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인분의 삶
초등학생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남았고, 여동생은 어머니를 따라갔다. 사춘기가 올 무렵이었고, 집은 좁았다. 억압적으로 느껴지던 4인 가족에서 자율적인 2인이 됐다. 학교에서는 아버지와 나를 ‘한부모 가정’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별 애착 없이 지냈다. 간간이 밥을 같이 먹었고, 자주 싸웠다. 싸움은 매번 무승부로 끝났으므로, 우리는 평등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따로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자기 일을 했고, 나는 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각자 1인분의 삶을 해내며 살아갔다. 가난한 집안이 으레 그렇듯 나눠줄 자원이 없으니 부모가 자식의 삶에 개입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좋았다. 내 삶의 모든 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된 나는 꿈이 많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고, 댄서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 영상도 춤도 글도 조금씩 건드리며 살았다. 애초에 대학은 생각도 없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가 지독하게 싫었고, 내 형편에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다닐 자신도 없었다. 지금 당장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미래에 격차가 생길지 모른다는 예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럴 때면 인터넷으로 고졸이나 중졸로 학력을 마친 감독이나 댄서나 작가를 검색하며 안심했고, 나도 열심히 하기만 하면 학력이 필요 없다고 다짐했다.
뭐라도 해보려던 스무 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2011년 일이다. 그 뒤 1인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시 일을 나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 있었다. 저혈당증으로 환각에 시달리다가 또다시 쓰러졌다. 알코올성 치매 초기에 진입했다. 발등에 화상을 입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병원에서 ‘보호자’로 불렸다. 공공 기관에서 복지 지원을 받으려 할 때는 ‘대리자’이거나 ‘부양 의무자’였다. 주위에서는 심심찮게 ‘효자’로 부르기도 했다. 어느새 2인분의 삶을 담당하는 ‘가장’이 됐다. 돈, 일, 질병, 돌봄이 자주 나를 압도하거나 초과했다. 고강도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하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외로움과 고립감이 뒤따랐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은 또래 친구들에게 낯선 문제였다. 어쩌다 내 이야기를 나누면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젊은 또래에게 돌봄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그만큼 거리감이 생겼다. 대부분 겪어보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 혼자만 유별난 상황인 듯해서 점점 이 세상의 분류법에 들어가지 않는 내 고통을 외면하려 했다. 사회 문제로 호명되는 ‘청년’을 보면서 한동안 내가 ‘일반 청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청년은 학자금 대출로 힘들고,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버지의 부모처럼 살고 있어서 내게 청년이라는 말은 좀 어색했다.
그렇지만 나는 분명 청년이다. 어떤 직업적 성숙기에 들지도 않았고, 심지어 진로를 찾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벌기에는 아버지가 큰 짐처럼 느껴졌다. 내게 ‘청년’은 나를 설명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제였다. 가족 돌봄과 가장 구실까지 맞물려서 청년이라는 과제는 충돌하거나 가중됐다. 지난 9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간신히 샛길을 찾아 뭔가 해보려고 노력한 시간이었다. 9년의 기록을 써 내려갈수록 여전히 대답은 쉽지 않지만, 꼭 해야 하는 질문은 뚜렷해졌다.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버지의 삶을 관리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희생이나 배제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런 고민을 나누려고 이 글을 썼다. 글을 쓰는 동안 간간이 돌봄을 경험한 사람들을 만났다. 돌봄에 관한 글을 쓴다고 말하고 다닌 덕에 자기 경험을 들려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 힘든 순간을 나눴다. 돌봄 상황에서 벌어진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혼란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무엇을 실천했는지 이야기했다. 지나버린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필요한 성찰이었다. 글을 쓰는 내내 만난 이들하고 나눈 이야기를 곱씹었다. 도대체 내 글이 누구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그게 고마웠다.
지난날 내 이야기를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사람들도 자주 생각했다. 난생처음 들어본 ‘심각한’ 이야기 앞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인 이들이었다. 미안했다. 곁에 있는 누군가가 돌봄 때문에 힘들어할 때,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내 이야기가 고통의 곁을 상상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안함을 갚으려고 더 열심히 썼다.
나 혼자만 겪는 유별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겪었지만 이야기되지 않는 경험이다. 또래들에 견줘 미리 겪었지만, 나보다 더 미리 겪은 소년 소녀 가장들이 있었다. 베이비 부머들은 지금 겪는 중이었다. 베이비 부머는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는 성인 자녀를 부양하면서 노부모를 돌보는 이중 부담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르면서 같았고, 같으면서 달랐다. 이제 같은 점을 좀더 집중해서 봐야 한다.
양적 사실과 주장을 뒤섞은, 조금은 딱딱할 수 있는 프롤로그 〈네 OO은 네가 치워라〉를 본문 안에 넣었다. 지금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돌봄 위기 상태에 직면해 있는지 써보려 노력했다. 내 경험을 사회화하려는 시도이고, 내가 겪은 희생과 성찰, 고통과 보람이 개인만의 문제로 읽히지 않기를 바라는 균형추다.
이야기가 부드럽게 진행되는 데 신경을 썼다. 흐름에 방해되는 요소들은 많이 제거했지만, 하고 싶은 말, 단상, 이미지 등을 사이사이에 쪽글로 넣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는 내 경험을 기반으로 대안을 상상했다. 한국의 돌봄 정책, 해외 사례, 돌봄의 의미, 돌봄 논의의 주체 등 내가 여기저기서 읽고 보고 느낀 조각들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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