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브라질의 대통령이 바뀌자 기다렸다는 듯 아마존이 타들어간다. 시베리아는 이미 남한 면적 4분의 1에 달하는 한대림을 산불로 잃었고, 한반도의 수십 배에 달하는 아마존의 열대우림 곳곳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구친다. 시베리아는 번개가 원인이었다는데 아마존은 방화 냄새가 풀풀 난다. 원인이 무엇이든 규모가 문제다. 지구촌 곳곳의 걷잡지 못하는 산불. 어떤 묵시록을 전하려는 듯하다.
양양에서 간성까지 강원도를 간헐적으로 태우는 산불은 최근 규모를 키웠다. 다채로운 활엽수가 가득했던 산림이 소나무 위주로 단순해지며 재앙은 확대되었는데, 해마다 로스앤젤레스를 태우는 산불도 원인이 비슷하다고 전문가는 주장한다. 산림이 건조해져 부분적으로 발생하던 산불의 규모가 커지고 횟수가 증가하는 이유는 생태계가 단조로워진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탐욕스러운 개발이 끼어들면서 생태계는 단순해졌다.
2019년 여름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한대림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든 화재는 심상치 않았다.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린 동토 밖으로 스멀스멀 배출되던 메탄가스가 화재를 걷잡지 못하게 키웠으리라. 억겁의 세월 동안 나무와 동물의 사체를 무수히 묻은 한대림은 뜨거워지면서 위기에 휩싸인다. 차가운 지압 아래에서 토탄으로 변한 유기물은 독일의 산업을 키웠지만 막대한 오염물질과 온실가스를 배출했다. 천연가스로 변한 러시아의 유기물은 아랍의 유정 못지않은 부를 일부 계층에게 안겼지만 통제할 수 없는 화마를 불러들였다.
열대우림은 적지 않은 산소를 지구의 대기에 내놓는다. 정확한 수치를 추산하지는 못하지만 전문가는 아마존 열대우림이 대략 지구상 산소의 10퍼센트 이상을 생성하고 5퍼센트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걸로 추정한다. 10퍼센트에 불과하더라도 이번 화재가 지구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 리 없다. 대기권의 산소가 10퍼센트 줄어든다면 생태계는 괴멸할 것이다.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5퍼센트 줄어들면 심화되는 지구온난화가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올 게 틀림없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파헤쳐졌더라도 여전히 세계 생물상生物相, 특정 지역 안에 서식하는 모든 식물종과 생물종의 4분의 1 이상을 품은 아마존 열대우림은 대통령이 바뀌며 대규모로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소 방목지와 콩 경작지로 변할 것이다. 브라질은 이미 미국을 제치고 유전자 조작 콩의 최대 수출국으로 등극했다. 유럽 국가들이 아마존 개발을 염려하자 브라질의 신임 대통령은 내정간섭이라며 불쾌해했다.
지구 산소의 4분의 3은 바다에서 생성되지만 드넓은 대양보다 식물성플랑크톤이 풍부한 대륙붕이 주로 담당한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조간대에서 특히 활발한데, 광활한 우리 갯벌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 모습이 아니다. 대부분 매립되었거나 매립 중이고, 매립이 예정되어 있다. 갯벌을 매립한 자리를 이산화탄소 배출이 극심한 화력발전소와 공업단지, 휘황찬란한 비행장과 초고층빌딩숲이 떠들썩하게 차지했다.
2018년 폭염에 놀란 마음은 시뻘겋게 타버린 2019년 유럽과 인도의 여름을 예사롭지 않게 바라본다. 티베트고원의 눈이 여름에 녹아내리면 동북아시아는 폭염의 고통을 받는다. 그 일대 제트기류가 약해진 탓이라는데, 예년에 없던 일이다. 북극을 감싸는 제트기류가 헐거워지면 그 아래 위도 국가들은 혹한을 맞는다. 걸핏하면 벌어지는 최근 현상이었지만 예전엔 없었다. 그런데도 주말이면 아스팔트 도로는 끝없이 막힌다. 승용차와 카라반을 끌고 휴가 떠나는 인파로 넘친다.
2018년 12월 24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린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어른들은 무엇보다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떠들면서 우리 눈앞에서 미래를 빼앗아간다!”고 목소리를 높인 스웨덴의 16세 소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 어른 같지 않은 어른”들을 향해 ‘녹색 성장’이나 ‘지속가능 성장’이라는 허울 좋은 말 잔치에서 그치지 말고 절박한 마음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그레타 툰베리다. 청소년들에게 기대는커녕 절망감을 안긴 어른들은 그레타 툰베리를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리지만 그는 남들 휴가 떠나는 금요일이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선다.
