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대한민국은
어떻게
시험공화국이
되었나
2
우리는 왜 시험에 올인하는가
심리학자 마크 그리피스Mark Griffiths는 행동중독의 여섯 가지 특징을 제시했다. 이 기준은 원래 도박중독의 특징이지만, 그리피스는 모든 행동중독의 보편적인 특징이라고 본다.
첫 번째 특징은 현저성salience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자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요소를 말한다. 도박중독자를 예로 들어보자. 도박중독자는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머릿속에 늘 ‘도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이 지금 하는 일은 나중에 도박을 하기 위해서거나, 당장 도박을 못 하기 때문에 대신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행동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감정 변화mood modification다. 그 행동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에 따라 기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덕분에 기분이 좋아지거나 가라앉거나 진정되기도 하는데, 그 행동 없이는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 행동을 할 수 없게 되면 기분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린다. 세 번째는 세 번째는 내성tolerance이다. 그 행동이 익숙해지면서 다음번에는 더 오래, 더 강하게 해야 이전과 비슷한 수준의 만족감을 경험하게 된다. 네 번째는 금단withdrawal증상이다.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고, 불안하거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즉, 몸과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행동이 필요해진 상태를 말한다. 다섯 번째는 갈등conflict이다. 온종일 그 행동에 휘둘려 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고, 본인의 삶 자체도 황폐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 특징은 재발relapse이다. 한동안 그 행동을 끊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그 행동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피스는 이 특징들은 인터넷중독이나 게임중독에 적용해서 설명했다. 흥미롭게도 우리 사회의 시험이 이 여섯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시험중독 사회의 여섯 가지 특징
첫 번째, 한국 사회에서 시험은 현저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시험은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대입시험이 국가적 행사가 되는 나라는 많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수능시험날 공공기관의 출근 시간이 조정되며, 항공기의 이착륙조차 금지된다. 심지어 대입시험 정책에 따라서 정부의 지지율이 흔들리기도 한다. 박근혜 정부의 붕괴도 입시 부정에서 시작되었음을 돌이켜보라.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시험으로 대체된다. 한국에 얼마나 많은 자격증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자격증시험 준비 업체의 웹사이트를 살펴보면 1급 자격증만 139개의 코스가 제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예절교육 지도사, 장애인 인식개선 지도사 같은 자격증도 있다. 심리상담 분야도 푸드아트 심리상담사나 문학 심리상담사 등 세밀한 자격으로 나뉜다. 예절을 가르치기 위한 자격이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자격도 시험을 치러서 얻어야 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적어도 이 사이트만 보면 한국에서 모든 자격은 지필시험을 통해서 획득해야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예전에 ‘청소년 핵심역량’을 연구하던 우리 연구진의 걱정도 시험의 현저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연구의 취지는 시험으로 평가하는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능력을 키우고 이를 측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핵심역량 개념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히면, 취지와는 정반대로 핵심역량 시험이 개발되고 이 시험을 훈련시키는 학원이 생기지 않겠냐는 우려가 있었다.
두 번째, 감정 변화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시험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고부담 시험은 시험 당일의 기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을 결정한다. 수험생의 평생 또는 최소한 앞으로 1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시험에 의해 하락한 사회적 지위나 기분을 되돌리는 것도 결국 시험이다. 지금도 고시원과 독서실에서 각종 공무원시험에 인생을 투자하는 사람들은 열악한 현실, 불리한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시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험이 조절하는 건 하루하루의 기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이다.
세 번째, 내성은 어떨까? 초등학교 시절의 시험과 대학입학을 위한 수능시험, 그리고 대기업 공채시험이나 공무원시험의 난이도 차이를 생각해보자. 초등학교 시절 간단하고 쉬운 퀴즈로 시작해 점차 시험에 길들여지며, 점점 더 고난이도와 엄청난 시간 압박을 가하는 각종 고부담 시험을 당연한 듯 치러내기에 이른다. 시험에 내성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번째, 금단증상은 우리 사회가 시험 중단 앞에서 보이는 태도를 설명한다. 사법고시를 폐지할 때 경험했던 전 국민적 반발을 돌이켜보자. 반발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크게 보자면 결국 더 이상 사법고시를 볼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보이는 금단증상이었다.
다섯 번째, 갈등은 다양한 측면에서 나타난다. 우선 수험생을 둔 가족 안의 갈등이 있다. 수험생이 재수생이 되면 갈등의 범위는 동료와 주변인들로 더욱 넓어진다. 대부분의 장기 공시생은 거의 인간관계를 차단하고 살아가는데, 이는 갈등을 넘어선 관계의 파괴라 할 수 있다. 갈등은 단지 수험생과 주변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험은 언제나 논쟁거리였다. 특히 시험의 방향, 공정성에 대한 논쟁은 극단적인 갈등과 충돌로 이어지기도 한다.
마지막 특징인 재발도 존재할까? 우리가 시험, 정확히는 고부담 시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수록 시험의 힘이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화되어왔다면, 그것이 재발이 아닐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한국 사회는 시험을 통해 발전했다.
시험이 여러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받은 지는 아주 오래되었고, 시험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시험제도를 고쳐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냥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의 힘을 더 키워주곤 했다. 최근 정치계에서 시작해 사회문화적 논쟁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는 대입 수시전형제도를 보자. 이 제도의 기원은 이명박 정부 때 도입된 입학사정관제다. 취지는 좋았다. 학생들의 잠재력이나 재능을 단순히 교과목 성적이나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하는 수능시험 점수로만 평가하지 말고, 학생의 삶 전반을 전인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를 대학 입학에 반영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시전형은 지금 공정성을 해치는 원흉으로 지목되어 폐기될 위기에 놓였고, 수시가 대체하려던 고부담 시험이 더 낫다는 여론만 키워놓았다. 1970년대 처음 실시된 대학별 본고사의 운명도 비슷했다. 객관식 시험에서 탈피해 논술이나 풀이 과정을 강조한 대학별 본고사는, 입시 위주의 교육을 강화시키고 과외시장만 키워놓은 채 폐지되고 말았다.
이런 ‘시험의 역습’ 현상은 인력 선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1990년대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임직원이 신입사원을 추천하는 임직원추천제가 확산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임직원추천제가 일부 도입된 바 있으나 조용히 사라졌다. 오히려 새 정부는 이전과는 정반대로 임직원과의 관련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블라인드 채용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대기업별 입사시험도 1990년대 폐지되었지만, 이를 대체한다는 명목 아래 도입된 인적성검사는 또 다른 입사시험이 된 지 오래다. 더욱이 입사시험 시절에는 기초과목의 지식만 공부하면 되었지만, 인적성검사가 시행되면서 시험의 영역은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같은 개인의 삶 전반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요컨대 우리나라 교육제도 개혁의 역사는 입시지옥을 바꾸어보려는 시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고부담의 지필시험이 견고하게 유지되며 시험공화국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고부담 시험은 끊임없는 도전에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시험이 우리 사회에서 유용하고 강력한 도구로 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시험이라는 주제가 등장했고, 결국에는 시험제도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는 시험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시험은 개개인의 차이를 비교하고, 어떤 대학이나 일자리에 적절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만약 그 시험이 어는 공동체 또는 사회나 국가 단위로 실시된다면, 시험은 잠재적인 적용 대상들에게 전체가 원하는 인재상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즉 시험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가치관이나 평가 기준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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