이다. 교사는 교실 붕괴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지만, 반복되는 널뛰기는 상처받은 교사를 다시 허공으로 날려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한 교사의 삶도 연속적이고 성찰적으로 구성될 수 없고 상황에 따라서 단절적으로 전개된다. ‘삶의 서사’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같은 책, 68쪽
교사는 교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교실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진다면 교사에게 남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수업에 대한 담론과 서사가 사라진다면, 그래서 교사가 만날 수 있는 ‘너’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진다면, 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험담, 재테크, 부동산 이야기처럼 가벼운 이야기밖에 남지 않는다. 물론 가벼운 이야기는 삶의 활력소이자 사람들을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약한 접착제일 뿐이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포스트잇과 비슷하다. 정말 중요한 내용은 포스트잇에 쓰지 않는다. 삶에서 중요한 연결은 가벼운 이야기를 통해서는 이어지지도 유지되지도 않는다.
자기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야말로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이다. 교사가 경험하는 모든 삶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조금만 다듬으면 수업 소재가 될 수 있고, 교육적 아이디어로 변주된다. 교사는 자신의 경험을 직조하여 본업을 수행하고 그 과정과 결과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한다는 측면에서 소설가와 비슷하다. 소설가인 이순원은 ‘작가’의 삶에 있어서 버릴 경험은 하나도 없으며, 부끄러웠던 기억들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작가를 ‘교사’로, 작품을 ‘수업’으로 바꾸어도 뜻은 그대로 통한다.
하지만 만남이 사라진 교실과 바쁨에 굴복한 학교는, 교사의 경험을 삶에서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지우고 싶은 ‘견딤’으로 만든다. ‘삶의 서사’는 엄기호의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교사 개인의 삶, 나아가 교사 공동체 회복을 위한 중요한 가치다.
도덕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정체성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지금까지 그것이 철저히 소외되어 왔다고 비판한다. 그는 인류가 점점 비도덕적 존재로 변하는 원인도 ‘삶의 서사의 상실’에서 찾는다. 자기 삶의 이야기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률(자신과 한 번도 소통해 보지 못한 위인이나 유명한 인물의 삶을 숭상하는 것)을 동경하는 것이 실제 자신의 삶에서 마주하는 도덕적 판단과 인간적 감성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삶의 서사가 사라지면 인간은 점점 무감각해지고, 결국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가 염려한 무감각은 진정한 배움을 박탈당한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삶의 이야기를 연결하지 못하는 공간인 학교에서, 부끄러움마저 사라지고 있다.
만남이 없으면 부끄러움도 없다
삶의 서사가 사라지는 것은 교사뿐일까? 학생들 역시 진정한 배움에서 소외되었기에 삶의 서사를 잃어버렸다. 엄기호는 이러한 피해의식이 학교 폭력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학교 폭력 가해 학생들이 무심코 내뱉는 “장난이었어요.”라는 말이다. 장난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감정이입을 할 필요가 없다. …… 교실은, 모르는 존재를 만나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면서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름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단절의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82-83쪽
가해 학생들은 자신의 잔인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만남이 지속될 때 생긴다고 말한다. 부끄러움이 없는 만남은 ‘왜소한 만남’이 된다는 것이다. 해외나 낯선 장소에서 만난 사람에게 더욱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이상 안 볼 사람에게는 부끄러운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 학교는 매일 보는 사람을 안 봐도 될 사람으로 만드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학생 지도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이다. 교사는 이 말을 들으면 솔직히 화가 난다. 그런데 엄기호의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사자후처럼 쏟아내던 ‘저한테만’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학생에게 교사의 말은 관심과 애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교사는 어쩌다 한 번 그 학생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학생 입장에서 보면 다른 교사들로부터도 늘 그런 지적을 받아왔던 것이다. 교사의 ‘오랜만의 지적’이 그 학생에게는 ‘또 받는 지적’이 된다.
학생들은 개별 교사를 학교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 속에서 만난다는 사실이다. …… 그 학생은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분노를 폭발”시켰다고 한다. 어떤 교사가 무슨 이유로 말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학생에게는 ‘내가 또 비난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전에 교사들에게서 비판받았던 모든 기억을 다 끌어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같은 책, 98-99쪽
진정한 만남이 없으면 반성도 일어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교사의 말은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는 부끄러움이 되지 못하고, 아픔을 반복해서 건드리는 화살로 작용할 뿐이다. 왜소한 만남은 필연적으로 상처만 남길 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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