툰베리의 행동에 자극을 받았는지 유럽의 일부 시민들이 ‘멸종저항’ 행동으로 모여 섬뜩한 운동에 나섰다. 영국 의회에 난입해 시위를 벌이고 프랑스 파리의 박물관 앞에 붉은 물감을 뿌렸다. 정부에 책임 있는 정책을 촉구한 것이지만 세상은 꿈쩍하지 않는다. 3기 신도시를 구상한 대한민국 정부는 전기료 누진세 완화로 폭염에 대비한다. 사실 입시에 눌려 사는 우리 청소년 중 기후변화를 걱정하며 행동하는 청소년은 드물다. 취업이 걱정의 전부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기후변화는 어렵사리 구한 일자리를 보호해 주지 않을 텐데.
이제 홀로세를 지나 ‘인류세’에 돌입했다는 주장이 2000년대 초에 처음 나왔다. ‘현세’ 다시 말해 홀로세는 1만 1700년 전 플라이스토세 빙하기가 끝난 무렵부터 안정적으로 이어졌지만 인류가 기술을 손에 쥔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과학과 만난 기술이 거대해지면서 안정된 환경이 무너졌다. 이제 바뀐 지형은 돌이킬 수 없다. 파울 크뤼천은 홀로세에서 인류세Anthropocene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오존층 연구로 1995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그의 말에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오늘이 불안하다는 뜻도 있으리라.
쥐라기에서 백악기 사이 대략 2억 년 동안 번성하던 거대 동식물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른바 ‘대멸종’으로, 거대한 운석이 지구에 충돌한 이후 1만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사라졌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지구 생태계의 생물종 75퍼센트 이상을 삽시간에 사라지게 만든 대멸종은 지금까지 다섯 차례 발생했다.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 생물종 75퍼센트의 멸종이라면 개체 대부분이 사라졌을 텐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홀로세 말기는 인간이라는 단 한 종이 지층을 지배했다. 다른 종의 안정을 방해하며 홀로 번성한 인간은 자신의 종말을 스스로 재촉한다. 100만 년 전 존재를 드러낸 후 자연과 합일하며 생존했지만 교만해지면서 제 꾀에 걸려 넘어졌다. 경작과 가축화로 다른 생물을 억압한 지 1만 년 만에 자신의 생존 기반마저 허물어버렸다. 여섯 번째 대멸종의 징후가 흉흉하건만 인류세 지층의 주인공은 반성을 모른다. 과학기술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벼른다.
대멸종 이후 인간이 진화해 생태계에 다시 등장할 리는 없다. 확언컨대 인류세 다음 지층에 인류의 화석은 등장할 수 없다. 인간은 물론 같이 생을 누리던 생물종들도 일제히 자취를 감출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현재의 파국을 진정시킬 수 있을까? 과학기술이 대안을 제시할까? 자본과 국가의 연구비를 받으며 거대해진 과학기술은 역전을 거부하는데, 파국을 앞둔 인류와 생태계를 돌이킬 수 있을까?
마이크로플라스틱과 초미세먼지가 세포막을 통과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생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인간이 퍼뜨리는 방사능은 이 세포 저 세포를 투과하며 유전자를 건드린다. 어쩌면 이미 대멸종의 단계로 접어들었는지 모르는데, 이 파국은 거대 과학기술이 이끌었다. 자본과 권력에 굴종할수록 거대해지는 과학기술은 이익을 편취하면서 피해는 외부화하며 인류세 출범의 원흉이 되었다.
손재주의 영역인 기술과 호기심의 영역인 과학이 씨줄과 날줄이던 소박한 시절은 지나갔다. 산업자본과 권력의 이익에 경쟁적으로 복무하는 과학기술은 소비자와 다음 세대에 피해를 전가했다. 지역에서 자급하던 에너지가 자본과 권력에 독점되며 생태계에 방사능이 만연하게 되었고 마이크로플라스틱과 초미세먼지가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와 바다 밑까지 오염시켰다. 할머니의 약손을 거세한 생명공학은 유전자를 조작하고 배아를 여성 몸 밖으로 꺼내 시험관에 집어넣었다. 다음 세대는 합성될 것인가? 그 전에 인류는 종말을 고할지 모른다.
여전히 과학기술이 우리의 내일을 행복으로 안내하리라 기대하는가? 파국으로 가는 징후가 흉흉하더라도 언제나 그랬듯 과학기술이 나서서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리라 믿는가? 안타깝게도 그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본이 제공하는 편의에 분별없이 중독된 세상에서 다음 세대의 생존공간은 위축되기만 하는데, 생활의 관성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는 우리는 막연히 과학기술에 기댈 뿐이다. 과학기술이 인류 종말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수 없는 이유가 널렸건만.
인류세를 막을 수는 없다. 이미 그런 상황이 지났다. 다만 인류세의 마지막 혼돈, 대멸종의 도가니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대안마저 포기할 수는 없기에, 자식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기에, 과학기술에 기대려는 사람들에게 절박한 마음을 성급하게 전하고 싶었다. 늦기 전에 우리의 삶을 바꿔보자고. 거대과학이 끊임없이 제공하는 신기루를 외면하고 현실을 극복할 삶을 반성적으로 모색해 보자고. 그래서 그간 여기저기 써왔던 글들을 모아 재편집했다. 넋두리로 비칠지언정.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하늘이 비좁아진 아파트단지 한구석에서 박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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