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가장 외롭고 가장 힘들고 알 수 없게 두려웠던 열여섯 2월의 어느 밤, 장장 한 달을 졸라 떠나게 된 제주 여행, 아이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걸고 약속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아주 작은 의심까지 털어 내지는 못했다. 의심은 타인을 향한 것이기도 했고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18쪽)
고등학교 입학식
넥타이는 처음이다. 소란은 셔츠 깃을 세워 놓고 목에 두른 타이의 양쪽 끝을 엇갈려 한 번 감았다 풀고, 두 번 감았다 풀고, 다시 한번 감아 보았는데 어떻게 해도 모양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폰으로 ‘넥타이 매는 법’을 검색했다. 동영상을 따라 더듬더듬 넥타이를 삼각형 모양이 되도록 돌려 감고 매듭 안으로 타이 끝을 밀어 넣으며 소란은 아빠한테 매듭을 만들어 놓고 출근하라고 할걸 생각했다.
오늘은 제대로 입고 싶었다.
첫날이니까.
새 교복이니까.
남색 재킷에 푸르고 붉은 선이 엇갈린 체크무늬 스커트, 폭이 좁은 남색 타이. 고무줄로 연결된 타이가 아니라 제대로 매는 타이라서 고급스럽다. 초록색 계열의 중학교 교복보다 소란에게 잘 어울렸고, 무엇보다 잘 맞았다. 중학교 교복은 너무 짧고 타이트했다. 일부러 줄인 것도 아니고 작은 사이즈로 구매한 것도 아닌데 불편할 정도로 몸을 조였다.
중학교 교복은 딱 두 번 입었다. 입학식 날, 졸업 앨범 찍는 날. 평소에는 늘 체육복을 입고 다녔고 심지어 졸업식 날도 교복을 입지 않았다. 엄마는 교복이 완전 앨범 촬영용이 됐다고, 이럴 거면 촬영 날만 대여할 걸 왜 맞췄는지 모르겠다며 돈 아깝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교복 한 벌 못 살 형편은 아닌 건 같은데 엄마가 자꾸만 돈 얘기를 해서 소란은 마음이 상했었다.
소란은 아무도, 가족 중 누구도, 절대 입학식에 오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이미 휴가를 냈다며 소란의 경고를 농담 혹은 실없는 소리 취급했다.
“왜 나한테는 묻지도 않고? 내 입학식이잖아.”
“네 엄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오빠 고등학교 입학할 때도 안 갔으면서 그래.”
엄마는 입을 벌린 채 멈칫했다. 곧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더 당당하게 말했다.
“나도 자식 고등학교 입학식 한번 가 보자.”
“그 자식이 왜 하필 나야? 난 분명히 말했어. 싫어.”
“소란아.”
“그렇게 가고 싶으면 셋째 낳아. 그래서 17년 후에 가.”
정말 많이 서운하고 실망한 듯했지만 엄마는 결국 소란의 뜻을 따랐다. 입학식 아침,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소란이 자는 사이 부모님은 출근했고 오빠도 학교에 갔다. 식탁 위에는 만 원짜리 두 장과 엄마의 쪽지가 있었다.
‘입학 축하한다. 입학식에는 오지 말라니 돈으로 축하하마.’
교문 앞에서 꽃다발을 팔고 있었다. 졸업식 날은 고등학교 정문과 연결되는 양쪽 골목과 차도, 그 건너편 신영진중학교 앞까지 꽃다발 노점들이 점거했었다.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것보다 끝내는 것이 더 축하받을 일인가. 소란은 엄마가 두고 간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교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좌판으로 갔다.
“2만 원짜리 있어요?”
검지 손톱에 커다란 은색 별을 달고 있는 앳된 사장님은 좌판 가장 위쪽이 2만 원이라고 대답했다. 조화 사이사이 금박으로 포장한 초콜릿이 섞여 있는 흔한 꽃다발이었다. 소란이 하늘색 꽃다발을 집어 들고 지폐를 건네자 사장님은 고마워요, 했다. 소란은 그냥 들어가려다가 멈춰 서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꽃다발들을 다시 진열하던 사장님이 손을 멈추고 소란을 빤히 보았다.
“입학 축하해요.”
진심이 담긴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신입생인 것을 알아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첫 대화다. 소란도 진심으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마주 웃어 보였다.
2만 원짜리 꽃다발을 안고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강당으로 향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소란처럼 혼자였다. 입학식이 가족 행사가 될 나이도 지났고 고교 지원제 이후로 동네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받는 일도 없다. 익숙하지 않은 교복과 낯선 얼굴들, 불만과 아쉬움을 공유한 이들이 나누는 어색한 미소. 신입생 대부분은 신영진고를 희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목고 입시에 실패했거나 1지망에서 탈락한 학생들의 2지망 학교. 신영진고등학교는 그런 학교다.
신영진고가 있는 경기 영진시는 서울과 맞닿아 있는 공장지대였다. 공장들이 점차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이나 동남아 등으로 옮겨 가자 경기도와 영진시는 전략적으로 지역에 디지털단지를 조성했다.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IT업체가 들어서며 인근 주택밀집지역인 신영진구는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했다.
영진시의 대부분은 공장지대와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주거지가 섞여 있는데 신영진구만 분위기가 다르다. 영진디지털단지와 가깝고 서울로의 교통도 편리해서 젊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이주해 왔다. 소득 수준도 비교적 높다. 신영진구는 ‘경기 속의 서울’, ‘영진 우파’ 같은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별명을 얻었다. 깨끗하고 교통 좋고 각종 생활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진 떠오르는 신도시. 그런 신영진에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교육 인프라다.
신영진구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대한민국에서 대입 성적이 손에 꼽히는, 교육열 높고 학원 많은 서울 다난동이 있다. 신영진 아이들은 셔틀버스를 타고 다난동 학원에 다니다가 학년이 올라가면 다난동 학교로 전학을 가곤 했다. 신영진의 학교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급 수가 줄어들고 학급당 학생 수도 적어진다. 결국은 떠나는 곳. 5년 전 과학중점고를 표방하며 개교한 신영진고의 대입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처음 제안한 사람은 가장 공부를 잘하는 다윤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에이, 했다.
“너 경인외고 안 갈 거야? 네가 신영진고 가게 선생님들이 가만둘 것 같아?”
“응. 나는 신영진 갈 거야. 우리 다 같이 간다고 약속만 한다면.”
다들 표정이 진지해졌다.
여행 마지막 밤이었다. 은지 엄마가 잠들면 맥주를 나눠 마시기로 했지만 순진한 아이들은 결국 냉장고 구석의 언제 넣어 둔 건지 알 수 없는 맥주 캔에 손도 대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는 치킨 조각과 콜라만 널브러졌다. 그러고도 모두 취한 기분이었다. 3학년 때도 영화 동아리 하자, 고등학교 가서도 연락하자, 그러다가 같은 고등학교 가자는 얘기까지 왔다.
“누가 신영진을 쓰겠어? 거긴 1지망 쓰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다 같이 갈 수 있다니까.”
반질반질한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열심히 설명하는 다윤을 보고 해인이 피식 웃었다.
“너 김상혁 때문이지?”
“뭔 소리야.”
“김상혁이 저번에 그러던데? 그냥 제일 가까운 신영진 쓸 거라고. 너네 헤어진 거 아니지?”
해인이 묻자, 다윤은 눈을 피하며 답했다.
“뭐래. 아니야.”
“에이, 맞는데?”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잖아!”
다윤이 목과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소리쳤다. 당황한 해인은 웃음을 지웠고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은지와 소란도 굳어 버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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