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사고
―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능력
공부란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
공자가 말했습니다.
“유由야. 너는 여섯 가지 말에서 여섯 가지 폐단이 따른다는 말을 들어보았느냐?”
선생님이 제자에게 이렇게 물어봤을 때 나오는 대답은 뻔합니다.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배움을 청하는 자세입니다.
“거기 앉아라. 내가 설명해주마.”
공자는 이어서 여섯 가지 말과 여섯 가지 폐단을 가르칩니다. 그 가운데 세 번째 말과 그에 따른 폐단은 이러합니다. ‘호신불호학好信不好學, 기폐야적其蔽也賊.’ 요즘 말로 하면 ‘믿기만을 좋아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사회의 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믿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어렵습니다. 공부란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가 질문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믿지 못할 놈들 천지인데 의심이 뭐가 어렵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의심하기 어려운 이유가 의외로 많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메시지가 좋기 때문입니다. 버스 뒷자리에 앉은 고운 아주머니가 초등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딸에게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책에서 읽었는데, 물에다 대고 ‘넌 참 곱구나, 나는 너랑 놀고 싶어, 사랑해’ 같은 좋은 이야기를 하고서 얼리면 아주 못생긴 얼음 결정이 생긴대.”
일본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우리나라에서만 수십만 부가 팔렸습니다. 아직도 5월 초가 되면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부모 몰래 투명 텀블러를 냉동고에 숨깁니다. 자기 마음을 담은 예쁜 결정의 얼음을 어버이날에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물은 몇 가지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예쁜 말에서 특정한 파장의 에너지가 나와서 물 분자를 진동시켜 특정한 모양이 되게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말은 쉽게 믿게 됩니다. 왜냐하면 메시지가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예쁜 생각을 하고 고운 말을 쓰라는 거 아닌가요.
두 번째 이유는 메신저가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분의 말씀은 믿고 싶어 합니다. 선생님, 목사님, 스님, 신부님, 공자님처럼 좋은 사람들의 말은 쉽게 믿습니다. 환경운동가처럼 자신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사람들의 말을 쉽게 믿습니다. 왜요? 메신저가 좋으니까요. 좋은 사람이 설마 나쁜 이야기를 했을 리는 없으니까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죠. 왜 훌륭한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다른지 말입니다. 핵발전소, 동성애, 신도시 건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릅니다. 지지하는 정당도 다릅니다. 좋은 메신저가 하는 이야기가 다 다르다면 그들의 메시지도 당연히 의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자연 치유시키려 한 어떤 한의사 선생님은 얼마나 훌륭한 생각을 하셨습니까. 하지만 그를 의심하지 않아서 생긴 폐단은 너무나 컸습니다. 저는 환경운동가들의 삶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GMO, MSG, 전자(기)파의 위험성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친한 이웃이 환경운동가인데 그 집에 놀러 갔더니 전자레인지가 베란다에 나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걸 왜 바깥에 내놨어요?”
“전자파가 나오고 영양소도 파괴하고 발암물질도 만드는 위험한 거라서 바깥에 놔뒀어요.”
“그렇게 위험하면 갖다 버려야지요. 왜 바깥에 놔두고 쓰세요?”
“어쩔 수 없이 써야 될 때는 가족을 위해 저 혼자 살신성인의 자세로 쓰고 있어요.”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정말 좋은 일 하는 분이고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분인데 그런 말씀을 하니까요. 세상에 전자파는 없습니다. 전자기파입니다. 사람들은 전자파라는 이름을 쓰면서 막 전자가 총알처럼 튀어나와 내 몸이 망가질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빛가시광선이 전자기파의 한 종류입니다. 전자기파는 파장의 길이가 짧은 것부터 감마선, 엑스선,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 마이크로파전자레인지 전파라디오파의 순으로 분류합니다. 전자레인지가 몸에 안 좋으면 무지개도 몸에 안 좋습니다. 무지개는 가시광선이거든요. 하지만 “무지개 떴다, 숨어!” 하는 부모는 한 명도 없습니다. 적외선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것입니다. 리모컨으로 TV 채널 바꿀 때 “지금 채널을 바꿀 거니까 위험할지도 모르니 나가 있다가 와”라고 하는 부모도 없습니다. 근데 마이크로파 때문에 발암물질이 생긴다면 리모컨은 어떻게 쓰고 무지개는 어떻게 쳐다보고 있겠습니까.
의심해야 할 주제로는 호흡도 있습니다. 호흡이란 생명체가 산소를 받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생명 활동입니다. 호흡을 위해서는 산소가 있는 공기 또는 물과 직접 접촉하는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허파와 아가미, 피부 그리고 곤충의 기문氣門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뇌호흡이라는 게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인데, 뇌호흡에 관한 책은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 권이나 팔렸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뇌호흡은 다양한 방법으로 뇌를 자극하고 운동시킴으로써 뇌의 긴장을 제거하고 뇌가 원래의 편안한 상태를 회복하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뇌가 적당한 긴장과 이완을 유지하며 최적의 상태가 될 때 육체적인 차원의 호흡을 주관하는 연수도 최상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왜 과학 교과서에는 안 나올까요? 과학자의 의심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충분한 과학적인 연구와 증명 과정이 없습니다.
만유인력을 반대할 수는 없습니다. 의심의 장벽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세상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입니다.
인생의 스승
저는 TMT입니다. 스스로 TMT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항상 자제하고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만… 잘되지는 않습니다. 모임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이면 어느덧 입을 쉴 새 없이 놀리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하죠. 그런데 가끔 대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은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할 이야기가 정말로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왜 은사님에 대한 추억이 없을까요? 저는 공부를 제법 잘했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는 편이었지만 감히 선생님께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믿었어요. 선생님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면 가까이 다가서면 안 되잖아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는 꼭 밟아야 합니다. 그림자를 밟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도대체 누가 제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준 걸까요?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저는 아버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다들 어릴 때는 그렇잖아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고아가 되었습니다. 어른이라고는 학교 선생님뿐이었죠. 그런데 그때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교사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죠. 문제는 그 권위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겁니다. 일제강점기 때 교사는 칼을 차고 수업을 했습니다. 마치 군인과도 같았죠. 학생을 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학생은 교사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스승의 그림자를 밟을 생각이나 했겠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랬습니다. 맞으러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았어요. 온갖 이유로 맞았습니다. 줄넘기를 못한다고 맞았어요. 아니, 맞으면 줄넘기를 잘하나요? 심지어 선생님께 미소를 지었다는 이유로 맞은 적도 있어요. 몹쓸 세상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청소년들이 부럽습니다. 학교에 맞으러 다니지 않잖아요. (사실 더 부러운 건 따로 있습니다. 다정하게 손잡고 다니는 남녀 학생들을 보면 ‘에혀, 지금 태어났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죠.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스승의 그림자를 밟읍시다. 학교에 가는 이유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거잖아요. 스승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더 많이 이야기하자고요. 스승의 그림자를 밟다보면 존경심도 더 생깁니다.
그런데 스승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생각할 게 하나 있습니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일까요? 그럴 리가요. 그러면 세상은 발전하지 못합니다. 제자는 언젠가는 어릴 때 스승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스승을 뛰어넘어야 하지요. 더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발전입니다. 스승의 그림자는 우리가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발판입니다.
스승의 그림자가 뜀틀의 발판이 되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대화를 나눌 때 “네, 그렇군요”뿐만 아니라 “정말요?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도 빼놓으면 안 됩니다. 뛰어넘는 연습은 지금부터 하는 겁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요, 학교에 선생님보다는 친구들이 훨씬 많잖아요. 친구들의 그림자를 밟는 것은 어떨까요?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서로의 스승이 되는 거죠. 제가 그림자를 밟은 그 사람이 바로 제 스승입니다. 제가 밟은 그림자가 많을수록 제 스승은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죠.
함부로 믿지 않고 질문하는 것,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언제든 실수할 수 있고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과학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갈릴레오보다, 다윈보다 더 많은 과학적 지식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그들보다 더 훌륭한 과학자라고 할 수는 없죠. 위대한 과학자들은 새로운 사고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훌륭한 거예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진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죠. 언젠가는 자신의 이론이 깨질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도 있다는 걸 인정했어요.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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